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무라 시노부는 일제가 중국 동북부에 세운 괴뢰 만주국에서 푸순감옥 소장을 지냈다. 푸순감옥은 주로 조선인 항일운동가와 중국인을 가둬놓고 고문하던 곳으로 무덤에 가까운 곳이었다. 전쟁이 끝난 뒤 소련군에 전범으로 체포돼 시베리아 수용소를 전전하다 중국으로 인도된 오무라는 공교롭게도 자신이 소장으로 있던 푸순감옥에 수감된다. 푸순전범관리소로 이름이 바뀐 이 곳으로 오면서 오무라는 죽느니만 못한 생활을 하게 될 거라 예상하고 잔뜩 긴장한다.
관리소 생활은 오무라의 예상과 정반대였다. 전범들은 하루 세끼 쌀밥에 돼지고기볶음까지 먹는데 관리소 직원들은 겨우 조밥이나 수수밥을 두끼 먹는 데 그쳤다. 심지어 나중에는 어묵과 초밥까지 나왔다. 시간이 남아돌아 바둑, 장기, 화투, 마작을 하기도 했다. 저우언라이 당시 중국 총리가 ‘민족적 풍습이나 습관을 존중하라’며 ‘때리거나 욕하거나 인격을 모독해서는 안 된다’고 지시한 결과였다. 무기를 놓고 항복한 적의 절대 다수는 개조할 수 있다는 마오쩌둥의 사상을 일본인 전범에게도 적용했던 것이다. 일본군의 만행에 가족과 이웃을 잃은 관리소 직원들로선 이해하기 어려운 결정이었다.
관리소에선 자신의 잘못을 고백하고 상호 비판을 하도록 하는 강도 높은 인죄학습과 토론이 이어졌다. 몇몇 전범은 공개 집회에서 자신들이 저지른 잔혹한 전쟁범죄 행위를 낱낱이 고백했고, 일부는 극심한 스트레스를 이기지 못해 자살을 시도했다. 그러나 고통스러운 학습 과정 끝에 대부분은 일본 군국주의 교육의 폐해와 자신들이 저지른 범죄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됐다.
중국에서 풀려나 일본으로 돌아온 전범들은 ‘중국귀환자연락회’를 결성해 일본군의 중국인 학살, 생체 해부, 전시 성폭행, 세균전 실험 등 전쟁범죄를 세상에 알렸다. ‘중국에서의 일본인 전쟁범죄의 고백’이라는 부제가 붙은 수기집 ‘삼광’을 펴내기도 했다. 그러나 일본 사회는 이들에게 ‘빨갱이’란 딱지를 붙이며 멸시와 냉소로 일관했다. 귀환자들의 취직은 점점 어려워졌다.
중국귀환자연락회는 이에 굴하지 않고 활동을 이어갔다. 만주국에서 헌병으로 복무하며 수백 명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던 쓰치야 요시오는 일본으로 돌아와 과거 자신이 체포해 사망에 이르게 한 중국 항일운동가 장융싱의 딸 앞에서 “유족을 만나 사죄하지 않으면 나는 인간이 아니다”라며 무릎 꿇고 사죄했다.
나는 전쟁범죄자입니다
김효준 지음
서해문집 발행ㆍ452쪽ㆍ1만9,500원
한일 관계와 동아시아 평화 등의 주제에 천착해 온 언론인 출신 저자는 한국과 중국, 일본에서 발간된 수기와 회고록, 보고서, 정기간행물 등 사료를 모아 그간 국내에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던 ‘푸순의 기적’을 재구성했다. 책을 읽고 있노라면 수십 년이 지나도록 역사가 말하는 진실을 부정하거나 외면하고 있는 일본의 현실이 더욱 답답하게 느껴진다.
고경석 기자 kav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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