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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권의 트루스오디세이] 성소수자 혐오 조장한 기독교 언론, 예수 뜻을 되새겨라

입력
2020.05.14 04:30
2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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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희생양 제의, 마이너스 1의 평화 

 ※시대의 독설가, 피아 구분 없는 저격수를 자처하는 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가 ‘포스트 트루스’ 시대의 여러 현상들을 미디어 이론을 통해 조명해보는 글을 씁니다. 매주 목요일 ‘한국일보’에 연재합니다 

일본 지방지 미야코신문의 1923년 9월 19일자 삽화. 관동대지진 이후 일본에서 성행한 아이들의 자경단 놀이를 그렸다. 아이들이 군인 경찰 등 역할을 나눠 조선인 아이를 죽이는 놀이를 하자 그림 그린 이가 그런 놀이는 하지 말라고 말리는 내용이다. 독립운동기념관 제공
일본 지방지 미야코신문의 1923년 9월 19일자 삽화. 관동대지진 이후 일본에서 성행한 아이들의 자경단 놀이를 그렸다. 아이들이 군인 경찰 등 역할을 나눠 조선인 아이를 죽이는 놀이를 하자 그림 그린 이가 그런 놀이는 하지 말라고 말리는 내용이다. 독립운동기념관 제공

원시사회는 공동체의 위기를 희생양 제의로 극복하곤 했다. 이해할 수 없는 재앙의 ‘원인’ 대신에 ‘범인’을 찾고, 그를 처형함으로써 재앙의 원인을 제거했다고 믿어버린 것이다. 물론 그 제의로 재앙을 막을 수는 없었을 게다. 하지만 적어도 재해로 인한 스트레스가 공동체 안의 갈등이나 폭력으로 번지는 사태만은 막을 수 있었다. 마이너스 1의 평화. 희생양 제의는 원시사회가 ‘하나’를 제거함으로써 ‘모두’의 평화를 유지하는 장치였다.

 ◇파르마코스 

문명이 시작되어도 이 제의는 사라지지 않았다. 원시사회는 그나마 희생자를 신성시라도 했지만, 문명사회는 아예 그들을 범죄자로 여기게 된다. 희생자로 꼽힌 것은 주로 저항할 힘이 없는 약자들. 가령 고대 그리스에서는 기근이나 역병이 돌면 노예나 장애인 수감자 중 하나를 골라 추방 혹은 처형하곤 했다. 그 희생양을 ‘파르마코스’라 불렀다. 가장 유명한 파르마코스는 이솝이리라. 꼽추였던 그는 절벽에서 떠밀려 죽었다고 한다.

그 후로도 마찬가지였다. 중세의 파르마코스는 ‘여성’이었고, 나치 시절에는 ‘유태인’, 관동대지진 때는 ‘조센징’, 희생양 제의에는 대개 희생자에게 죄를 전가하는 이야기가 따르곤 한다. 그 이야기 속에서 중세의 여성은 마법으로 흉작을 불러온 마녀였고, 나치 시절의 유태인은 국가를 좀먹는 해충, 관동의 조선인은 일본인 집에 불을 지르는 방화자로 묘사된다. 물론 이 이야기에서 희생자의 목소리는 철저히 배제된다.

코로나19 사태에서는 아시아인이 파르마코스가 되었다. 감염은 폭발하지, 생업은 힘들지, 갇혀 지내자니 답답하지. 그 스트레스는 공동체 안의 폭력으로 이어질 수 있다. 실제로 서구에서는 최근 가정폭력이 증가했다고 한다. 그들의 평화를 위해 아시아인이 희생양이 된 것이다. 남 얘기가 아니다. 한국에서는 동성애자들이 파르마코스가 되어, 전 세계가 상찬하는 K방역을 망친 주범으로 몰려 끔찍한 언어폭력을 당하고 있다.

사태의 시작은 기독교 언론이었다. 이들은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성 정체성은 밝히지 않는다’는 기자협회의 보도준칙을 어기고, 처음부터 이 재앙의 원흉으로 게이 커뮤니티를 지목했다. 이는 방역당국의 지침에도 위배되는 행위다. 하지만 워낙 성스러운 분들이라 ‘혐오와 차별은 방역을 방해해 사회를 위험에 빠뜨린다’는 세속적 비판에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이번이 동성애자를 ‘척결’할 절호의 기회라고 본 모양이다.

신종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 확진자가 다녀간 서울 용산구 이태원의 한 클럽의 모습. 연합뉴스
신종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 확진자가 다녀간 서울 용산구 이태원의 한 클럽의 모습. 연합뉴스

 ◇성서와 해석학 

그러잖아도 몇몇 기독교 신문은 평소에도 동성애자들을 집요하게 공격해 왔다. 심지어 성소수자를 연쇄살인범과 동렬에 놓는 끔찍한 칼럼을 싣기도 했다. 왜 그럴까. 한국교회의 위기가 곧 세상의 위기라는 이상한 종말론 때문이다. ‘교회에 신도가 줄었다. 지금이 말세이기 때문이다. 그 징표가 바로 범람하는 동성애다. 고로 교회와 사회가 소돔과 고모라처럼 멸망하지 않으려면 동성애자들을 제거해야 한다.’ 전형적인 희생양 제의다.

종교적 근본주의자일수록 경전의 자구(字句) 해석에 집착한다. 사실 그들이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말씀이라 굳게 믿는 구약성서에는 고대 근동의 관념이 반영되어 있다. 가령 노아의 홍수 얘기는 길가메시 서사시에 거의 원형 그대로 등장한다. 동성애를 죄로 보는 레위기의 관념도 조로아스터교에서 유래한 것으로, 바빌론 유수 시절 유태교인들에게 받아들여진 것이다. 정작 예수는 동성애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근본주의자들은 고대의 관념을 그대로 현대에 옮겨놓으려 한다. 하지만 예수는 고대의 율법 중에서 시간이 흘러 이미 시효가 다한 것들은 적절히 수정할 줄 알았다. 예수는 이를 율법의 ‘폐기’가 아니라 ‘완성’이라 불렀다. 성경의 본질은 시대와 지역의 특수성을 뛰어넘어 여전히 온 인류에게 어떤 ‘보편적’ 메시지를 던진다는 데에 있다. 성경의 생명을 이루는 이 보편적 메시지를 정제하는 데에는 세심한 해석의 작업을 요한다.

사실 성경의 자구적 읽기를 강조하는 근본주의자들도 실제론 성경을 제 편할 대로 ‘해석’해 왔다. 예를 들어 그들은 소돔과 고모라가 동성애 때문에 망했다고 말한다. 성서는 분명히 말한다. 소돔과 고모라는 의인 10명이 없어서 망했다. 소돔이 동성애 때문에 망했다는 얘기는 실은 꾸란(수라 6)에 나온다. 거기에도 처벌규정은 없다. 한국교회가 망한다면, 그건 동성애자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 안에 의인 10명이 없어서일 게다.

2018년 크로아티아 이모트스키에서 열린 종려주일(예수 부활 축일의 바로 전 주일) 행사. 예수가 십자가를 지고 피 흘리는 고난의 길을 재현하고 있다. 이모트스키=로이터 연합뉴스
2018년 크로아티아 이모트스키에서 열린 종려주일(예수 부활 축일의 바로 전 주일) 행사. 예수가 십자가를 지고 피 흘리는 고난의 길을 재현하고 있다. 이모트스키=로이터 연합뉴스

 

 ◇기독교와 희생양제의 

인류학자 프레이저는 종교를 희생양 제의의 연장으로 간주했다. 실제로 아브라함이 아들 대신 양을 바쳤다는 창세기 기사에는 인신공희의 흔적이 엿보인다. 요즘 기독교 일각에서 벌이는 반(反)동성애 캠페인을 보면, 프레이저의 말이 맞는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르네 지라르에 따르면 이는 기독교의 본질을 완전히 오해한 것이다. 기독교는 외려 공동체를 유지하는 데에 폭력을 사용해온 문화에 종지부를 찍었다는 것이다.

지라르에 따르면 구약성서에는 여전히 가해자의 시선이 담겨 있다. 레위기에는 오늘날 여성혐오, 장애인차별, 동물학대로 비난 받을 구절들로 가득하다. 하지만 이미 구약에서 전환은 시작된다. 율법에 희생자의 목소리가 반영되기 시작한 것이다. 호세아 선지자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호 6:6) 종교의 본질은 번제가 아니라 자비에 있다는 얘기다.

이 전환을 완수한 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다. 레위기에는 “대를 끊으라”거나 “회중이 돌로 치라”는 등 잔혹한 명령이 등장한다. 심지어 월경 중에 성관계를 하는 것도 당시에는 대를 끊어놓을 이유가 됐다. 불륜 역시 당시엔 죽음으로 다스렸는데, 신약성서에는 이와 관련한 장면이 등장한다. 간음한 여인을 회중이 돌로 치려 한 것이다. 그때 예수가 그들에게 말한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이 여인을 돌로 치라.”(요 8:7)

예수는 이 한 마디로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해 폭력에 의존하던 관습을 폐지했다. 실제로 그는 세리나 죄인 등 파르마코스가 되기 쉬운 이들과 어울렸다. 하지만 희생양 제의를 폐지하는 결정적 방법은 역시 희생자의 무결함을 증명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십자가에 달렸다. 군중은 예수에게 온갖 죄를 뒤집어씌웠으나, 우리는 그에게 죄가 없음을 안다. 스스로 마지막 희생양이 됨으로써 예수는 이 야만적 제의에 종지부를 찍은 것이다.

2019년 5월 27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반동성애기독시민연대 회원 등이 기자회견을 연 뒤 주한미대사관 앞에서 무지개 현수막 철거를 촉구하고 있다. 미 대사관은 성 소수자 인권을 지지한다는 의미에서 무지개 현수막을 건물 밖에 내걸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2019년 5월 27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반동성애기독시민연대 회원 등이 기자회견을 연 뒤 주한미대사관 앞에서 무지개 현수막 철거를 촉구하고 있다. 미 대사관은 성 소수자 인권을 지지한다는 의미에서 무지개 현수막을 건물 밖에 내걸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거짓증언 하지 말라 

안타깝게도 예수가 폐지한 그 짓을 일부 기독교인들이 동성애자를 상대로 하고 있다. 심지어 그들은 ‘동성애가 수간(獸姦)과 소아성애로 이어진다’는 근거 없는 거짓말로 청소년들의 영혼을 오염시키고 있다. 그들은 ‘에이즈의 확산을 막으려면 동성애를 없애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에이즈는 동성애와 양성애를 구별하지 않으며, 감염자의 대다수는 이성애자다. 미국의 질본(CDC)은 에이즈 예방의 방법으로 콘돔의 사용을 권한다.

이번 코로나 사태로 한국교회 일각의 문제가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기도로 코로나를 이긴다’며 자제요청을 무시하고 집회를 강행하더니, 이번엔 광신에 빠진 일부 기독교 매체가 방역지침을 어기고 이태원 잔혹사를 연출했다. 오늘날 대부분의 과학자는 동성애를 신의 창조질서에서 속한 것으로 본다. 선교사들은 이 땅에 먼저 병원과 학교부터 세웠으나, 그 후예들은 구약으로 과학을 대신하고, 기도로 병원을 대신하려 한다.

진화론이 등장했다고 해서 기독교가 무너지지는 않았다. 그것은 교회가 세심한 해석을 통해 사회의 변화 속에서도 변하지 않는 말씀의 본질을 보존해 왔기 때문이다. 해석학적 무능은 성서에서 미신과 편견만 읽어냄으로써 기독교를 시대에 뒤진 종교로 만들 뿐이다. 다른 것은 몰라도 타인을 ‘죄인’이라 부르는 것은 외국에선 처벌받는 범죄이며, 무엇보다 성서에 위배된다. 예수는 타인을 함부로 정죄하지 말라고 가르쳤다. 그의 말이다.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라면 무죄한 자를 죄로 정치 아니하였으리라.”(마 12:7)

 진중권 미학자, 전 동양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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