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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호기의 굿모닝 2020s] ‘다수 지배’ 민주주의로는 부족… 자유ㆍ공공선 접점 찾는 공화주의 상상력 필요

입력
2020.05.26 04:30
2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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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3> 공화주의 

인간이 더불어 살아가는 존재인 이상 공화주의는 인류의 ‘오래된 미래’다. 공화주의에 의해 민주주의도 공고해질 수 있다. 독립 운동인 3ㆍ1운동은 동시에 공화주의 운동이었다. 3ㆍ1운동 100주년을 하루 앞둔 지난해 2월 28일 충남 천안 유관순 열사 사적지 앞에서 열린 아우내 봉화제의 참석자들이 횃불을 들고 운동 당시를 재연하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인간이 더불어 살아가는 존재인 이상 공화주의는 인류의 ‘오래된 미래’다. 공화주의에 의해 민주주의도 공고해질 수 있다. 독립 운동인 3ㆍ1운동은 동시에 공화주의 운동이었다. 3ㆍ1운동 100주년을 하루 앞둔 지난해 2월 28일 충남 천안 유관순 열사 사적지 앞에서 열린 아우내 봉화제의 참석자들이 횃불을 들고 운동 당시를 재연하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헌법 제1조 1항이다.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표현한 말이다. 민주공화국이란 말에 담긴 의미는 대한민국을 지탱하는 두 이념이 민주주의(democracy)와 공화주의(republicanism)라는 데 있다. 민주주의는 ‘인민(demos)의 지배(kratia)’를 뜻한다. 그렇다면 공화주의가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공화주의의 역사적 계보 

공화국(republic)의 기원을 이룬 말은 라틴어 레스 푸블리카(res publica)다. 이 레스 푸블리카는 그리스어인 폴리스(polis)에서 유래됐다. 그리스의 시인 소포클레스가 노래했듯, 한 사람이 지배하는 곳은 폴리스가 아니다. 로마의 철학자 키케로가 주장했듯, 공동의 법과 이익에 의해 결속된 공동체로서의 국가가 레스 푸블리카다. 공화국의 이상은 한 개인이나 소수가 아닌 시민 모두가 주인이 되는 공동체로서의 나라 만들기에 있다.

이러한 공화국을 추구한 정치사상이 공화주의다. 다시 말해, 공화주의를 구현하는 정치체제가 공화국이다. 서구 사회에서 공화주의의 기원은, 정치학자 김경희가 ‘공화주의’에서 지적하듯, 고대 그리스의 아리스토텔레스, 로마의 폴리비오스와 키케로까지 올라간다.

고전적 공화주의는 정치 참여와 법치를 통한 자유의 획득, 정치의 우선성에 대한 강조, 공공선 추구를 통한 시민적 덕성의 함양에서 그 특징을 찾을 수 있다. 이러한 공화주의가 지향하는 정부 형태가 아리스토텔레스가 강조한 혼합정이다. 혼합정은 구성원 일부가 사적 이익을 위해 공동체를 마음대로 하는 것을 저지하기 위해 권력의 균형을 추구하는 정치체제를 말한다.

공화주의와 민주주의가 유사하면서도 상이한 지점이 여기서 비롯된다. 민주주의와 공화주의는 군주제에 대한 저항의 이념이자 사상이었다. 군주의 자의적인 1인 통치에 맞서 시민들은 자유와 권리를 주창하기 위해 민주주의와 공화주의를 내세웠다.

그러나 동시에 민주주의와 공화주의는 결이 다르다. 정치학자 채진원이 지적하듯, 민주주의는 다수파에 의한 소수파 지배, 즉 다수결 지배를 인정하게 된다. 반면에 공화주의는 다수파와 소수파의 존재를 모두 인정하면서 누가 국가권력을 획득하더라도 견제와 균형을 통한 공존 및 통합을 추구한다. 채진원은 민주공화국이 가능하기 위해 두터운 중도파가 중심을 잡고 지적ㆍ도덕적ㆍ정치적 리더십을 발휘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정치학자 김경희는 저서 ‘공화주의’에서 공화주의의 역사적 계보를 살핀다.
정치학자 김경희는 저서 ‘공화주의’에서 공화주의의 역사적 계보를 살핀다.

르네상스 이후 공화주의에 새로운 활력을 제공한 이들은 이탈리아의 니콜로 마키아벨리, 미국의 제임스 매디슨, 프랑스의 알렉시스 드 토크빌 등이었다. 널리 알려졌듯, 마키아벨리는 통치자와 인민이 덕성을 갖추고 제도를 통해 절대 권력을 제한할 수 있는 공화정을 제시했다. 그리고 매디슨은 다수정의 전횡을 막는 제도로서의 헌법을 강조함으로써, 토크빌은 시민들의 자발적 결사와 자치의 경험을 통해 획득되는 자유를 중시함으로써 공화주의에 풍부함을 더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공화주의의 발전에서 큰 기여를 한 이들은 정치사상가 한나 아렌트와 신로마 공화주의자들인 퀜틴 스키너, 필립 페팃, 모라치오 비롤리였다. 이 가운데 특히 아렌트와 페팃의 견해는 주목할 만하다. 먼저 아렌트는 공적 영역의 중요성을 재발견함으로써 현대의 공화주의에 새로운 정치적 상상력을 불어넣었다.

한편 페팃은 ‘신공화주의’에서 소극적 자유와 적극적 자유의 이분법을 넘어선 제3의 개념으로 ‘비지배(non-dominance)로서의 자유’를 제시한다. 페팃이 특히 비판하는 것은 자유를 간섭의 부재로 보는 기성의 자유주의가 공공성을 파괴한다는 점이다. 그는 자유를 타인의 자의적 의지로부터 자유로운 ‘비지배’로 파악한다. 그리고 이 비지배로서의 자유가 구성원 모두가 함께 누리고 지켜가야 할 사회적 공공선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자유를 증진시키는 국가를 페팃은 ‘포용적 공화국’이라고 명명한다.

 ◇2020년대와 공화주의의 미래 

이처럼 공화주의는 시대에 따라 그 의미가 변화되고 수정돼 왔다. 정치학자 조민에 따르면, 현대의 공화주의는 비지배로서의 자유, 권력 분산, 법치주의, 공공성, 시민적 덕성을 자신의 핵심 가치로 내세운다. 이러한 공화주의를 구현하는 공화국은 법과 공공성에 기반을 둔 주권자인 국민들이 그 나라의 주인이 되는 공동체를 의미한다.

2020년대에 공화주의를 그렇다면 왜 소환해야 하는 걸까. 이에 대한 근거는 역사학자 조승래의 ‘공공성 담론의 지적 계보’에서 구할 수 있다. 그는 말한다.

“공화주의는 인간을 사적 개인으로 규정하는 대신 공동체적 존재로 부각시켰다. 그러하여 공화주의는 개인의 사적 이익을 추구하는 행위를 정당화하는 대신 공동체의 공동선을 위해 공적 영역에 참여하는 행위를 우선시했다. (…) 그래야만 인간들은 공동체의 평등한 구성원으로서 지위를 누리게 되고 종속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2016년 11월은 ‘최순실 게이트’가 박근혜 정권을 흔들던 때였다. 각계의 시국선언이 줄줄이 이어졌다. 음악인들까지 동참할 정도였다. 당시 선언문 낭독을 위해 서울 광화문광장에 모인 음악인들. 한국일보 자료사진
2016년 11월은 ‘최순실 게이트’가 박근혜 정권을 흔들던 때였다. 각계의 시국선언이 줄줄이 이어졌다. 음악인들까지 동참할 정도였다. 당시 선언문 낭독을 위해 서울 광화문광장에 모인 음악인들. 한국일보 자료사진

2020년대에 공화주의가 갖는 의의는 세 가지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다. 첫째, 공공성 회복의 차원이다. 1980년대 이후 신자유주의 시대를 경유하면서 진행된 공공성의 위기를 지켜볼 때, 오늘날 공화주의의 가치는 중요하다. 어느 나라에서나 관찰할 수 있는 ‘만인 대 만인의 투쟁 상태’는 공동의 이익과 가치가 이제는 부재한 것처럼 보이게 한다. 훼손된 공공성을 어떻게 재구축할 것인지는 보수와 진보를 넘어선 모두의 과제다.

둘째, 통합의 정치의 차원이다. 21세기에 들어와 대다수 나라들에서 진행된 정치적 양극화를 지켜볼 때, 공화주의가 제시하는 공존과 통합의 정치는 새로운 정치적 대안이라 할 만하다. 최근 지구적 수준에서 가장 주목할 정치적 현상은 포퓰리즘의 분출이다. 포퓰리즘은 반다원주의를 앞세움으로써 민주주의를 위협한다. 다원주의적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공존과 통합의 정치라는 공화주의적 상상력이 요청된다.

셋째, 코로나19 이후의 차원이다. 코로나19 사태는 개인주의와 공동체주의를 성찰하게 한다. 그 핵심 질문은 공동체의 안전을 위해 개인의 자유를 어디까지 제한할 것인지에 있다. 인간은 개인적 존재이자 공동체적 존재다. 앞으로 예견되는 비규칙적인 바이러스 폭풍에 대비하기 위해서라도 개인적 자유와 공동체적 안전의 관계에 대해선 공화주의의 정치철학이 결코 작지 않은 함의를 안겨준다.

인간은 다른 사람들과 같이,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존재다. 이 진술이 참이고, 갈수록 중요해진다면, 공화주의는 우리 인류의 ‘오래된 미래’라고 나는 생각한다.

 ◇한국사회와 공화주의 

우리 역사에서 공화주의가 전면적으로 부각된 것은 1919년 3ㆍ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을 통해서였다. 3ㆍ1운동의 정신은 10개 조항으로 이뤄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대한민국 임시헌장’에 반영됐다. 그 제1조가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함’이었다.

이 임시헌장을 기초한 이는 독립운동가 조소앙으로 알려졌다. 조소앙은 프랑스의 몽테스키외를 따라 귀족 주도의 ‘귀족공화제’에 대비되는 평민 중심의 ‘민주공화제’를 대한민국의 정체성으로 삼았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라는 정신은 1948년 제헌헌법에서 다시 강조됐고, 1987년 87년헌법까지 그대로 계승됐다.

대한민국의 정체성이 민주공화국에 있음을 선포한 지 100여년이 지난 현재, 민주주의와 공화주의의 중요성을 환기하는 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앞서 말했듯, 민주공화국의 핵심은 국민이 주인이 되고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의 구현에 있다. 민주공화국은 우리 시대의, 우리 사회의 ‘매스터 프레임’이라 할 수 있다.

‘촛불혁명’에 의한 박근혜 정권의 붕괴는 주권이 시민에게 있다는 사실을 극적으로 드러냈다. 이제 민주주의가 공화주의로 보완돼야 할 때다. 박근혜 대통령 탄핵 소추안이 국회를 통과한 2016년 12월 9일 서울 광화문광장 촛불집회에 참가한 시민들의 표정이 밝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촛불혁명’에 의한 박근혜 정권의 붕괴는 주권이 시민에게 있다는 사실을 극적으로 드러냈다. 이제 민주주의가 공화주의로 보완돼야 할 때다. 박근혜 대통령 탄핵 소추안이 국회를 통과한 2016년 12월 9일 서울 광화문광장 촛불집회에 참가한 시민들의 표정이 밝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그동안 우리 사회에서 공화주의는 민주주의보다 상대적으로 덜 주목 받아 왔다. 민주주의로 충분하다는 생각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그런데 민주주의와 공화주의는, 앞서 지적했듯, 그 결이 사뭇 다르다. 내가 보기에 민주주의와 공화주의는 경쟁적이라기보다 보완적 가치다. 빈부 격차, 정치의 양극화, 그리고 공공성의 위기에 공화주의는 새로운 처방을 제시할 수 있고, 이를 통해 민주주의는 더욱 공고화할 수 있다.

2020년대에 개인의 자유와 공동체의 공공성은 대립할 수 있고 또 충돌할 수 있다. 그러나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은 이 대한민국이 나의 나라인 동시에 우리 모두의 나라라는 점이다. 나의 삶과 우리의 삶을 어떻게 조화시킬 수 있을지에 공화주의는 풍부한 사유와 대안을 제공한다. 공화주의의 상상력을 가져야 할 이유는 너무도 분명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김호기(연세대 사회학과 교수)

 ‘김호기의 굿모닝 2020s’는 2020년대 지구적 사회변동의 탐색을 통해 세계와 한국의 미래를 생각하는 <한국일보> 연재입니다. 매주 화요일에 찾아옵니다. 다음주에는 ‘조지 베일런트’가 소개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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