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오지마(硫黃島)는 괌ㆍ사이판과 일본 도쿄를 직선으로 잇는 선의 한 가운데에 솟은 20㎢ 면적의 작은 화산섬이다. 1945년 2월 19일 미 해병대가 그 섬에 상륙하면서 이오지마 전투가 시작됐다. 일본 남방전선의 중계 보급기지였던 이오지마는 그 무렵 미군 폭격기에 대한 마지막 본토 대공 방어기지였다. 완강한 저항은 예상된 일이었지만 해병 등 미군 11만명과 주둔군 2만1,000명이 맞붙는 전투였다. 앞서 미군은 16일부터 만 이틀간 함포로 섬 전체를 다지다시피 해둔 터였다. 길어도 일주일이면 끝나리란 미군의 예상과 달리, 전투는 3월 26일까지 한 달 넘게 이어졌다. 일본군은 거의 전원인 2만129명이 전사했고, 미군도 태평양 전쟁 사상 가장 많은 피해(전사 6,821명, 부상 2만1,865명)를 봤다. 그 전투를 이끈 일본 주둔군 사령관이 구리바야시 다다미치(栗林忠道, 1891~1945) 중장이었다.
44년 5월 이오지마에 부임한 그는 해상 방어선을 포기하고 섬 고지대에 터널과 참호를 뚫어 지구전 전술을 전개했다. 그건 생사보다 기개를 중시하며 죽더라도 물러서지 않는다는 이른바 사무라이의 전술이 아니었다. 실제로 그는 전군에 어떠한 경우에도 스스로 목숨을 끊지 말라고 명령했다. 그는 그 전선이 자신의 마지막 전장임을 알고 있었고, 최대한 오래 버팀으로써 도쿄의 시간을 벌어주고자 했다. 혹자는 그가 도쿄의 군 지휘부로 하여금 허울 좋은 ‘전원 옥쇄(玉碎)’의 구호를 포기할 시간, 본토의 시민들이라도 목숨을 구할 시간을 벌어주고자 했다고 여긴다. 그에게도 마지막까지 편지로 안부를 주고받던 본토의 가족이 있었다.
일본 육사와 육군대학을 나와 미국과 캐나다 대사관 무관으로 일한 그는 애당초 미국과의 전쟁은 가망 없다며 반대했던 소수 중 한 명이었다. 하지만 그는 명령을 따라야 할 군인이었다.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2006년 자신의 영화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에서 미국의 가치를 최고로 치는 보수주의자로서 표현할 수 있는 최상의 경의를 다다미치에게 바쳤다. 그건 피아(彼我)를 떠나 한 명의 진정한 군인에게, 한 가장에게, 한 인간에게 바치는 경의였다.
8월 6일 원폭을 싣고 사이판 티니안섬 이륙 후 산개 비행하던 B-29 폭격기 세 대는 이오지마 상공에서 재집결해 본토로 향했다. 최윤필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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