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프레임 전쟁
※시대의 독설가, 피아 구분 없는 저격수를 자처하는 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가 ‘포스트 트루스’ 시대의 여러 현상들을 미디어 이론을 통해 조명해보는 글을 씁니다. 매주 목요일 ‘한국일보’에 연재합니다.
“금태섭 의원의 공천탈락을 계기로 중도층의 마음이 떠날 것이라는 분석은 안 해 봤나?” 한겨레신문 성한용 기자의 질문이다. 이 물음에 민주당의 후보경선을 관리하는 담당자는 이렇게 대꾸했단다. “중도층은 미신이다. 쟁점마다 다른 투표를 하는 (스윙보터)층이 있을 뿐이다. 중도층은 존재하지 않는다. 조지 레이코프의 프레임 이론에 따르면 그렇다. 영향이 별로 없을 것으로 본다.”
요즘 민주당에서 핵심 지지층에만 기대어 마구 폭주하는 근거가 레이코프의 ‘프레임 이론’이었던 모양이다.
◇프레임을 선점하라
정말 중도층은 없을까. 사실을 말하자면 레이코프는 중도층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 적이 없다. 그 역시 미국에는 35~40%의 보수층, 35~40%의 진보층, 그리고 20~30%의 중도층이 있다고 말한다. 그의 얘기는 보수적 관념과 진보적 관념만 있을 뿐, 그 중간 어딘가에 어정쩡한 ‘중도주의라는 이념’은 없다는 것이다. 레이코프에 따르면 이른바 ‘중도층’은 특정 사안에서는 진보적 정책, 다른 사안에서는 보수적 정책을 지지하는 ‘이중관념’(biconceptualism)을 가진 사람들이라고 한다.
결국 선거의 승부는 이 이중관념을 가진 층을 누가 사로잡느냐에 달려 있다. 이 대목에서 레이코프는 중도층의 표를 얻겠다고 이념과 정책의 방향을 어설프게 중간으로 옮겨서는 안 된다고 조언한다. 그럴 경우 자신의 메시지가 희석되어 거꾸로 지지를 잃기 십상이라는 것이다. 고로 진보라면 진보로서 제 가치관을 뚜렷이 드러내는 가운데 자신과 몇몇 가치를 공유하는 스윙보터들의 지지를 끌어내려고 해야 한다. 하지만 어떻게? 레이코프에 따르면 비결은 ‘프레임을 선점’하는 데에 있다.
가령 보수주의자들은 ‘감세(relief of taxes)’라는 말을 즐겨 사용한다. 그로써 그들은 프레임을 선점하게 된다. 왜? 영어로 감면(relief)이라는 말에는 ‘뭔가 안 좋은 것을 덜어낸다’는 뉘앙스가 깔려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 말을 쓰는 이는 저도 모르는 사이에 ‘세금은 나쁜 것’이라는 부당전제를 받아들이게 된다. 그 프레임에 끌려들어가면 당연히 승산이 없다. 실제로 진보세력들이 그 덫에 빠져 ‘제3의 길’이나 ‘신중도’를 표방하며 보수와 감세경쟁을 하다가 전통적 지지층만 잃고 말았다.
◇프레임을 왜곡하라
‘중도는 없다’는 말은, 한 마디로 ‘진보로서 자신의 도덕적 정체성을 뚜렷이 하라’는 뜻이다. 그런데 이를 민주당에서는 ‘중도층을 무시하라’는 뜻으로 해석한 모양이다.
그럴 만도 하다. 최근 우리 사회에서는 과도한 진영정치로 스윙보트 층이 실제로 매우 엷어졌다. 조국사태 때 시민사회는 심판을 보는 대신 아예 선수로 운동장에 뛰어들어 방어전을 치렀다. 이 반칙에 휘슬을 분 이들은 극소수. 그들에게는 ‘무시해도 좋을 양’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중도층이 졸지에 “미신”이 되어 버린 것이다.
설사 중도층이 있더라도 그 표가 향할 곳이 없는 한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 구심점을 잃은 표는 어차피 허공으로 흩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중도가 정치적 무게를 잃었으니, 민주당으로서는 굳이 그들의 마음에 들려고 애써 도덕성을 갖출 이유도, 섬세한 언어전략을 마련할 필요도 없다. 보수는 여전히 지지부진하지 않은가. 그러니 ‘촛불혁명’이라는 빛 바랜 프레임으로 고정 지지층만 묶어놓아도 충분히 이길 수 있다. 바로 이 자신감에서 “중도층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듯이 행동하는 것이다.
원래 진보에게 도덕성은 ‘생명’과 같은 것이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과 노회찬 전 의원은 거기에 흠집이 났을 때 자신의 생명을 내놓아야 했다. 하지만 현재의 민주당은 도덕성을 그저 승리에 방해가 되는 ‘걸림돌’ 정도로 여기는 듯하다. 그 뿐인가. 원래 차별 받는 소수의 편에 서는 것은 진보주의자의 ‘의무’에 속한다. 하지만 민주당은 통진당의 후신인 민중당과 트랜스젠더 후보를 낸 녹색당을 비례연합정당 논의에서 배제했다. “이념문제나 성 소수자 문제로 소모적 논쟁을 일으킬 정당과의 연합에는 어려움이 있다.”
진보의 가치를 실현하는 데에는 당연히 “어려움”이 따른다. 바로 그 “어려움”을 극복하라고 레이코프는 섬세한 언어선택에 기초한 프레임 전략을 조언한 것이다. 그런데 그의 말을 민주당에서는 엉뚱하게 이해한다. 진보의 가치를 실현하는 싸움을 이제 그들은 “소모적 논쟁”이라 부른다. 관철할 진보적 가치를 내다버렸으니 섬세한 언어전략 따위가 어디에 필요하겠는가. 그래서 레이코프의 이론을 가져다 기껏 ‘촛불세력 대 토착왜구’라는 프레임을 만들어 사회를 갈라 치는 데에 써먹는 것이리라.
◇대안적 사실을 창조하라
언제부터인가 민주당은 그릇된 가치를 관철시키는 데에 프레임 전략을 악용해 왔다. 조국 청문회를 보자. 원래 인사청문회는 원래 후보자의 도덕성을 검증하는 제도다. 하지만 민주당에서는 처음부터 사안을 ‘합법-불법’의 문제로 프레이밍해 들어갔다.
이 전략은 빗나갔고 조국은 낙마했다. 결과는 참혹했다. 그릇된 프레이밍은 민주당에 ‘법의 한계가 곧 도덕의 한계’라는 야쿠자윤리를 남겼고, 그 지지자들 또한 당을 따라 ‘불법만 아니면 모든 게 허용된다’는 왜곡된 도덕을 내면화하게 됐다.
요즘에는 검찰 음모론을 퍼뜨리느라 분주한 모양이다. 이를 주입하는 데에는 사극의 프레임이 동원된다. 세상에, 조국이 조광조이고, 윤석열이 윤임이란다. 5공 프레임도 애용된다. 그에 따라 청와대의 감찰무마와 선거개입에 대한 수사는 “검찰쿠데타”로 명명됐다. 반란을 일으킨 14명 검사의 리스트가 공개되었고, 그들에게는 “검찰하나회”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인간은 개별적 사실을 프레임 속에서 인지하기 마련이다. 머릿속에 그릇된 프레임이 심어질 때 대중의 세계인식은 심각하게 왜곡될 수밖에 없다.
민주당의 프레이밍 전략은 실은 트럼프의 것이다. ‘러시아스캔들’로 위기에 처하자 트럼프는 “스파이게이트”라는 말로 프레임 전환을 시도했다. 오바마 행정부에서 자기 대선캠프에 첩자를 심어놨다는 것이다.
물론 근거는 없다. 하지만 언론에서 “스파이게이트”라 받아 적는 순간 사람들은 그의 프레임에 갇히게 된다. 허위도 진실게임 속으로 들어가면 ‘절반의 사실’로 인정받는 법. 그 절반의 사실을 끝없이 반복해 듣다 보면 어느새 사실로 들리게 된다. 이른바 ‘대안적 사실’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쿠데타’라는 프레임
“검찰쿠데타”라는 프레임도 마찬가지다. 이는 원래 ‘검찰이 대통령의 인사권에 개입하려고 조국일가를 내사했다’는 유시민씨의 주장에서 출발했다. 아무 근거도 없는 이 “추측”이 진실게임 속에 들어가 절반의 사실이 되더니 끝없는 반복을 통해 결국 사실로 굳어졌다. 법원에서 허위라고 확인해 주었지만, 지지자들은 머릿속의 ‘대안적 사실’을 절대 포기하지 않을 게다. 프레임은 ‘사실’로 깨뜨릴 수 있는 게 아니다. 아니나 다를까. 법원에서 그렇게 말했다면, 그것은 “판사가 미친 것”이란다.
이 미친 프레임으로 물론 중도층의 마음을 살 수는 없다. 하지만 가끔은 이 갈라치기 전략이 효과를 발휘할 때가 있다. 실제로 트럼프는 노골적인 반(反) 외국인 선동으로 백인하층계급의 지지를 결집시킴으로써 대선에서 승리하지 않았던가. 민주당은 지금이 그런 때라고 보는 게다. 그래서 도덕과 가치와 원칙을 버리고 왜곡된 프레임으로 골수 지지층을 결집시키는 데에 전념하는 것이리라. 자유주의 정당이 우익 포퓰리스트의 선동에 의존한다는 것은 그새 당의 성격에 중대한 변화가 생겼음을 시사하는 불길한 징후다.
레이코프는 프레임 왜곡에 ‘올바른 프레임’으로 맞서라고 주문한다. 문제는 그 ‘올바른 프레임’을 설정할 주체가 누구냐는 것. 미국에서 그 주체는 민주당일 터이나, 한국에서는 민주당이 트럼프 짓을 하고 있다. 그리고 ‘올바른 프레임’을 지지해 줄 중도층은 난무하는 진영정치 속에서 날로 설 자리를 잃어간다. 이 경향은 앞으로 더 심해질 것이다. 폐해는 벌써 나타나고 있다. 한국의 정치는 어느새 승리를 위해서라면 모든 짓이 허용되는 거대한 난장판으로 변했다. 사회의 나머지 부분도 곧 그 뒤를 따를 것이다.
진중권 미학자, 전 동양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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