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란 이름의 ‘특권 울타리’...의대정원 확대 발목까지 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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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란 이름의 ‘특권 울타리’...의대정원 확대 발목까지 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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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5.26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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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발부터 다른 ‘의사 대물림 시대’ 

 정원 안 늘어도 흔들림 없는 그들만의 세계 

지난달 28일 오후 서울 대치동 학원가 거리에서 학생들이 삼삼오오 학원으로 향하고 있다. 배우한 기자

서울의 한 사립대 의대에 다니는 김모(25)씨는 의대 편입 전까지만 해도 직업환경 전문의가 목표였다. 1년 넘게 시민단체 활동을 했던 생명과학대 학부생 시절 산업재해 판정을 받지 못한 노동자들의 아픈 사연을 옆에서 지켜보며 키웠던 꿈이다. ‘꼭 의사가 돼 환경성 질환을 깊이 연구해보겠다’고 마음 먹었지만 의대생이 된 뒤 김씨의 신념은 무너졌다.

100명에 가까운 동기 중 약 70%는 부모가 의사였다. 집안에 개업할 여윳돈이 있는 친구들도 발에 채일 정도로 많았다. 반면 김씨는 가정 형편이 넉넉하지 않았다. 지방에서 태어나 독학으로 서울의 의대까지 올라온 처지를 곱씹다 보니 뒤늦게 보상 심리가 발동했다. 지금 김씨는 피부과를 1순위에 뒀다. 그는 “의대생 면면을 보면 대부분 의대 교수나 지방 의사 자녀들이라 상대적 박탈감이 든다”면서 “그들도 워라밸(일과 삶의 균형)이 가능한 전공을 택하는데, 나만 외과나 내과에서 고생하는 건 싫다”고 속내를 털어놨다.

의사 부모가 의사 자식을 만드는 ‘의사 대물림’ 현상이 심화되고 있다. 의대가 사회·경제적 지위를 대물림하는 수단으로 전락했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커지는 가운데 의사들이 누리는 소득과 정보 격차가 의대 정원 확대 논의에 장애물이 된다는 지적도 나온다.

25일 교육계 등에 따르면 2015년을 기점으로 취업난이 장기화되면서 자녀를 의사로 만들려는 의사 부모들이 급증했다. 입시 전문가들은 의사 부모를 둔 학생들이 출발선에서 몇 걸음 앞서있다고 한 목소리로 말한다. 높은 평균 수입과 사회적 위치 등 직업적 장점을 보고 자란 데다 부모의 광범위한 지원 속에 일찍부터 의사를 목표로 스펙 관리에 들어간다는 것이다. 강봉성 GL의대입시연구소 소장은 “5년 전만 하더라도 의대 입시 컨설팅을 받으러 오는 고객 10명 중 5명이 의사 자녀였다면 지금은 8명으로 늘었다”라며 “나머지 2명도 부모님이 약사 등 범의료계 종사자거나 법조인 등 전문직”이라고 말했다.

서울 대치동 학원가에서는 한 달에 적어도 300만~500만원, 많게는 1,000만원까지 들여야 의대를 보낼 수 있다는 이야기까지 나온다. 대치동의 한 영어학원 관계자는 “본인들도 치열한 입시를 경험한 때문인지 의대에 가려면 영어는 어릴 때 잡아야 한다는 인식이 강하다”라며 “요즘엔 초등학생 때 무조건 토플(IBT) 100점을 넘겨야 의대를 노려볼 수 있다”고 전했다.

의대 교수들이 ‘자식 의사 만들기’에 혈안이 돼 정보를 공유하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이들은 굳이 의대 정원이 늘지 않더라도 누구보다 자녀를 의대에 보낼 수 있는 유리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익명을 요구한 지방 국립대 의대의 한 교수는 “입학사정을 경험한 의대 교수들은 합격자 ‘족보’를 알음알음 구해 당락에 중요한 스펙을 파악, 족집게로 필요한 것만 준비시킨다”면서 “조국 전 장관 자녀 사례처럼 경력을 마구잡이로 구해다 주는 건 비효율적”이라고 했다.

의사 대물림 현상이 심화되면서 의대 내 인기 학과의 변화도 감지된다. 특정 과에 대한 쏠림은 여전하지만 돈 잘 버는 ‘피안성(피부과ㆍ안과ㆍ성형외과)’보다 몸 편한 ‘정재영(정신건강의학과ㆍ재활의학과ㆍ영상의학과)’ 인기가 최근 5년새 상대적으로 높아졌다. 이미 경제적으로 여유로운데 굳이 수익에 목을 멜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올해 전반기 서울아산병원 레지던트 채용 때 성형외과 지원율이 1대 2.33이었던 반면, 정신건강의학과는 1대 3으로 전체 24개과 중 지원율이 가장 높았다.

서울 송파구의 한 내과 개원의는 “의대생 아들에게 항상 ‘아버지는 과를 잘못 선택했다’고 충고한다”면서 “외과를 택해 훌륭한 수술 집도의나 교수가 될 것이 아니라면 성형외과, 피부과 등 편하면서 돈 많이 버는 전공을 선택하길 바라는 게 솔직한 마음”이라고 고백했다.

이승엽 기자 syle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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