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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숨 ‘떠도는 땅’ … 시베리아 하늘 아래 생을 이어간 고려인들의 돌림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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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숨 ‘떠도는 땅’ … 시베리아 하늘 아래 생을 이어간 고려인들의 돌림노래

입력
2020.05.07 14:00
수정
2020.05.07 18:22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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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의 중앙아시아 강제 이주는 고려인 등 소수민족이 대상이었다. 사진은 1937년 고려인 강제 이주 이후 7년 뒤인 1944년에 강제이주 대상이 된 체첸인들을 실어나르고 있는 기차. 위키피디아 제공
소련의 중앙아시아 강제 이주는 고려인 등 소수민족이 대상이었다. 사진은 1937년 고려인 강제 이주 이후 7년 뒤인 1944년에 강제이주 대상이 된 체첸인들을 실어나르고 있는 기차. 위키피디아 제공

“날짐승의 날아감도 끊어진 시베리아 하늘 아래, 50량이 넘는 열차가 내달리는 길은 끝을 모르고 이어진다.”

1937년 8월, 소련은 수만 명의 고려인을 연해주 일대에서 중앙 아시아 지역으로 이주시키는 ‘고려인 강제 이주 계획’을 세운다. 연해주 일대 일본의 간첩활동을 막는다는 명목이었다. 9월 국경 지대에 거주하던 고려인들이 시베리아 횡단 열차에 먼저 올랐고, 이후 두 달여간 나머지 지역에 거주하던 17만 2,000여명의 고려인이 중앙 아시아 지역으로 떠났다. 이 과정에서 열악한 열차 내 상황으로 수많은 이들이 사망했고, 이후 이주 제한이 풀릴 때까지 척박한 땅을 개척하며 살아 남아야 했다.

김숨의 신작 ‘떠도는 땅’은 바로 이 강제 이주 열차에 탑승한 고려인들의 한 달 여간 여정을 그린 소설이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다룬 장편 ‘흐르는 편지’ 이후 2년 만에 내놓는 장편으로, 구상과 집필에만 꼬박 4년, 다시 개고하는 데만 2년 6개월을 쏟아부었다.

조그만 창문마저 양철 조각을 대고 못을 박아 겨우 한 줌 빛만 새어들 뿐인 열차 안, 사람들의 생사는 육안보다 소리로 확인된다. 성냥 긋는 소리, 게딱지 같은 빵 껍질 뜯어 먹는 소리, 맥없이 앓는 소리, 그리고 마침내 석탄더미 같은 어둠 저편에서 “엄마, 우린 들개가 되는 건가요?”라는 열병을 앓는 듯한 소년의 목소리가 들려오며 소설은 시작된다.

김숨 작가. ⓒ김흥구
김숨 작가. ⓒ김흥구

소리에 이어 들이닥치는 것은 냄새다. 이들을 실어가는 건 가축 운반용 열차. 제대로 된 위생시설이 있을 리 만무하다. 건초더미가 땅에서 올라오는 냉기 정도나 겨우 막아주는 열차 안은 오줌 지린내, 구릿한 살 냄새, 담뱃잎 타는 냄새, 염장 청어 냄새가 가득하다. 열차 안 한숨과 잿가루까지 모조리 포착해내는 작가의 섬세한 묘사 덕에 독자는 시베리아를 횡단해 가는 열차에 함께 몸을 싣게 된다.

3.5평 남짓한 열차 한 칸에 탑승한 27명의 고려인들이 가진 사연은 저마다 다르다. 남편 없이 시어머니와 단 둘이 열차에 태워진 만삭의 임신부 금실, 갓난아기를 데리고 탄 요셉과 따냐 부부, 죽음 문턱에 다다른 황 노인, 유일하게 열차가 어디로 향하는지 알고 있는 남자 인설, 들숙과 그의 아들 아나똘리 등. 이들은 열악한 열차 안에서도 음식과 이불을 나누고, 머리를 땋아주고, 죽은 아이를 위해 염을 해주며 서로를 보듬는다. 작가는 성별도 나이도 태생도 연해주에 정착한 목적도 다른 이들 개개인의 역사를 각기 별도의 장을 할애해 들려준다. 그 덕에 이 작은 열차 안엔 고려인 150년 역사가 가득하다.

특히 흥미로운 건 역사를 복원시키는 작가의 방식. 직접적 설명이나 묘사 같은 작가 개입은 최소화하고, 인물들이 자신의 목소리로 자신의 역사를 직접 서술하도록 만든다. 그러다 보니 인물의 목소리가 끝없이 쏟아지는데, 이는 제한된 공간을 배우의 발화로만 채우는 연극의 방백처럼 읽히기도 한다. 다만, 대사 앞에 배우 이름이 있는 희곡과 달리 캄캄한 열차에서 오직 목소리로만 들리는 이 소설에서는 발화자가 불분명하다. 그 때문에 한데 뒤엉킨 목소리들은 마치 놀림노래처럼 이어진다.

떠도는 땅

김숨 지음

은행나무 발행ㆍ280쪽ㆍ1만3,500원

그 중에서도 유독 뚜렷하게 살아남는 목소리는 “엄마 난 어디서 왔어요?”라고 묻는 소년 미치카의 것이다. 떠나온 곳, 속한 곳을 끊임없이 묻는 미치카의 질문은 열차 안 모든 고려인들의 공통된 의문이기도 하다. 낯선 조선인을 만나면 가장 먼저 조선의 고향부터 묻는 금실의 시어머니, 다섯 살에 연해주로 이주해 그곳에서 생의 모든 희로애락을 누린 금실, 아이를 낳으면 꼭 러시아인으로 키우라고 당부하는 금실의 남편, 중앙 아시아 갈대밭에서 태어난 금실의 아이. 같은 고려인, 같은 가족이라 해도 이들이 자신의 고향으로 삼는 곳은 저마다 다르다.

때문에 소설은 결국 조선인도 러시아인도, 볼셰비키도 레닌주의자도, 노동자도 지주도, 일본 간첩도 독립투사도 아닌 그저 인간 존재의 존엄을 복원하는 작업이다. 소설은 열차가 멈춰선 땅에서 새로운 생명과 죽음이 교차되며 끝난다. 살아만 있다면, 뿌리내릴 땅만 있다면 생은 끈질기게 이어진다는 것을, 그 자명함에 인간의 희망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듯.

한소범 기자 beom@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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