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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고국서 행복하길”… 외국 떠돌다 돌아온 조선왕 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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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고국서 행복하길”… 외국 떠돌다 돌아온 조선왕 도장

입력
2020.02.19 19:37
수정
2020.02.19 2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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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교포 이대수씨 기증으로 대군주보ㆍ효종어보 환수… 고종 국새 6과 중 첫 귀환

조선의 자주국가 의지를 드러내기 위해 1882년 제작된 국새 '대군주보'(오른쪽)와 효종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1740년 제작된 '효종어보'가 19일 서울 종로구 국립고궁박물관 강당에 전시돼 있다. 이한호 기자
조선의 자주국가 의지를 드러내기 위해 1882년 제작된 국새 '대군주보'(오른쪽)와 효종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1740년 제작된 '효종어보'가 19일 서울 종로구 국립고궁박물관 강당에 전시돼 있다. 이한호 기자

“기다렸던 귀한 유물 두 분이 우리 곁으로 돌아오셨다.”(정재숙 문화재청장)

“이제 유물이 고국에서 행복하게 지냈으면 좋겠다.”(기증자 이대수씨 아들 성주씨)

조선과 조선 임금의 ‘위권’(威權)을 상징하는 도장 2과(顆)가 고국으로 돌아왔다. 특히 고종 때 만들어진 국새(國璽) 6과 중 국내에 귀환한 건, 이번에 환수된 ‘대군주보’(大君主寶)가 처음이다.

문화재청은 외국으로 유출됐던 대한제국 국새 대군주보와 조선 어보 ‘효종어보’(孝宗御寶)를 재미교포 이대수씨로부터 기증 받아 19일 서울 국립고궁박물관에서 공개했다. 국새는 외교ㆍ행정문서 같은 공문서에 사용된 실무용 도장이다.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된 어보(御寶)는 왕과 왕비의 덕을 기리거나 사후 업적을 찬양하기 위해 만든 의례용 도장을 뜻한다.

높이 7.9㎝, 길이 12.7㎝, 무게 4.1㎏ 크기인 대군주보는 은으로 주조된 몸체에 아말감 기법으로 수은이 도금됐고, 손잡이는 거북 모양이다. 서체는 구첩전(九疊篆ㆍ글자 획을 여러 번 구부려 쓴 전서체)이다. 거북 꼬리 아래에 외국인 소장자 이름으로 짐작되는 ‘W. B. Tom’이라는 알파벳이 새겨져 있다.

국새 '대군주보' 하단에 미국인 이름으로 추정되는 'W. B. Tom'이 새겨져 있다. 이한호 기자
국새 '대군주보' 하단에 미국인 이름으로 추정되는 'W. B. Tom'이 새겨져 있다. 이한호 기자

제작 시기는 1882년으로 추정됐다. ‘고종실록’과 ‘승정원일기’, ‘일성록’ 등이 근거다. 고종실록 1882년 5월 23일자에 “교린(交隣)할 때 국서(國書)에 찍을 대군주보와 대조선국대군주보(大朝鮮國大君主寶) 국새를 조성하라고 명했다”는 기록이 있다. 대군주보 사용 시기는 1882년부터 대한제국을 선포한 1897년까지다. 1883년 대외 통상조약 업무를 담당하는 전권대신의 임명을 위한 문서와 1894년 갑오개혁 이후 대군주 명의로 반포된 법률ㆍ칙령 등에 사용한 예가 확인됐다.

조선시대 인장 전문가인 서준 국립고궁박물관 학예연구사는 이날 반환 행사에서 “조선은 본래 명과 청이 준 ‘조선국왕지인’(朝鮮國王之印) 국새를 써 왔지만, 고종이 대군주보 국새 제작을 지시했다”며 “‘인’(印)자를 대체한 ‘보’(寶)자는 천자만이 쓸 수 있다고 알려진 글자였다”고 설명했다.

그는 “대군주보 제작에는 개화기 정세 변화에 맞춰 중국과의 사대적 외교 관계를 청산하고 독립된 주권국가로 나아가려는 생각이 반영됐을 것”이라며 "고종은 일본과 강화도 조약을 맺은 1876년부터 대한제국 전까지 외교용 국새 6과를 만들었는데, 행방이 묘연했던 이들 중 유일하게 발견된 사례라는 점에서 대군주보의 가치가 크다”고 평가했다.

효종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1740년 제작된 '효종어보'가 19일 서울 종로구 국립고궁박물관 강당에 전시돼 있다. 이한호 기자
효종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1740년 제작된 '효종어보'가 19일 서울 종로구 국립고궁박물관 강당에 전시돼 있다. 이한호 기자

대군주보와 함께 돌아온 효종어보는 높이 8.4㎝, 길이 12.6㎝, 무게 4.0㎏ 크기다. 대군주보와 마찬가지로 손잡이가 거북 모양이고, 재질은 동이지만 금빛을 띤다. 영조가 1740년 제17대 임금 효종(재위 1649~1659)에게 ‘명의정덕’(明義正德)이라는 존호를 올릴 때 만들었다. 서체는 대군주보와 마찬가지로 구첩전이고, ‘선문장무 신성현인 명의정덕 대왕지보’(宣文章武 神聖顯仁 明義正德 大王之寶)라는 16글자를 새겼다. 거북 머리 정수리에 임금 ‘왕’(王)자가 있다는 게 특징인데, 영조 때 제작된 어보의 전형적 양식이라는 설명이다.

효종어보는 사후 1659년과 1740년, 1900년에 각각 제작됐다. 그 중 1659년 어보는 사라졌고, 1900년 어보는 국립고궁박물관에 있다. 1645년에 만든 ‘왕세자인’(王世子印) 어보도 분실됐다. 서 연구사는 “1739년 제작한 중종비 단경왕후 금보와 비교하면 제작 기법과 글자 새김이 매우 유사하다”며 “18세기 중반 왕실 문화 정수를 보여주는 유물”이라고 강조했다.

이번 환수는 강제 압수인 통상 방식과 달리 기증 방식으로 이뤄졌다. 1990년대 후반에 경매를 통해 대군주보와 효종어보를 매입해 보관하고 있던 이대수씨가 외국에 떠도는 국새와 어보가 대한민국 정부 재산이자 도난 문화재라는 사실을 인지한 뒤 지난해 12월 한국에 무상 기증했다. 기증 과정에서 김형근 미주현대불교 발행인과 신영근 전 한국국외문화재연구원 사무처장이 조력자 역할을 했다고 문화재청은 전했다.

외국으로 무단 유출된 조선 후기 국새 '대군주보'와 '효종어보'의 반환식이 열린 19일 서울 종로구 국립고궁박물관에서 기증자인 이대수씨의 아들 성주씨가 인사말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외국으로 무단 유출된 조선 후기 국새 '대군주보'와 '효종어보'의 반환식이 열린 19일 서울 종로구 국립고궁박물관에서 기증자인 이대수씨의 아들 성주씨가 인사말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대수씨 아들 성주씨는 반환식에서 “아버지는 역사적으로 귀중한 한국 유물을 볼 때마다 한국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늘 말씀하셨고, 그러던 중 오늘 보고 계신 유물들을 경매장에서 매입하시게 됐다”며 “많은 국새와 어보가 아직 한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안다. 국새와 어보가 어디 있는지 알고 계신 분들이 있으면 환수될 수 있게 협조해 주시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조선시대에 국새와 어보는 모두 412점이 제작됐는데, 73점은 아직 소재가 불분명하다. 정재숙 청장은 “아직 70여점의 소중한 국새와 어보가 외국을 떠돌고 있다”며 “행방불명 상태인 어보와 국새가 하루라도 빨리 돌아오게 하는 방법을 강구하겠다. 안내문을 뿌리고 홍보 영상도 만들어 미국 뉴욕 타임스퀘어에 틀 계획”이라고 말했다.

이태진 전 국사편찬위원장은 “일제의 강점으로 흐트러졌던 우리 역사를 다시 보듬어 새롭게 우리 역사의 줄기로 삼는다는 위권 회복 노력의 일환으로 조선과 대한제국의 어보ㆍ국새 환수 작업은 앞으로도 계속돼야 한다는 각오를 이번 환수를 계기로 다시 다질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조선 국새 '대군주보'와 어보 '효종어보' 반환식이 열린 19일 서울 종로구 국립고궁박물관 대강당에서 정재숙 문화재청장이 인사말을 하고 있다. 뉴시스
조선 국새 '대군주보'와 어보 '효종어보' 반환식이 열린 19일 서울 종로구 국립고궁박물관 대강당에서 정재숙 문화재청장이 인사말을 하고 있다. 뉴시스

대군주보와 효종어보는 20일부터 내달 8일까지 국립고궁박물관 2층 ‘조선의 국왕’실에서 공개된다.

권경성 기자 ficcione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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