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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라맛빠기! 인도네시아] 사과도 조사도 않는 100만명 대학살… “과거사 정리 한국서 배워야”

입력
2020.04.09 04:30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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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1965년 대학살 이후

 ※ 인사할 때마다 상대를 축복(슬라맛)하는 나라 인도네시아. 2019년 3월 국내 일간지로는 처음 자카르타에 상주 특파원을 파견한 <한국일보>는 격주 목요일마다 다채로운 민족 종교 문화가 어우러진 인도네시아의 ‘비네카 퉁갈 이카(Bhinneka Tunggal Ikaㆍ다양성 속에서 하나됨을 추구)’를 선사합니다. 

브조 운퉁 1965대학살연구소장이 수하르토 군부독재 당시 금지곡을 연주하고 있다. 탕에랑=고찬유 특파원
브조 운퉁 1965대학살연구소장이 수하르토 군부독재 당시 금지곡을 연주하고 있다. 탕에랑=고찬유 특파원

1965~66년은 인도네시아 현대사의 암흑기다. 1965년 9월 공산당의 쿠데타를 진압하며 권력을 잡은 수하르토 주축의 군부는 1년 넘게 100만명 이상을 학살했다. 군이 조직한 민병대와 자경단이 동원됐다. 죽창으로 찔러 죽이고, 강간한 뒤 죽이고, 칼로 머리를 베었다. 얼마 전까지 이웃이던 지식인과 소작농, 노동조합원, 화교 등이 가족 앞에서 희생됐다. 실종되거나 투옥된 인원도 150만명이다. 군부에 반대하면 무조건 공산주의자로 몰았기에 ‘반공 대학살’이라 불린다. 미국 중앙정보국(CIA)은 ‘20세기에 벌어진 가장 처참한 집단학살’이라고 보고했다.

반세기가 훌쩍 넘었지만 정부 차원의 진상 규명이나 공식 사과는 이뤄지지 않고 있다. 생존자들만 고군분투하고 있다. 브조 운퉁(72) 1965대학살연구소(YPKP1965) 소장이 대표적이다. 그는 올해 광주인권상 수상자로 선정됐다. 자카르타 서쪽 도시 탕에랑(탕거랑)의 구비구비 골목 안 세월의 더께가 앉은 그의 자택 겸 연구소를 지난달 24일 찾았다.

그는 “수감자 중 가장 어렸는데 이렇게 늙어버렸다”면서 “인도네시아 정부가 한국을 보고 배우길 바란다”고 했다. 그리고 역설했다. “나는 잘못이 없다. 그래서 포기하지 않는다, 진상이 낱낱이 밝혀지고 사과를 받을 때까지”. 3시간 넘게 마스크를 끼고 진행된 인터뷰 내용을 1인칭 시점으로 정리했다.

1965년 인도네시아 대학살 당시 참상을 기록하고 진상 규명 및 인도네시아 정부의 공식 사과를 촉구하는 1965대학살연구소 홈페이지. 홈페이지 캡처
1965년 인도네시아 대학살 당시 참상을 기록하고 진상 규명 및 인도네시아 정부의 공식 사과를 촉구하는 1965대학살연구소 홈페이지. 홈페이지 캡처

내 나이 17세, 교사양성학교 마지막 학기에 갑자기 마을 사람들이 끌려가거나 사라졌다. 집들이 불타고 잘린 머리들이 마을 어귀에 내걸렸다. 삼촌이 두들겨 맞고 아버지를 비롯한 교사들은 모두 감옥에 갇혔다. 숲에서 숨어 지냈다. 학교 애들은 나와 엄마를 죽이겠다고 협박하며 따돌렸고, 자퇴하는 나를 정류장까지 쫓아와 집단 폭행했다. 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다. 수카르노(초대 대통령)를 지지한다는 게 이유였다. 프치(동남아 무슬림 남성용 모자)를 깊게 눌러쓰고 중부자바 시골에서 400㎞ 떨어진 자카르타로 달아났다.

신문도 팔고 차(茶)도 팔면서 하루하루 버텼다. 공원에서 잤다. 1970년 어느 날 판매사원으로 일하던 백화점에서 사복을 입은 보안사 군인들에게 잡혔다. 고문을 이기지 못한 친구가 내 이름을 발설해 수배된 상태였다. 정비소처럼 보이는 안가로 끌려갔다. 200명 정도 구금돼 있었다. 다들 잡혀온 이유를 몰랐다. 피가 날 때까지 맞았고 알몸으로 전기고문을 당했다. 군인들은 담뱃불로 내 몸을 지졌다. 비명소리에 잠을 잘 수 없었다. 8㎡ 좁은 공간에서 12명씩 쪼그려 자느라 나중엔 걸을 수도 없었다. 썩은 쌀로 지은 밥 여섯 숟가락이 한끼였다. 햇빛은 하루에 15분만 볼 수 있었다. 3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1년 뒤 자카르타 살렘바형무소로, 다시 1년 후 2,000명이 구금된 탕에랑 수용소로 옮겨졌다. 탕에랑에서 농사, 벽돌 생산 등 오전 5시부터 밤늦게까지 강제노역을 7년간 했다. 돈도 음식도 주지 않아 곡괭이로 땅을 파다 쥐구멍을 발견하면 분홍색 새끼 쥐를 바로 입에 집어넣었다. 도마뱀이나 뱀 등도 닥치는 대로 잡아먹었다. 여물을 모아 몰래 팔아 소금과 설탕을 구했다. 피붙이가 가난한데다 알려지면 힘들어질까 봐 가족이 있다고 밝히지 않아 도움도 받지 못했다. 농사도 짓고 소도 키웠는데 수용소에서 숨진 사람 대부분은 굶어 죽었다.

국제사면위원회ㆍ국제적십자 등 국제사회의 압박 덕분에 1979년 10월에 풀려났다. 나이가 어려서 가장 마지막으로 나왔다. 아버지는 여전히 감옥에 있었고 집이 가난해 교회의 도움으로 3년간 고아원 원장을 맡았다. 신분증에 정치범(ET)이라고 적혀서 변변한 직업을 구할 수도, 이주할 수도, 사람들에게 말을 할 수도 없었다. 늘 감시 당했다. 음악을 좋아해서 종이에 건반을 그려 독학으로 피아노를 배웠다. 그 실력으로 외국인들을 가르쳤다. 강습 1시간 전에 가르칠 대목을 맹연습했다. 영어도 가르쳤다. 오전 4시부터 오후 9시까지 일해서 피아노도 사고 집도 샀다.

인도네시아 중부자바주의 한 주민이 1965년 대학살 당시 양민을 학살하고 묻은 장소를 가리키고 있다. 1965대학살연구소 제공
인도네시아 중부자바주의 한 주민이 1965년 대학살 당시 양민을 학살하고 묻은 장소를 가리키고 있다. 1965대학살연구소 제공

수하르토가 물러난 다음해인 1999년 프라무디야 아난타 투르(1925~2006년) 등 정치범 7명이 모여 연구소를 만들었다(프라무디야는 인도네시아 현대문학의 거장으로 노벨문학상 후보로 추천됐다). 외환위기로 일이 끊긴 상황이라 연구소 일에 매진했다. 어려운 처지의 생존자들이 십시일반 후원하는 게 전부라 교사인 아내가 고생을 많이 했다. 아내 역시 7세였던 대학살 당시 아버지가 실종됐다. 목이 잘려 숨진 것으로 짐작한다(아내 엔당씨는 아버지 얘기가 나오자 눈물을 흘리며 자리를 피했다).

우리가 당한 일, 우리는 잘못한 게 없다는 사실을 프랑스 네덜란드 스위스 등 전 세계에 알렸다. 생존자들의 증언을 기록하고 정부에 항의했다. 2012년 중부자바의 한 지역에서 21명이 묻힌 장소를 발견했다. 50명, 100명, 200명, 400명이 묻힌 곳도 찾아냈다. 우리가 발견한 매장지만 인도네시아 전역에 무려 365곳이다. 생존자는 2만명으로 추산된다. 그런데도 인도네시아 정부는 오늘까지도 시인도, 사과도 하지 않는다. 증인이 있고 증거가 있고 세상이 다 아는데 말이다.

한국에 세 번(서울 제주 광주) 가서 증언했다. 나는 민주화를 이룬 한국이, 광주가 자랑스럽다. 문재인 대통령을 존경한다. 그가 학살 현장을 찾아가 희생자들에게 머리 숙여 사과하는 모습이 부럽다. 끌려갈 당시 가장 어렸던 나는 이렇게 늙었고, 선배들은 숨졌다. 우리나라 정부도, 대통령도 배우길 바란다. 그날은 언제 올 것인가?

브조 운퉁 1965대학살연구소장이 수하르토 군부 독재 당시 수감됐던 교도소를 가리키고 있다. 탕에랑=고찬유 특파원
브조 운퉁 1965대학살연구소장이 수하르토 군부 독재 당시 수감됐던 교도소를 가리키고 있다. 탕에랑=고찬유 특파원

브조 소장은 인터뷰 뒤 “수하르토 정권에선 금지됐던 곡”이라며 피아노 연주를 했다. 이어 집에서 10분 거리인 수용소와 강제노역 현장으로 안내했다. 대형 쇼핑몰과 학교가 들어선 자리를 지나며 그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역사적인 장소는 사라지고 사람들은 기억하지 못하네요. 그래도 이렇게 함께 현장을 둘러봐줘서 감사합니다.” 그의 작별인사가 뒷목을 당겼다.

탕에랑(탕거랑)=고찬유 특파원 jutda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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