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2일 서울 등촌동에 있는 한 웨딩홀. 수요일이라 결혼식이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식장에는 비발디의 사계 중 ‘겨울’이 쉴새없이 울려 퍼졌다. 식장 안에 자리 잡은 이들은 KBS교향악단 단원 20명. 3월말쯤 LG유플러스 전용 앱을 통해 공개될 3D 가상현실(VR) 클래식 공연을 촬영하고 있었다. VR 화면에 바로크풍 배경을 연출하기 위해 웨딩홀을 촬영 장소로 골랐다. VR 전용 장비를 쓰고 보면 눈앞에 지휘자와 연주자들이 살아 움직이는 듯한 경험을 할 수 있다.
클래식계에서 3D VR 제작은 첫 시도다. 반년 전 KBS교향악단과 LG유플러스가 손을 잡고 기획에 들어갔다. 실제 공연장에서 VR 카메라를 이용해 촬영한 것과 달리, VR 전용 콘텐츠를 만들기 위해 기획된 셈이다.
이날 촬영 현장에서 KBS교향악단과 함께 한 이는 지휘자 금난새였다. 금난새는 1980년 국립교향악단(옛 KBS교향악단)의 전임 지휘자로 지휘봉을 잡은 뒤 12년간 악단을 이끌었다. KBS교향악단이 금난새와 다시 호흡을 맞춘 건 15년 만이다.
이날 촬영은 쉽지만은 않았다. 공연 실황을 VR에다 담는 게 아니라, VR을 위해 공연 실황을 이어 나가는 작업이어서다. VR 화면을 기준으로 이상적인 구도를 잡으려다 보니 지휘자와 단원들은 몇 번이고 같은 곡, 같은 부분을 되풀이해야 했다. 지루하고 지칠 법도 하지만, 이들 얼굴엔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금난새는 “실제 관객은 없는데 관객이 반응한다고 상상하면서 지휘하는 일이라 낯설기도 하지만, 친정인 KBS교향악단에서 새로운 도전을 하게 돼 개인적으로 즐겁고 의미가 크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일흔을 넘긴 음악가가 VR이라는 낯선 기술을 활용하기로 한 건, 그 또한 클래식계의 변화가 절실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금난새는 “문화의 발전이란 결국 다른 분야와의 융합을 통해 가능한 것이라 생각한다”며 “시대와 패러다임이 변하고 있는데 악단이 정기연주회 개최에만 만족한다면 발전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3D VR로 제작되는 첫 곡으로 비발디의 겨울을 택한 것은 그만큼 대중적인 곡이라서다.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졌을 뿐 아니라 바이올린 속주가 많아 지루하지 않다. 여기다 금난새의 친절한 설명까지 덧붙일 예정이다.
클래식 붐을 일으키기 위해 KBS교향악단은 올해를 ‘디지털 퍼스트 오케스트라(Digital First Orchestra)’의 원년으로 선언했다. KBS교향악단 관계자는 “비발디의 사계는 그 첫 사업”이라며 “실내악에서 교향곡까지 다양한 공연을 추가해 나가겠다”고 말했다.
글ㆍ사진 장재진 기자 blanc@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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