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 이것 보세요, 잉어예요, 잉어.”
지난달 29일 할머니 손을 잡고 서울 송파구 성내천을 찾은 박재훈(6) 어린이는 연신 신기한 표정에 들떠있었다. “그림책에서 본 잉어가 이렇게 크고 뚱뚱한지 몰랐다”며 천진난만하게 웃었다.
서울 도심 속 숨겨진 수변 생태계…. 송파구 경계를 두르는 송파둘레길을 걷다 보면 이런 생각이 저절로 든다. 송파둘레길은 ‘성내천(6㎞)~장지천(4.4㎞)~탄천(7.4㎞)~한강(3.2㎞)’으로 이어지는 물길과 자연 생태하천으로 조화를 이루는 길이다. 대한민국 도시 개발의 상징인 서울 강남구와 송파구 고층아파트 단지들 한복판에 이런 ‘청초한’ 자연에 빠져들만한 곳이 있었는지 새삼 놀라게 된다.
수변과 자연생태 보며 일상 스트레스 ‘싹 날린다’
송파구는 내년 6월 완공을 목표로 송파둘레길 조성 사업을 추진 중이다. 기존 둘레길에 경관 조명을 설치하고 끊긴 산책로를 잇는 등 주민 편의시설을 늘리는 게 골자다. 2018년 10월 기본계획이 완성된 뒤 지난해 10월 착공됐다. 총 연장은 21㎞. 일상의 보통 속도로 걸을 경우 5시간 30분가량 소요된다.
구간은 도시 경관과 농촌 풍경이 공존하는 성내천, ‘숲 속 푸른길’을 주제로 한 장지천, 생태경관보전지역을 끼고 있는 탄천, 휴식과 레저 중심인 한강공원이다. 이 중 장지천 구간 일부(2.4㎞)를 제외하면 모든 길이 수변을 따라 지난다. 한강과 탄천의 장대함, 성내천과 장지천의 아기자기함이 어우러졌다. 평탄한 지형에 보행로와 자전거도로가 말끔히 정비돼 시민들이 부담 없이 찾을 수 있는 게 큰 장점이다. 서울지하철 2호선처럼 시작점과 종착점이 따로 없는 순환형인데다 지하철에서 내려 도보 10분이면 어느 구간이든 도달한다.
다양한 생태계와 수변ㆍ습지 공간은 각박한 도시생활 중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현대인에게 정서적 위로를 준다. 2018년 서울연구원이 시민 1,000명을 상대로 ‘다양한 생태계 유형이 삶에 미치는 영향’을 조사한 결과 1위가 ‘다양한 공원(72.8점)’, 2위는 ‘강‧호수‧습지(68.7점)’였다. 급속한 도시화로 사람들의 친환경 심리가 커지지 마련인 만큼 송파둘레길은 이를 해소시킬 조건을 갖췄다는 평가다.
서울 도심 여러 물길의 합주
송파둘레길은 서울에서는 보기 드문 ‘물길’이라는 점이 눈길을 끈다. 전체 구간의 88%인 18.4㎞가 수변을 보유하고 있다.
반면 현재 서울 시내의 대부분의 둘레길은 산이나 공원을 활용해 구성한 경우가 많다. 서울의 대표적인 둘레길인 서울둘레길 8개 코스는 남산 인왕산 등 서울의 명산을 중심으로 조성한 산길이다. 많은 시민이 찾는 한양도성길도 산을 따라 지어진 성곽길이다. 산의 경사도에 따라 노약자 및 여성에겐 다소 험난한 코스가 종종 등장한다.
송파둘레길의 시작은 2002년 건천이던 성내천의 복원이다. 성내천을 덮었던 시멘트를 걷어 내고 한강에서 물을 끌어오자 성내천 주변에 수로와 생태의 기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성내천은 아파트가 밀집했지만 도심 도로에서 돌계단을 내려가면 바로 나타나 전형적인 시골 하천을 닮았다. 바로 자연 생태하천이다. 돌다리에서 친구들과 수다를 떠는 소녀들, 운동기구를 움직이며 건강을 챙기는 데 열중인 다수의 중장년층이 눈에 띄었다 여름철 물놀이 시설까지 운영되면 사람들로 꽉 차는 지점이다. 걷다 보니 개발제한구역에서 텃밭 농사를 짓는 모습도 보였다.
송파구가 구민의 여가와 문화생활을 도모하기 위해 정비 중인 상태지만 입소문이 나면서, 강남, 서초, 강동 주민들도 옮겨온다. 주말에는 경기 남양주, 성남은 물론 강북 지역과 경기 북부, 인천 등에서도 먼 길을 마다 않고 찾아온다. 장은희 송파구 주무관은 “서울지하철 잠실역과 올림픽공원역에 인접한 교통의 요지여서 봄·가을에는 수도권 주민을 위한 둘레길로 확장된다”고 말했다.
성내천 구간에서 가장 인기가 많은 곳은 은하수길이다. 야간에 방문하면 바닥 조명을 배경으로 별빛이 여러 갈래로 쏟아진다. 연인이나 가족과 추억을 간직하기에 안성맞춤인 곳이다. 야간 불빛이 나오는 원리는 축광석이다. 낮에 자연광을 축적했다가 밤이 되면 빛을 발산해 은은하고 낭만적인 분위기를 연출한다.
장지천 구간에서는 작은 숲 속에 와있는 평온함이 느껴진다. 장지근린공원(58만5,652㎥)이 유명하다. 도심 공원에 드물게 조성된 메타세콰이어길도 인기가 높다. 한 마디로 숲의 향기와 녹음을 동시에 만끽하는 최적의 장소다.
생태경관보전지역인 탄천 구간에는 둘레길 연계 사업(광평교~탄천2)이 진행된다. 그간 제대로 정비된 산책로가 없어 주민들이 불편을 겪었는데 올해 사업이 완료되면 탄천 구간 이용이 더 쉬워진다. 강남 3구에서 ‘개발 광풍’을 피한 대표적인 곳으로 계절에 따른 생태환경 변화를 제대로 관찰할 수 있다.
한강 구간은 드넓은 강을 바라보며 걷기와 자전거 타기 등 휴식형 스포츠를 즐길 수 있다. 성내천-장지천-탄천을 돌아 한강으로 나오면 서울 도심의 경관이 파노라마로 펼쳐진다.
자연 생태와 습지의 공존
송파는 서울의 대표 도심 중 하나다. 그래서 얼핏 ‘생태’라는 표현을 들으면 잠시 고개가 갸웃거려진다.
하지만 송파둘레길에는 다양한 생물들이 인간과 공존하고 있다. 청둥오리, 흰뺨검둥오리, 중대백로(성내천), 물닭, 쇠오리, 흰속물떼새(탄천), 굴뚝새, 논병아리, 민물가마우지(한강) 등등. 대략 꼽아도 이 정도다.
실제 성내천에서는 떼지어 몰려드는 자연산 잉어와 송사리들이 쉽게 목격됐다. 물고기를 포획한 후 의기양양하게 입 속으로 집어넣는 백로의 모습도 포착됐다. 탄천 구간에서는 천연기념물 황조롱이, 흰목물떼새를 수시로 볼 수 있는 행운도 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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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다 인공습지를 자연습지처럼 잘 간직한 방이습지도 뻬놓을 수 없다. 성내천을 걷다 살짝 옆으로 빠져 나오면 방이습지가 있는 방이생태학습관이 모습을 드러낸다. 1970년대 논밭이던 이 곳은 벽돌공장, 양어장이 들어섰다가 서울시가 88올림픽 운동장 부지로 구입했다. 그러나 이후 운동장을 건립하지 않으면서 자연상태를 그대로 간직한 습지가 탄생하게 됐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인해 3월 초부터 최근까지 방문이 불가능했지만 이제는 10명 이내 소규모로 편하게 다녀올 수 있다.
방이습지는 도심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맹꽁이 등이 서식할 만큼 습지생태계가 잘 보존돼 있다. 이를 인정 받아 2002년 4월에는 서울시로부터 생태경관보전지역으로 지정됐다. 현재 400m 규모의 관찰로, 조류관찰대, 논에서 서식하는 다양한 생물종을 탐구하고 체험할 수 있는 논습지 등이 조성돼 있다. 습지해설사인 박경현씨는 “서울에서 몇 안 되는 귀하고 귀한 습지”라고 말했다.
한국의 ‘랑도네길’을 꿈꾸며
송파둘레길은 일상 생활권역 어디에서나 쉽게 접근이 가능하다. 또한 자연형 호수인 석촌호수 등 주요 명소와 전통시장, 상점가들을 연결하는 동선이 자연스럽게 짜여있다.
특히 산책로 인근 공원들이 송파둘레길의 진가를 더하는 요소다. 성내천에서 올림픽공원으로 빠지면 한성백제 유적인 몽촌토성이 나온다. 성곽 밖에서 해자(垓子) 기능을 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물길과 토성 내부의 넓은 풀밭이 마치 스위스 전원 풍경처럼 펼쳐진다.
마천동에 소재한 천마공원에는 풍부한 산림 자원을 활용해 지난해 18만여㎡ 규모의 치유숲을 조성했다. 공원을 찾는 다양한 연령대를 고려해 유아, 건강, 참여, 실버, 산림치유숲 등 5가지 테마로 운영 중이다.
송파둘레길의 궁극적인 지향점은 프랑스에서 인기를 끌고 있는 ‘랑도네(randonnee)’ 길이다. 대표적인 생태계 서비스 성공 사례로 꼽히는 랑도네는 ‘긴 산책’이라는 뜻이다. 잘 정비된 길을 걸으며 휴식을 취하고 심신을 단련하는, 프랑스 국민들의 대표 휴식법이다.
프랑스 전역에는 18만㎞가 정비돼 있다. 자연 경관이 수려한 곳, 역사문화유적지 등이 연계돼 랑도네길을 활용한 박람회, 컨퍼런스, 축제 등 주요 이벤트와 행사를 진행한다.
송파구에는 롯데월드타워, 올림픽공원, 석촌호수라는 대표적인 명소가 있다. 인접 자치구인 강남구에 K-팝과 코엑스 등 연계가 가능한 문화ㆍ관광 자원이, 남쪽에는 남한산성처럼 역사와 전통이 깃든 문화재도 든든하게 포진하고 있다.
법정스님은 ‘강과 산에는 주인이 따로 없고 보고 느끼면서 즐길 줄 아는 사람이 주인이다’고 설파했다. 생태 환경이 빼어난 ‘송파 랑도네’가 갈수록 존재감이 커질 예언처럼 들렸다.
배성재 기자 passio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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