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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 ‘멀티 페르소나’의 소비자들

입력
2020.06.01 04:30
2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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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방송인 김신영씨의 둘째 이모이자 트로트 가수인 김다비씨가 연일 화제다. 나이는 빠른 45년생, 망원시장 인기 아이템인 붉은색 골프룩을 즐겨 입지만 골프는 쳐본 적 없다는 김다비씨는 사실 허구의 인물이다. 누가 봐도 김신영씨 본인인데 극구 부인하는 천연덕스러움에 사람들은 알면서도 모르는 척 속아준다. 김신영씨가 연기하는 유쾌한 캐릭터가 나름 마음에 들기 때문이다.

마치 자신이 아닌 양, 가짜 캐릭터를 내세워 활동하는 사례는 요즘 방송계의 트렌드다. 랩퍼 매드클라운은 분홍색 복면을 착용한 ‘마미손’이란 새로운 정체성을 앞세워 신곡을 발표했다. 방송인 유재석씨는 ‘유산슬’이라는 신인 가수로 반짝 변신하기도 했다. 박나래씨 역시 안동 조씨 성을 가진 ‘조지나’ 캐릭터로 화제를 모았다. 이들은 새로운 캐릭터를 단순 연기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본래 정체성과의 관계를 부인하며 완전히 다른 인격체인 척 행동한다.

흥미로운 사실은 요즘 사람들이 이런 정체성 분리를 전혀 어색하게 느끼지 않는다는 점이다. 과거에는 ‘지킬과 하이드’처럼 한 사람이 여러 개의 정체성을 가지면 이를 일종의 정신질환으로 취급했다. 반면 최근엔 연예인이 아닌 일반인조차도 하루에도 여러 차례, 상황에 따라 정체성이 바뀐다. 예컨대, 요즘 센스 있는 부장님들은 출근길에 무선 이어폰을 끼고 있는 부하 직원을 만나도 절대 먼저 인사하거나 아는 척하지 않는다고 한다. 이어폰을 꼽고 있을 땐 아직 회사원 정체성이 발현되기 전인 일반인 정체성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다층적으로 형성되는 자아를 ‘멀티 페르소나’라고 부를 수 있다. 페르소나는 그리스어로 가면이라는 의미다. 현대인들은 세상을 살아가면서 굉장히 많은 가면을 갖고 살아간다. 온순하던 사람이 정치 얘기만 나오면 특정 정당의 열렬한 투사가 되기도 하고, 평범한 주부가 BTS 얘기만 나오면 갑자기 눈을 반짝거리는 아미로 바뀐다. SNS를 이용할 때에도 그것이 카카오톡이냐, 유튜브냐, 인스타그램이냐에 따라 다른 정체성으로 소통을 하고, 심지어는 하나의 SNS에서도 한 사람이 부계정․가계정 등 여러 개의 계정에 다른 자신이 되어 사진을 올린다.

멀티 페르소나를 보유한 소비자는 더 이상 일관된 구매자가 아니라, 상황 따라 맥락 따라 취향과 선호를 바꾸는 다면적인 존재다. 앞으로 기업들은 한 명의 소비자를 하나의 정체성을 가진 대상으로 타깃팅하는 것이 아니라, 소비자가 처한 상황과 페르소나에 맞춰 전략을 세워야 한다. 패션 기업 한섬이 운영하는 ‘더한섬하우스’는 22개의 자사브랜드를 브랜드별이 아닌 페르소나별로 혼합 배치해 매장을 구성한다. 시스템 재킷과 타임 스커트, SJSJ 슬리퍼를 함께 연출해 바캉스 페르소나를 제안하는 방식이다.

멀티 페르소나가 확산될수록 소비 양극화가 아닌 소비 양면화 현상이 더욱 두드러진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소비 양극화는 경제력이 높은 소비자는 프리미엄 상품을, 그렇지 않은 소비자는 초저가 상품을 구매하는 현상으로, 고객군이 소득 수준을 바탕으로 이원화되는 것을 의미한다. 반면 소비 양면화는 한 사람의 소비자가 프리미엄 제품과 저가 제품을 동시에 소비하는 현상을 뜻한다. 한 두 품목에 대해서는 ‘부자 페르소나’를 발휘해 최고급 제품을 기꺼이 구매하면서도, 나머지 영역에 대해서는 ‘절약 페르소나’를 발휘해 초저가 제품을 구매하는 것이다.

멀티 페르소나의 시대, 사람들이 표현할 수 있는 정체성의 수는 늘어났지만 역설적으로 정체성의 기반은 매우 불안정해졌다. SNS 계정 속에 웃고 있는 나의 모습과 현실 세계의 나 사이의 거리가 멀어질수록 ‘진짜 나다움'에 대한 고민이 깊어진다. 기업 역시 우리 고객은 누구이며 어떤 정체성을 갖길 원하는가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하며 자사만의 ‘고객 페르소나’를 명확히 정의해야 할 것이다.

전미영 서울대 소비트렌드분석센터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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