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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민번호 앞자리 바꾸기 법의 큰 문턱… 사회엔 ‘혐오’ 더 큰 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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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민번호 앞자리 바꾸기 법의 큰 문턱… 사회엔 ‘혐오’ 더 큰 산

입력
2020.02.12 03:39
수정
2020.02.12 10:13
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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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론을박 트랜스젠더 인권 현실]

여대 입학 포기·변희수 하사 전역… 성 소수자에 대한 차별의 현주소

대법, 제도 개선 논의 시작했지만… 젠더 문제 사회적 합의가 더 시급

트랜스젠더 A(32)씨는 겉으로 보기엔 남성이지만 주민등록번호는 ‘2’로 시작된다. 10대 때 남성 정체성을 받아들여 성인이 된 후 남성 호로몬 요법 등을 받고 있다. 그런데도 법적 성별을 바꾸기 위한 ‘성별 정정 허가 신청’은 법원에서 번번이 퇴짜를 맞았다. 지병 때문에 성기 성형 수술을 받을 수 없는 상황인데도 법정에서는 이유가 되지 않았다.

정체성과 법적 성별이 다른 A씨의 이중적 삶이 순탄했을 리 없다. 참기 힘들 정도로 아플 때 아니고선 병원도 안 갔다. 가장 견디기 힘든 건 일단 색안경을 끼고 보는 사회적 편견이었다. 최근 성별 정정까지 마친 트랜스젠더 여성 B씨가 일부 학생들의 반대로 입학을 거부하는 과정을 지켜 본 A씨는 “트랜스젠더에 대한 사회적 혐오가 이렇게 컸나 싶어 놀랐다”고 했다.

최근 성전환 수술 이후 육군에서 강제전역 당한 변희수 하사, B씨의 숙명여대 합격을 둘러싸고 벌어진 논란 등이 잇따르며 우리사회에서 ‘트랜스젠더의 권리’를 둘러싸고 갑론을박이 벌어지고 있다. 둘의 경우는 성적 정체성에 대한 자기결정이 성별 정정으로 이어졌지만 A씨처럼 제도적 장애를 넘지 못한 경우가 더 많다. 서구의 다른 국가와 달리 성별 정정 요건이 극히 까다롭기 때문이다. 성별 정정이라는 제도적 한계를 넘더라도 성적 소수자들이 자유로운 건 아니다. 대부분 성적 소수자들이 절망처럼 느끼는 ‘사회적 혐오’ 때문이다. 트랜스젠더 이슈로 우리 사회가 시대적 도전에 직면하고 있는 셈이다.

지난 22일 육군 부사관 변희수 하사가 서울 마포구 군인권센터에서 군의 전역 결정과 관련한 기자회견을 열고 거수경례를 하고 있다. 뉴스1
지난 22일 육군 부사관 변희수 하사가 서울 마포구 군인권센터에서 군의 전역 결정과 관련한 기자회견을 열고 거수경례를 하고 있다. 뉴스1

◇성별정정, 일상 생활을 위한 최소 조건

트랜스젠더는 스스로 인식하는 성별과 법적으로 부여된 성별이 달라 ‘성별 위화감’을 느끼는 사람을 말한다. 미국 윌리엄스 연구소에 따르면 미국 전체 성인 중 0.6% 남짓인 1,400만명이 스스로를 트랜스젠더라고 생각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세계보건기구(WHO)는 2018년 6월 일종의 성 정체성 장애로 규정했던 트랜스젠더를 정신질환 목록에서 삭제했다. 트랜스젠더를 성적지향에 대한 다양성으로 수용하는 분위기가 글로벌 추세인 셈이다.

트랜스젠더가 더 이상 차별의 대상이 아니라면, 성적 정체성을 통일시켜가는 ‘트랜지션(자신의 정체성에 따른 성별로 살기 위해 거치는 전환 과정)’은 사회 구성원으로 동화되는 과정이다. 화장ㆍ옷으로 외모를 꾸미는 가벼운 수준의 트랜지션부터 최근에는 성기 성형수술 등 의료적 트랜지션까지 선택의 범위가 상당히 넓어졌다.

하지만 신체에서 성적 정체성을 찾았다고 트랜스젠더의 일상 생활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A씨처럼 외모는 남성인데 법적 성별이 다른 트랜스젠더들은 특히 신분증을 내야 하는 상황에서 큰 곤란을 겪는다. 국가인권위원회가 트랜스젠더 응답자 9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걸 보면, 응답자의 66.7%가 ‘주민등록번호를 제시해야 하는 업무에 부담을 느낀다’고 답했다. B씨도 성별정정을 통해 여성의 지위를 얻지 않았다면 숙명여대 입학 지원 자체가 불가능했을 것이다. 때문에 트랜스젠더들은 성별정정을 사회 구성원으로 동화되는 ‘법률적 트랜지션’ 과정이자 일상 생활을 하기 위한 최소 조건으로 꼽고 있다.

◇서구사회보다 높은 성별 정정 문턱

문제는 한국에서 법원에서 성별 정정 허가를 받는 게 쉽지 않다는 데 있다. 전문가들은 한국 기준이 유럽 등 선진국에 견줘 예측가능성이 떨어지고, 기준 수위도 높다고 지적한다. 한국에선 법원이 성별 정정 허가 심사를 할 때 대법원 예규인 ‘성전환자의 성별정정허가신청사건 등 사무처리지침’을 따른다. 이렇다 보니 재판장 개인의 성향에 따라 판단이 달라지는 경우가 적지 않다. 실제로 지난해 7월 여성으로 법적 성별을 바꾼 트랜스젠더 C(29)씨는 ‘성별 정정’ 문턱을 넘기 위해 법원을 3곳이나 돌며 허가 심사를 받아야 했다. 법원마다 요구하는 서류도 달랐다. 첫 재판에선 예규에도 없는 ‘동생 동의서’를 받아오라고 했다. C씨는 “심문 기일이 7개월 만에 잡히는 등 절차적으로도 어려움이 있었다”며 “판사가 허가 내줄 생각이 없구나 싶어 취하하고 다른 법원을 알아봤다”고 말했다.

성별 정정 요건 자체도 까다롭다. 외부 성기 수술을 요구한 항목이 대표적이다. 외부 성기 수술은 가격이 비싸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수술 위험도가 높다. 한 조사에 따르면 트랜스젠더 58%는 성별 정정 신청 때 ‘외부 성기 수술’을 가장 큰 부담으로 꼽았을 정도다. 김승섭 고려대 보건대학 교수는 “외과 과목에서 외부 성기 수술을 전혀 가르치지 않는 등 한국에는 의료 서비스 자체가 부족하다”며 “사회가 안전망을 갖추지 않은 상태에서 수술 여부를 요건으로 내거는 것은 모순”이라고 지적했다.

반면 서구사회에선 우리처럼 ‘외부 성기 수술’을 요건으로 내건 경우가 드물다. 영국ㆍ프랑스 등 유럽 27개 국가와 캐나다, 캘리포니아ㆍ뉴욕 등 미국 19개 주에서는 성기 수술을 받지 않아도 트랜스젠더임을 입증받으면 성별 정정이 가능하다. 덴마크나 아일랜드, 노르웨이 국가에선 신청제라 행정기관에 신청만 하면 성별이 바뀐다.

우리 대법원도 이런 흐름에 발맞춰 성별 정정 기준을 재검토하기로 했다. 대법원 법원행정처는 지난해 12월 ‘성전환자의 성별정정 제도개선 연구반’ TF를 꾸렸다. 대법원 관계자는 “예규 개정 필요성이 있는지, 필요하다면 어떤 내용으로 개정하는 것이 바람직한지 논의하고 있다”고 말했다.

◇“성소수자 혐오 극복하기 위한 대안 고민해야”

하지만 최근 사태에서 드러났듯, 제도 개선만으로는 트랜스젠더의 법적 권리를 보호하는 데 역부족이다. 공익인권변호사모임 희망을만드는법의 박한희 변호사는 “한국은 법원이 판단의 권력을 갖고 성별정정을 ‘허가’해주는 허가제”라며 “당사자의 권리 보장이라는 측면에서 문제를 접근하는 관점 전환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무엇보다 우리 사회에 팽배한 성수자에 대한 혐오와 반감을 줄이기 위한 노력이 뒤따라야 한다는 지적이 많다. 당장의 인식 변화를 기대하기 쉽지 않지만, 우리사회가 어느 정도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 새로운 젠더 이슈를 논의하고 고민해야 한다는 것이다. 신경아 한림대 사회학과 교수는 “최근 숙명여대 사태에서 입학을 반대했던 학생들을 비난만 할 게 아니라 텔레그램 ‘N번방’ 등 매일 새로운 종류의 성폭력이 생산되는 상황에서 여성들이 공포와 분노를 표출하는 맥락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며 “사회적 합의를 이룰 수 있게 정부 등이 논의의 장을 마련하는 게 필요하다”고 말했다.

▲더 알아보기:

판례 못 따라온 성별정정 제도史

김현종 기자 bell@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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