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 브루클린처럼 젊은 예술가들이 둥지 틀어 변신
[걷고 싶은 길 가고 싶은 거리] <14> 서울 성수동 골목
미국 뉴욕시 맨하튼에서 밀려난 예술가들이 강 건너 브루클린에 새 둥지를 튼 것처럼, 2011년 젊은 예술가들이 서울 성수동 골목으로 몰려들었다. 공장과 주택이 뒤엉켜있던 회색빛 도시에 다채로운 색깔이 덧입혀진 건 순식간이었다. 새롭고 개성이 강한 온갖 힙한 카페와 레스토랑, 갤러리는 물론이고, 소셜벤처까지 이곳에 둥지를 틀고 있다. ‘핫 플레이스’에 으레 따라붙는 ‘젠트리피케이션(둥지 내몰림)’에도 굴하지 않고, 골목길 특유의 매력을 잃지 않는다.
성수동의 문화와 가치를 알리는 관광코스를 개발해 운영 중인 백영화 사계절공정여행 대표는 “옛 것과 새로움이 서로 배척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는 독특한 문화가 있는 동네가 성수동”이라며 “그 지역만이 가진 고유자원을 찾아 타 지역과 구분된 콘텐츠를 만들어야 성공할 수 있다는 점에서 차별화된다”고 말했다.
◇젠트리피케이션도 비껴간 성수동 매력은
지금의 성수동을 있게 한 것은 서울숲이다. 2005년 도시와 자연, 사람이 공존하는 서울숲 개장으로 성수동은 이미지 반전에 성공했다. 광복 후 들어선 경마장이 1989년 경기 과천시로 옮겨가면서 쓸모를 잃었지만 무려 35만평에 이르는 대규모 생태공원으로 변신했다. 이젠 해마다 750만명이 찾는 서울의 명소다.
특히 서울숲 북쪽과 맞닿은 ‘아틀리에길’은 성수동 골목길의 정체성을 잘 보여준다. 어느덧 성수동의 상징이 된 ‘붉은 벽돌’ 건물이 즐비한 이 골목은 아기자기한 공방과 카페 등이 들어서면서 아틀리에길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성동구가 이 일대를 지속가능발전구역으로 묶어 적극적 대응에 나서면서 젠트리피케이션을 비껴갈 수 있었던 덕이다. 사람들이 몰려들면서 덩달아 오르던 임대료에도 제동이 걸렸다. 구가 2015년부터 건물주, 임차인과 ‘자율적 상생협약’을 맺은 게 빛을 봤다. 당시 구 공무원 한 명이 건물주 한 명에 일대일로 붙어 설득한 끝에 이들의 호응을 끌어낼 수 있었다. 이 일대에 있는 건물 255곳 중 178곳이 협약을 맺었다. 이런 건물 외벽에는 ‘상생성동’이라고 써있는 둥근 푯말이 붙어있다. 구는 또한 젠트리피케이션 방지 조례를 제정해 이곳에는 대기업과 프랜차이즈는 아예 입점할 수 없게 만들었다.
서울숲 정문에서 길 하나 넘어 자리한 ‘언더스탠드에비뉴’는 성수동의 미래를, 갈비골목은 20년 전 성수동을 마주할 수 있는 곳이다. 컨테이너 116개를 쌓아올린 외관이 눈길을 끄는 언더스탠드에비뉴는 구가 청년 창업가와 사회적 기업 등에 내준 공간이다. 제품 판매 공간뿐 아니라 문화전시공간, 카페와 식당도 들어서있다.
아틀리에길에서 뚝섬역 방향에 위치한 갈비골목은 옛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하루 일과를 마친 공장 노동자들과 인근 주민들로 붐볐을 이곳은 여전히 푸짐한 양과 저렴한 가격을 자랑한다. 지금도 오후 5시부터 줄이 늘어선다.
◇인스타그래머라면 ‘성수 카페 유랑’은 필수
성수동 하면 핫 플레이스, 핫 플레이스 하면 카페다. 성수동에 왔다가 카페를 들르지 않는다면 절반만 본 것이나 다름없다. 인쇄ㆍ금속ㆍ주물ㆍ봉제ㆍ금형 등 공장과 자동차정비소, 수제화 가게 사이 숨어있는 카페를 발견하는 쏠쏠한 재미를 선사한다. 여기저기서 휴대폰으로 ‘인증샷’이나 브이로그 영상을 찍는 젊은이들이 눈에 띈다. 누군가는 생업을 이어가는 현장 한가운데를 호기심 많은 새로운 시선들이 끊임없이 오고 간다.
이곳 카페들은 단순히 커피를 마시는 곳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오늘날 ‘성수 카페거리’를 만든 ‘대림창고’는 정미소이자 물류창고였다. 지금은 샤넬 패션쇼가 열리는 복합문화공간이다. ‘카페 할아버지 공장’과 ‘어반소스’도 마찬가지다. 카페와 갤러리를 갖춘 카페 할아버지 공장은 흙, 나무, 돌을 이용한 예술 작품을 언제든 감상할 수 있는 곳이다. 오래 전 문 닫은 600평 규모 봉제공장을 개조한 어반소스는 평소 레스토랑 카페로 운영되지만 다양한 행사가 열리는 문화공간이다.
물류창고가 탈바꿈한 ‘성수연방’도 성수동의 랜드마크이다. 라이프스타일 숍 ‘띵굴스토어’, 서점 ‘아크앤북’, 꼭대기층 카페 ‘천상가옥’ 등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핫한 곳들이 한데 모여있다. 체험과 시음이 가능한 맥주 양조장(자파 브루어리)과 육가공 공장(존쿡 델리미트)도 들어서 있다.
트렌드를 이끌기도 한다. 1970년대 낡은 단층 건물에 문을 연 ‘어니언’은 페인트 얼룩과 덧댄 벽돌, 노출 콘크리트를 과감하게 드러내면서 이른바 ‘인더스트리얼 스타일’의 시초가 됐다. ‘커피업계 애플’로 불리는 ‘블루보틀’까지 성수동 카페의 정체성을 잇고 있다. 지난해 뚝섬역 1번 출구 앞에 문을 연 블루보틀은 국내 1호점 입지를 강남이나 홍대가 아닌 성수동으로 낙점해 화제가 됐다. 블루보틀은 브랜드를 상징하는 색깔이 파란색인데도 건물 외벽 전체를 붉은 벽돌로 장식하고, 인더스트리얼 스타일을 따랐다. 성동구 관계자는 “이 쪽은 상대적으로 사람들이 찾지 않던 곳인데 블루보틀이 문을 열면서 젊은층 유입이 크게 늘었다”며 “성수역 3번 출구 일대에 머물던 카페족들의 영역이 계속 확장되고 있다”고 귀띔했다.
◇‘수제화’ 살려 골목상권에 활기를
한때 성수동 하면 가장 먼저 수제화가 떠오르던 때가 있었다. 1960년대 업계 1위 금강제화 생산공장을 비롯해 구두공장들이 성수동으로 몰려들면서다. 자연스럽게 가죽과 부자재 등 구두 재료 업체들도 주변에 자리잡았다. 성동구에 따르면 지난해 11월 기준으로 444개 업체가 여전히 성수동을 지키고 있다. 2012년 ‘수제화 산업 지역특화지역’으로 지정된 이래 성동구는 지역 자원인 구두 자체를 문화자본으로 삼아 골목상권을 활성화시키려는 노력을 계속하고 있다.
우선 성수역사 안에 성수동 구두의 역사를 나열해놓은 수제화 전시장이 있다. 성수역부터 뚝섬역까지 이어진 성수수제화타운에는 16개 업체들의 ‘공동작업장’도 마련돼 있다. 디자인과 아이디어를 빼앗길새라 경쟁하던 업체들이 손잡고 함께 살 길을 모색한다는 게 이곳 특징이다.
중간 유통 과정을 거치지 않고 디자인부터 중간 가공, 부자재 유통, 완제품 생산까지 한번에 이곳에서 이뤄지다보니 품질 좋은 구두를 저렴하게 살 수 있다. 국내 수제화 명장 1호인 유홍식의 가게도 있다. 문재인 대통령의 신발을 만들어 유명세를 탄 유씨는 세계기능올림픽 수제화 제작 부문에서 3연패를 한 장인이다. 그가 만든 신발 중에는 350만원짜리 ‘명품’도 있다.
크고 작은 수제화 매장을 따라 구경하다보면 삼익악기 공장이 있던 자리에 2013년 문을 연 ‘구두 테마공원’이나 성동구가 운영하는 구두 갤러리 ‘카페 수다’로 발길이 닿는다. 성수동 수제화 디자이너의 대표 제품을 모아놓은 ‘성수 수제화 희망 플랫폼’에서는 가죽 열쇠고리나 팔찌 등을 만드는 가죽공예 체험도 할 수 있다. 김범철 성동구청 기업활성화팀장은 “올해 성수역을 발건강과 걸음의 중요성을 콘셉트로 하는 ‘성수구두테마역’으로 재조성할 계획”이라며 “지나가다 구두 만드는 모습을 직접 보고, 설명도 들을 수 있도록 명장의 작업장을 옮겨 만든 홍보관도 다음달 문을 연다”고 말했다.
골목길이 성수동의 부흥기를 다시 열고 있다. 낡은 골목에 생기를 불어넣는 것으로부터 지속 가능한 성장을 위한 도시재생이 시작되는 것은 물론이다. 모종린 연세대 교수는 자신의 저서 ‘골목길 자본론’에서 “골목 상권만이 지속가능한 골목문화를 창출하고 생존할 수 있다”며 “정부는 기본적인 환경 조성을 지원하고, 지역사회는 인재와 자원을 연결해 매력적인 골목문화를 만들어나가야 한다”고 제언했다.
권영은 기자 you@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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