어떤 용어가 널리 유행하는 사례들을 살펴보면 시대적 상황에 얼마나 부응하는지의 여부도 중요하지만 그 의미에 대한 해석이 어느 정도 열려 있는 경우가 많다. 이 같은 해석적 유연성은 더 많은 사회 그룹을 이해당사자로 포괄하도록 함으로써 해당 용어의 영향력 확대에 기여한다. 하지만 그것이 곧 각자 원하는 의미를 멋대로 부여할 수 있음을 뜻하진 않는다. 해석에 차이가 있더라도 공유되는 최소한의 기준이 있기 마련이다. 이를 지나치게 벗어나는 활용이 잦아진다면 아무런 의미도 없는 용어로 전락해 버릴 수 있다.
지난달 대통령이 ‘그린뉴딜’ 검토를 지시한 후 정부와 여당이 부랴부랴 대책을 마련하면서 그에 관한 논의들이 쏟아지고 있다. 언론들은 그린뉴딜의 일환으로 어떤 사업에 어떤 규모의 투자가 이루어질 것인지를 보도하기에 분주하다. 그런데 정작 오래 전부터 그린뉴딜의 필요성을 주장해 왔던 이들의 반응은 냉랭하다. 이중 적지 않은 수는 아예 정부와 여당이 제시하고 있는 정책을 그린뉴딜로 볼 수 없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에 전제된 기본 시각이 앞서 언급한 해석적 유연성의 범위마저 넘어 버린 탓이다.
잘 알려져 있듯이 1930년대 대공황 시기 미국의 루스벨트 정부가 추진한 ‘뉴딜’은 공공투자로 몇몇 분야의 일자리를 창출하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테네시강 유역 개발 등 공공근로사업을 통한 실업자와 빈곤층 구호 외에도 상업ㆍ투자은행 분리, 증권시장 감시 등 금융규제, 기업의 과당경쟁 억제, 부유층 증세 등 세제개편, 저소득층 주택담보대출 제공, 노동자 단결권ㆍ단체교섭권 보장, 최저임금제, 노동시간 제한 등 노동권의 강화, 실업보험과 노령연금을 비롯한 사회보장의 확대를 아우르는 제도 개혁들이 광범하게 이루어졌다.
물론 이는 같은 시기 산업ㆍ노동시장에 대한 적극적인 국가 개입, 복지의 대폭 확대와 케인즈주의적 거시경제 운영을 긴밀히 연계한 스웨덴 사회민주당의 대응에 비하면 온건한 것이었다. 뉴딜의 경험은 이후 공정 분배와 사회ㆍ경제적 정의를 위해 경제 권력의 정치적 통제가 필요함을 주장하는 미국 진보주의의 성장에 기여하게 되지만, 당시 기업 규제의 강도는 그리 높지 않았다. 경기회복의 효과도 제한적이었고, 그나마 흑인ㆍ소작농ㆍ도시빈민을 배제하고 있다는 비판이 제기되기도 했다. 그럼에도 뉴딜은 사회ㆍ경제구조를 상당 정도 변화시키는 종합적 정책 패키지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기후위기와 불평등의 위기에 직면하여 ‘그린뉴딜’의 명칭이 제기된 것은 이처럼 사회ㆍ경제 전반의 개혁을 추진했던 뉴딜의 상징성에 기인한다. 그러나 그린뉴딜의 주창자들은 기후위기와 불평등의 위기가 요구하는 구조 개혁의 수위가 1930년대 뉴딜의 그것에 비해 훨씬 더 폭이 넓고 깊을 수밖에 없다고 강조한다. 화석연료 기반 에너지에 뿌리 내리고 있는 경제체제와 점차 심화되고 있는 불평등의 양상을 감안하면, 2050년까지 탄소배출을 제로로 감축하는 동시에 구조화된 불평등을 타개해 나가는 것은 사회ㆍ경제구조의 전면적이고도 ‘정의로운 전환’을 통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상의 점들을 고려할 때 그린뉴딜에 대한 정부와 여당의 접근은 좀처럼 이해하기 어렵다. 우선 각 부문별 탈탄소화의 기준이 되어야 할 탄소배출 제로 목표조차 제시되지 않고 있다. 사회ㆍ경제 전 부문의 탈탄소화, 그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실업과 지역경제 침체에 대한 대응 등이 요구하는 다양한 구조 개혁이 포함되어야 할 그린뉴딜을 ‘한국판 뉴딜’ 내에 디지털 뉴딜과 병렬 배치시킨다는 발상도 희한하다. 그린뉴딜을 일자리 창출을 위한 녹색산업 정책으로 좁게 이해하지 않고서는 가능하지 않은 일이다. ‘뉴딜’도 ‘그린’도 없는 그린뉴딜을 충분한 사회적 토론과 의견 수렴 절차도 없이 이렇게 무리하게 추진할 이유가 도대체 무엇인가.
김상현 한양대 비교역사문화연구소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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