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준 별 맞춤형 교육… 선배들, 이웃 대학생·고등학생은 특급 도우미로 활약
서울 마포구에 대학 진학률 100%를 자랑하는 고등학교가 있다. 해마다 졸업 예정 학생 모두가 2년제 또는 4년제 대학에 입학한다. 믿기 어려운 대학 진학률을 자랑하는 학교의 재학생들은 특별하다. 보통의 10대 학생들이 아니다. 40~80대의 여학생들이 다니는 이곳, 바로 일성여고다. 대학 갈 나이의 자식이나 손주를 둔 이들이 직접 예비 대학생 신분이 된 것이다.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여성들에게 공부할 기회를 제공하고자 야학으로 시작한 일성여자중고는 2000년 교육부로부터 학력 인정 평생학교로 지정 받았다. 중학교 2년(2년 6학기제), 고등학교 2년 총 4년의 과정을 거치면 중고등 학력을 인정받을 수 있다. 이 학교에서는 13년 연속 전체 학생이 대학에 진학했다. 수험생 자녀를 둔 일성여고 학생이 “아들이 꼭 대학을 갔으면 좋겠는데 나랑 아들을 학교를 바꿔 아들이 이 학교를 다니면 안되냐”고 물을 정도다. 올해 역시 졸업생 202명 모두 동국대, 서울과학기술대, 배화여대, 숭의여대 등에 입학한다.
스마트폰 활용한 디지털 능력까지 갖춰… “젊은 대학생들도 ‘이모’ 도와주세요”
자식들 키우고 생계를 책임지느라 뒤늦게 공부를 시작한 일성여고 학생들이 빠짐없이 대학에 갈 수 있는 비결은 무엇일까. 김상현 교무부장은 맞춤형 교육을 꼽았다. 1학년 때부터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을 목표로 삼아 정규 수업이 이뤄진다. 국영수는 물론 사회, 과학, 한문까지 포함됐다. 이것이 끝이 아니다. 학교 수업이 끝난 후 방과 후 수업에는 개별 학생의 수준에 맞춰 국어, 영어, 한문, 한국사 강의가 진행된다.
여기에 다양한 어벤저스 급 도우미들이 힘을 보탠다. 먼저 ‘선배 찬스’. 3학년 학생들이 수업을 잘 따라가지 못하는 1, 2학년 학생들을 지도하는 멘토링 프로그램도 있다. 말이 선배지 사실 나이나 인생 경험이 비슷한 또래 친구들이나 다름없다. 이들이 가르쳐주고 배우며 자신의 지식을 다시 한 번 확인하는 것이다. 학교 밖에서는 서울여중ㆍ고, 숭문고의 어린 학생들이 이곳에 직접 찾아와서 할머니, 엄마 나이 대의 일성여고 학생들의 공부를 돕기도 한다. 일성여고 학생들은 협력 관계에 있는 서강대에 가서 영어 기초 프로그램을 이수하고 있다. 다른 학교보다 1년 짧은 2년의 교육 과정 동안 공부를 마쳐야 하기 때문에 학습 강도는 높을 수밖에 없다.
어린 학생들에 비해 스마트폰이나 컴퓨터 같은 전자기기에 익숙하지 않은 늦깎이 학생이다 보니 이런 기기를 적극 활용하도록 교육하는 것도 눈에 띈다. 학교 측은 휴대폰을 갖고 있지 않던 학생들에게도 스마트폰을 갖게 했다. 특별활동 시간에는 스마트폰 활용 교육을 하고 네이버 밴드 앱으로 숙제를 내 준다. 디지털 활용 교육 덕에 대학 입학 후에도 수업에 적극 참여하며 우수한 성적을 거두고 있다. 이선재 교장은 “재학생들이 대학에 입학하면 처음에는 ‘아주머니가 제대로 발표를 하겠나’하고 생각하던 젊은 대학생들도 파워포인트까지 만들어 와서 발표를 하는 걸 보고는 누님, 이모님 하면서 도와달라고 할 정도라고 한다”며 웃었다.
재학생 대부분이 ‘전업 학생’은 아니다. 식당이나 가게에서 일을 하면서 학교를 다니거나, 가정 주부인 경우가 많다. 때문에 공부할 시간도 모자란다. 정규 수업이 끝나면 학교 문을 닫을 때까지 학교 도서관에 남아 공부하기도 하지만 전철이나 버스 안에서, 걸어 다니면서도 공부하는 이들도 있다. 심지어 이입분(66) 씨는 통학 시간도 아까워서 학교 근처 고시원에 방을 구해 공부하고 잠을 잔다. 이런 학생들을 보면서 교사들도 큰 자극을 받는다. 나경화 영어 교사는 “선생님들은 ‘이렇게 열정이 넘치는데 제 때 배우셨다면 얼마나 큰 일을 하셨을까’하는 안타까움에 더 공들여 수업을 준비한다”고 말했다.
꿈도 못 꾸던 대학 합격증 쥐고… 시인ㆍ교사ㆍ공인중개사로 내 꿈 펼쳐라
일성여고 학생들은 대부분 수시 전형을 통해 대학에 가는데, 주로 ‘만학도 전형’이 있는 학교를 중심으로 입시 전략을 짠다. 3학년이 되면 학기 초부터 교사와 상담을 하며 학교와 학과 선정에 들어간다. 또 자기 소개서를 쓰는 특별 강의를 들으며 자소서 쓰기 연습도 꾸준히 한다. 글쓰기 대회와 다양한 교내외 행사 등 체험 활동 덕분에 만학도 전형이 아닌 일반 수시 전형으로 대학 입시에 성공하는 학생들도 적지 않다. 졸업한 선배들이 찾아와 입학부터 대학 생활까지 팁을 쏟아낸다. 영문학과를 지원할까 고민했던 이무선(72)씨도 선배들이 찾아와 대학에서 어린 학생들과 경쟁이 쉽지 않다는 이야기를 듣고, 사회복지학으로 전공을 바꿔 노인복지사를 준비하고 있다.
물론 대학 진학을 망설이는 학생들도 있다. 늦은 나이에 젊은 학생들과 경쟁하며 대학 공부를 따라가는 것이 두렵고 등록금이 비싼 것도 이유다. 이 교장은 “처음에는 (대학 진학을 독려하려고) 상담도 많이 했다”고 밝혔다. 이런 학생들에게 교사들은 ‘원서라도 써 보자’고 말한다. 중학교만 나오자고 시작해 고등학교까지 다닐 정도로 공부에 욕심을 내는 학생들이니 결국 대학 입학 욕심을 갖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 교장은 “교사들은 ‘못 배운 게 한이었지 않느냐’고 설득한다. 일단 원서를 쓰고 붙은 다음에 갈지 안 갈지를 결정하라고 한다. 대학을 합격하고 안 간 것과 합격도 못한 것은 다르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대학 원서나 써보자 시작한 학생들이 수도권 대학에 입학하고, 장학금까지 받고 학교를 다니고 있다. 앞서 대학에 진학한 선배들도 좋은 자극이 되고 다시 한번 도전하게끔 하는 동력이 된다.
이렇게 대학에 진학한 학생들은 진로도 다양하다. 몇몇 졸업생은 부동산학과 졸업 후 공인중개사가 되거나, 전통조리학과 졸업 후 요식업에 진출했다. 문예창작학과에서 공부해 문인의 길을 걷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한문교육과를 졸업하고 모교에서 교생 실습까지 한 후 일성여고에서 한문 교사로 일하고 있는 졸업생도 있다. 가장 많이 진학하는 곳은 사회복지학과다. 졸업 후 관련 자격증을 따고 사회복지사나 요양보호사를 하는 이들이 많다. 이 교장은 일성여고를 다니면서 꾸준히 봉사 활동을 하면서 익히게 된 봉사 정신을 그 배경으로 꼽았다. 이 교장은 “1,000명 넘는 학생들이 편지 봉투에 담아온 쌀로 떡을 만들고 이 떡을 폐지 줍는 노인들에게 나눠 준 적도 있다”며 “재학생들 모두 나중에 다른 사람을 돕겠다고 말하는 것은 이런 봉사 정신에서 피어난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미령 인턴기자
정해주 인턴기자 digital@hankookilbo.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