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안부 운동, 역사 앞에 서다] <하>바람직한 위안부 운동 방향은
정의기억연대(정의연)가 1990년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인권 운동의 첫발을 뗀 이후 최대 위기를 맞았다. 이용수(92) 할머니가 폭로한 후원금 유용 의혹과 언론의 검증 보도, 시민단체들의 잇단 고발과 검찰 수사는 30년간 한번도 경험하지 못한 사태다.
정의연에게 뼈를 깎는 혁신은 피할 수 없는 과제가 됐다. 전문가들도 이번 사태를 전환점 삼아 위안부 운동의 구조와 방향을 재정립해야 한다는 데 이견이 없다. 정의연과 그 전신인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 활동을 오랜 기간 지켜본 연구자와 시민단체 인사들은 “피해자 중심주의를 근간으로 배타성을 극복하는 게 정의연의 최우선 과제”라고 입을 모은다.
1990년대부터 피해자 증언집 제작ㆍ번역에 참여한 양현아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와 여성학계 석학 김은실 이화여대 여성학 교수, 박선아 한양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등 국내외 위안부 전문가 6명에게 위안부 운동이 나아갈 새로운 길을 물었다.
◇정치적 연대 아닌 ‘내실 있는’ 연대를
2012년 평화의 소녀상 테러, 2014년 ‘제국의 위안부’ 관련 소송 당시 할머니들의 법률대리인을 맡았던 박선아 교수는 정의연이 먼저 개선해야 할 점으로 ‘폐쇄성’을 꼽았다. 박 교수는 “얼핏 보기엔 여성ㆍ대학생 단체 등 여러 그룹과 연대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극히 일부 단체에 그치고, 이들마저 수요집회에 동참하는 정도지 정의연 운영에 깊이 참여하지 않는다”면서 “다양한 집단이 정의연의 사업에 접근할 수 있었다면 ‘안성 쉼터’ 같은 후원금 방만 운용 사례가 생기지 않았을 것”이라고 밝혔다.
박 교수는 외연 확장보다는 위안부 운동에 확실히 기여할 수 있는 단체들과 먼저 협력하는 게 중요하다고 짚었다. 그는 “정의연은 국내 최대 위안부 운동 단체로서 지역 기반의 위안부 시민단체, 법률가, 연구자들이 연대하는 허브 역할을 할 책임이 있다”며 “설령 정의연과 일부 다른 시각을 갖더라도 이들을 이사진 등으로 편입시켜 인력 전반을 재편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박 교수는 정의연이 할머니들을 수동적 피해자가 아닌 위안부 운동의 동지로 인식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할머니들마다 운동 참여도가 다를 수 있지만 모든 할머니를 정의연과 동등한 동반자라고 생각해야만 피해자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수 있다”고 말했다.
◇정의연만으로는 부족…정부 주도 TF 만들어야
김은실 교수도 정의연이 새로운 조직을 꾸려 위안부 피해자와 시민단체 활동가, 연구자들을 연대하는 역할을 맡아야 한다는 데 동의했다. 김 교수는 “그간 정의연의 전문가 풀 자체가 배타적인 측면이 있었다”면서 “정의연이 피해자의 대변자 역할을 하려면 보다 개방적인 플랫폼을 만들어 다각적인 연구가 이뤄지게 도와야 한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그러나 피해자 증언을 되풀이하는 운동 방식에는 한계가 있다고 선을 그었다. 그는 “이용수 할머니 등 피해자 목소리를 귀담아 듣는 것은 매우 중요하지만 그에만 의존하는 방식에는 성찰이 필요하다”며 “우리 사회가 진영을 불문하고 위안부 의제를 수용하려면 튼튼한 위안부 관련 연구를 축적해 공유할 방법을 고민해야 한다”고 말했다.
정의연이 피해자 관련 연구의 허브 역할을 하면, 정부는 태스크포스(TF)를 꾸려 외교ㆍ법적 문제 논의를 주도하는 게 김 교수의 구상이다. 그는 “한일협정 재해석 등 식민지 역사 청산을 위한 국제법 검토, 일본 정부와 외교적 문제 등은 정부가 국가적 의제로 잡고 전문가들을 모아 논의를 이끌어야 한다”며 “정부는 이런 노력을 하지 않고 정의연이 모든 위안부 문제를 종합하는 기구처럼 되다 보니 이번 사태가 터진 것”이라고 지적했다.
◇피해자 배상ㆍ회복 방식에 대한 종합적 연구 필요
피해자 연구 중에서도 특히 부족한 분야는 피해 배상ㆍ회복 방안이다. 양현아 교수는 “피해자 목소리가 가장 많이 담긴 증언집에서조차 피해자가 어떤 배상을 원하는지, 진정한 회복 방안은 무엇인지 등이 상세히 다뤄지지 않았다”며 “제각기 다른 피해자의 요구사항을 취합하려면 정의연뿐 아니라 정부ㆍ시민사회 등 공공영역에서 체계적인 연구가 이뤄져야 한다”고 밝혔다.
현재 국내에 생존한 위안부 피해자는 17명이다. 양 교수는 적절한 배상 방식을 찾는 게 곧 이들의 바람을 파악하는 것만은 아니라고 설명했다. 손해를 어떻게 측량할지, 비(非)금전적인 손해는 어떻게 다룰 것인지 등 세부적인 배상 기준 마련이 중요하다는 의미다. 양 교수는 “피해자 권리를 명시한 국제 협약 등에서 금전적 배상은 극히 일부일 정도로 피해 회복 방안은 다양하다”며 “전문지식이 필요한 분야라 이런 논의를 주도할 별도의 기구가 설립돼야 한다”고 했다. 이어 “정의연은 이 과정에서 피해자들의 지지자, 방어자 역할을 맡아야지 정부ㆍ학계 등의 짐을 모두 떠맡아선 안 된다”고 덧붙였다.
◇정치색 배제한 국제 연대 필요…소녀상 의미도 되새겨야
위안부 운동을 전 세계로 확대하려면 정의연이 특정 정치색을 띄어선 안 된다는 주장도 나왔다. 이용수 할머니 등과 함께 미국에서 위안부 운동을 펼쳐 온 김현정 ‘배상과 교육을 위한 위안부 행동(CARE)’ 대표는 “정치색이 배제된 위안부 운동을 추구해야만 새로운 정의연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밝혔다.
김 대표는 “한국에선 위안부 문제가 주로 민족주의로 다뤄지지만 2007년 미 연방의회에서 위안부 관련 ‘121호 결의안’이 통과된 것은 국제사회가 단순히 한국만의 피해로 보지 않고 전 세계적 전시 성폭력 문제로 봤기 때문”이라면서 “정의연이 위안부 문제를 한일전으로 끌고 가는 것은 역사를 바로 세우는 의미에서도 매우 부적절하다”고 비판했다.
김 대표는 미국을 비롯한 세계 각지에 세워진 소녀상의 의미도 되새겨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미국 공공부지에 소녀상 세우기 운동을 했던 이유는 시 정부로부터 위안부 문제 제기의 정당성을 인정받아 일본을 압박하기 위해서인데, 최근 정의연은 이런 의미를 잊고 한인 교민의 사유지 등에 무분별하게 소녀상을 건립하고 있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보여주기식이 아닌 신중한 운동 확장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위안부 운동 전세계로 나아가려면 자료 번역 시급
위안부 운동 연구 1세대인 재미학자 민병갑 뉴욕시립대 퀸스칼리지 교수는 “전세계가 일본군 위안부 피해사실을 인식할 수 있도록 연구 자료의 영어 번역이 전면적으로 이뤄져야 한다”고 제안했다. 민 교수는 “지난해 일본군 위안부 피해에 관한 강의를 진행했는데, 피해자들의 아픔을 알게 된 미국 학생들이 눈물을 흘렸다”면서 “국제사회는 아직도 위안부 역사에 대한 이해가 미비하다”고 말했다.
더 많이 알려야 하지만 자료 번역작업에 한국 정부와 정의연 등 시민단체의 협조가 잘 이뤄지지 않는다고 민 교수는 지적했다. 그는 “2017년 피해자 증언을 토대로 위안부 운동사를 집대성한 영문서적을 발간하기 위해 한국 정부에 도움을 요청했지만 ‘미국시민이라 지원할 수 없다’는 답변이 돌아왔다”며 “지난해 정의연 역시 김복동 센터 건립 비용 등을 이유로 연구지원 요청을 거절했다”고 토로했다.
민 교수는 “위안부 피해 사실을 세계에 알리는 것이야말로 미래세대가 위안부 운동을 이어 받고 연구자를 보다 많이 배출하는 방법”이라며 “정의연이 윤미향 1인 체제가 될 만큼 위안부 활동가가 부족한 현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서라도 이러한 선순환 구조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미래세대를 이해시킬 교육 방안 고민해야
국내에서도 위안부 운동을 계승하기 위한 고민은 치열하게 진행되고 있다. 대구ㆍ경북 지역에서 위안부 운동을 해 온 서혁수 ‘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 대표는 “최근 이용수 할머니에게 가해진 2차 가해를 보면 청소년 세대의 역사관이 얼마나 후퇴하고 있는지 뼈아프게 느낀다”며 “직ㆍ간접적으로 일제를 겪어보지 못한 세대가 극우 유튜브 등을 통해 한일 역사 문제를 자의적으로 받아들일까 매우 우려된다”고 말했다.
민간에서 이런 교육을 수행하려면 정부의 맞춤형 지원이 선행돼야 한다. 서 대표는 “우리 단체는 전국에서 정의연 다음으로 규모가 큰 위안부 운동 단체인데도 불구하고 자체적으로 교육 자료를 제작하거나 박물관을 설립하기엔 예산이 턱없이 부족하다”며 “정부가 민간에서 활용할 수 있는 위안부 교육 시청각 자료를 만들어 공급해주는 노력 등이 필요하다”고 제안했다.
더불어 피해자 할머니들에 대한 지원을 더욱 현실화해야 한다고 서 대표는 지적했다. 그는 “지역에서 할머니들을 살피다 보면 개개인마다 필요한 게 모두 다른데도 일괄적으로 생활 물품을 지급한다든지 비효율적인 지원이 이뤄지고 있다”며 “생존자 17명 각각이 처한 상황을 정확히 파악해 수요에 맞게 트라우마 치료, 생활 지원 등을 해야 한다”고 꼬집었다.
김영훈 기자 huni@hankookilbo.com
김정원 기자 gardenk@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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