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진 두산 코치가 22일 서울 잠실야구장에서 진행된 본보 인터뷰에서 질문에 답변하고 있다. 배우한 기자.

지난해 8월 서울 잠실구장에서 김태형 두산 베어스 감독과 인터뷰 할 때였다. 포수 출신인 김 감독에게 선수 시절 어느 투수의 공이 가장 좋았느냐 질문하자, 김 감독은 망설임 없이 김상진을 가장 먼저 꼽았다.

그 ‘배트맨’ 김상진(50)이 22년 만에 친정팀으로 돌아왔다. 1990~91년 2년 연속 리그 최하위 수렁에 빠진 두산(당시 OB베어스)에 연습생 신분으로 혜성같이 등장, 5년 만에 팀을 한국시리즈 우승(1995년)까지 올려놓은 원조 에이스다.

지난 22일 잠실구장에서 만난 김상진 두산 퓨처스(2군) 코치는 “시무식(15일)때 두산 점퍼를 입었는데 감회가 새로웠다”면서 “아직 정식으로 선수들과 운동장에서 뛰지 않아 조금 어색하지만, 앞으로 야구장에서 친정팀 팬들과 만날 생각에 조금 설렌다”라며 웃었다. 90년대 초중반 베어스 최고 에이스였지만, 정작 ‘두산’ 마크가 새겨진 유니폼은 처음 입는다. 김 코치는 1998년 말 삼성으로 트레이드 됐는데, OB는 1999년부터 두산으로 간판을 바꿔 달았기 때문이다. 이후 김 코치는 삼성과 SK를 거쳐 2003년 선수 생활을 은퇴했고, 다시 SK 코치와 삼성 코치를 거쳐 두산에 돌아왔다.

OB베어스 시절의 김상진 두산 코치. 두산베어스 제공.

현역 시절 당시엔 흔치 않던 고글형 금테 안경으로 ‘배트맨’이란 별명이 붙은 김 코치는 진기록을 많이 남겼다. 1995년 3경기 연속 완봉승(역대 최다 타이)을 기록했고 그 시즌엔 무려 8차례의 완봉승(한 시즌 최다 타이ㆍ선동열)을 거뒀다. 같은 해 5월 한화 전에서는 12이닝 동안 무려 187개의 공을 던지며 17탈삼진 완봉승 기록을 올렸다. 무엇보다 2년 연속 리그 최하위였던 팀을 수렁에서 건져냈다는 점에서 두산 올드팬들에게는 최고의 에이스로 기억된다. 그는 1995년 한국 시리즈 7차전에서는 6이닝 2실점(1자책) 역투하며 팀의 우승을 이끌었다.

김 코치는 그러나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으로 ‘데뷔 첫 승’을 꼽았다. 이 경기 역시 ‘완봉승의 사나이’ 답게 3-0으로 혼자 틀어막았다. 김 코치는 “당시 팀 성적도 안 좋았고, 팀 전원이 삭발 투혼을 불사르던 시기였다”면서 “어려운 상황에서 좋은 결과를 얻게 돼 더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당시 포수였던 김태형 두산 감독과의 배터리 호흡에 대해 “3년 선배인데 상당히 궁합이 잘 맞았다. 사인 교환도 많아야 2번 정도면 합의가 이뤄졌다”고 했다. 김 코치는 “나는 가장 자신 있는 구질이 상대 타자 몸쪽 빠른 공이었다”면서 “감독님 역시 공격적인 볼 배합을 했고, 이런 성향이 나와 잘 맞았다”고 말했다.

당대 라이벌이었던 ‘야생마’ 이상훈(50ㆍ당시 LG) 해설위원 얘기를 빼놓을 수 없다. 두 투수의 전성기 성적은 1994년 김 코치가 14승(평균자책 2.37ㆍ완투 9), 이 위원이 18승(2.47ㆍ완투 6), 1995년엔 김 코치가 17승(2.11ㆍ완투 13), 이 위원 20승(2.01ㆍ완투 12)으로 막상막하였다. 김 코치는 그러나 둘의 맞대결에서는 유독 약한 모습을 보였다. 김 코치는 “상훈이는 엘리트코스(서울고-고려대)를 밟았고, 나는 밑바닥에서 성장했던 터라 알게 모르게 열등감이 있었던 것 같다”고 돌아봤다. 이어 “당시 OB-LG 라이벌 구도는 상당한 긴장감을 불러일으켰다”면서 “열등감과 과욕을 이겨내지 못해 결과가 좋지 못한 것 같다”고 말했다.

로테이션 개념이 없던 시절, 1991~1995년까지 선발과 마무리를 오가며 한해 평균 무려 181.8이닝을 소화했다. 그 탓인지 1995년 이후에는 서서히 구위가 하락했다. ‘혹사 당하지 않았으면 선수 생활이 더 길어지지 않았을까’는 질문에 김 코치는 고개를 저었다. 그는 “당시엔 팀 내 1ㆍ2선발이면 등판 일정에 상관없이 이닝을 소화해야 했다”면서 “그런 분위기라면 내 스스로 몸 관리를 했어야 했다. 그걸 못했다. 모든 결과는 내 책임이다”라고 말했다.

22년만에 친정 두산으로 돌아온 ‘배트맨’ 김상진 코치. 배우한 기자

인천고 투수로 활약 중인 아들 김웅(18ㆍ3년)에 대한 이야기도 나왔다. 김웅은 ‘존경하는 선수’로 이정후(키움)를 꼽았다고 한다. 김 코치는 “아들이 중학교 2학년 때부터 아버지의 기록을 의식하기 시작했다”면서 “이정후 선수가 대선배이자 레전드인 아버지(이종범)를 극복하는 과정을 높게 평가한 것 같다”고 말했다.

이제는 두산 구단의 트레이드 마크로 굳어진 ‘화수분 야구’의 1호는 김상진이라 해도 무리는 아니다. 1989년 연습생 신분으로 OB베어스 2군에 입단했고, 베팅볼 투수로 시작해 1990년 1군에 등록했다. 당시 이천(2군 야구장)에서 잠실 1군에 합류한 첫 번째 사례다. 그 화수분 야구의 중심에 다시 선 김 코치는 “두산의 선수 육성 시스템은 리그 최고다”라며 “퓨처스리그에서 좋은 자원을 발굴해 1군에서 꽃피울 수 있도록 화수분 야구에 일조하겠다”라고 다짐했다.

강주형 기자 cubi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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