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익 앞에 동맹도 없는 트럼프 외교
이빨 드러낸 늑대 전사 시진핑 외교
그 틈에서 생존할 ‘K외교’ 확립해야
주요 20개국(G20) 체제는 1999년 아시아 금융위기 당시 사태 수습을 위한 재무장관 회의로 출발,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때 정상회담으로 격상하면서 세계화 시대 다자협력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그런데 2020년 코로나19 위기를 맞아 기능을 다한 듯하다. 코로나19가 빠르게 확산하던 3월 26일 열린 G20 특별 화상 정상회의는 국제 공조 체제를 구축하는 자리가 될 것이란 기대를 모았지만 미국과 중국의 코로나19 사태 책임론 공방 속에 알맹이 없는 공동성명만 내놓고 끝났다. 이후 세계 각국이 무질서한 국경 봉쇄 등 독자 대응에 나서며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악화했다. 국제 공조가 사라진 코로나19 이후 세상을 ‘G0’ 시대라고 부르는 사람이 늘고 있다.
설상가상으로 미중 지도자는 자신들의 권력 기반 강화를 위해 그런 국제 혼란을 더 부추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연말 대선에 지지층을 결집하기 위해 중국을 모든 악의 근원으로 몰아세운다. 코로나19 확산 책임을 중국에 떠넘기는 것을 시작으로, 중국이 시장 개방 약속을 어기고 지식재산권을 훔치는 악당이라며 중국 경제의 숨통을 옥죈다. 이 뿐만 아니라 오랜 동맹마저 당장의 자국 이익과 중국 고립을 위해 궁지에 빠뜨린다. 이런 트럼프의 외교 노선에 대해 가장 가까운 동맹인 영국 언론마저 ‘자기중심적’ ‘독설적’ ‘신뢰 못 할’이란 수식어를 사용할 정도다. 그중 점잖은 표현이 ‘거래형(transactional)’ 정도인데, 그 속에도 ‘장사치’라는 비아냥이 숨어 있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외교 노선에는 ‘전랑(戰狼ㆍ늑대 전사) 외교’라는 별명이 붙었다. 이는 ‘중국판 람보’라고 할 수 있는 액션 영화 제목에서 따온 것이다. 중국은 이제 세계 2위의 경제력을 바탕으로 주변국에 대한 막말, 경제 보복, 물리력 동원은 물론, 미국과의 충돌도 피하려 하지 않는다. 2018년 임기 제한을 없앤 시 주석은 2023년 이후에도 계속 집권할 지지 기반 강화를 위해 중국이 미국에 맞설 수 있는 강대국이 됐음을 국민에게 보여 주길 원한다.
홍콩은 장사치와 늑대의 힘겨루기가 국제사회에 어떤 파괴적 결과를 초래하는지를 보여 주는 첫 사례가 될 것 같다. 지난해 ‘송환법’ 입법이 홍콩인들의 거센 반발로 무산되자, 중국 정부는 이를 중국 정부의 주권에 대한 외세의 간섭이라 선전하며 자국민을 자극했다. 이어 국제협약과 입법 절차조차 무시한 채 강제로 ‘보안법’을 홍콩에 적용하려 한다. 이는 아시아 최대 ‘금융 허브’ 홍콩에는 사형 선고다. 정부가 자의적으로 국민을 구속할 수 있는 지역에 어떤 다국적 금융회사가 본사를 둘까. 홍콩 금융시장에 대한 중국의 의존도가 많이 줄어들긴 했지만, 홍콩은 여전히 시가총액 세계 4위 증시를 보유한 국제 금융 허브다. 특히 미국의 대중국 경제 공격이 거셀수록 중국 경제에서 홍콩의 중요성은 더 커질 수밖에 없다. 이를 잘 아는 미국은 홍콩에 대한 경제 특혜 철폐 카드로 중국을 압박하고 있다. 중국 정부는 막대한 경제적 피해마저 감수할 각오가 돼 있는 듯하다.
장사치와 늑대 간 싸움의 불똥은 우리에게도 튀고 있다. 미국 정부는 구체적 근거도 없이 주한미군 방위비 분담금을 한꺼번에 50%나 올리라고 압박하고, 이어 중국을 배제하는 미국 주도의 아태 경제블록인 경제번영네트워크(EPN)에 참여하라고 독촉한다. 중국도 2016년 미군의 사드 배치에 대한 경제 보복의 뒤끝을 이어가며 홍콩 보안법 지지를 요청하고 있다.
이럴 때일수록 정신을 차려야 한다. 우선 개방경제와 다자협력 등 우리 경제 발전의 원천이자, 미국 중국도 쉽사리 부인할 수 없는 ‘K외교’의 원칙을 분명히 밝히고 이를 근거로 우리 정책의 당위성을 미중에 설득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처럼 장사치와 늑대 사이에서 곤혹스러워하는 나라들과 새로운 G20 공조체제 구축에도 나서야 한다. 원칙 없이 이리저리 휘둘리다가는 제2의 홍콩이 되지 않으리라 누가 장담할 수 있겠는가.
정영오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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