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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해야지”“성적 올랐니” 상처 주는 말, 설엔 하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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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해야지”“성적 올랐니” 상처 주는 말, 설엔 하지 마세요

입력
2020.01.24 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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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문가 5인이 말하는 ‘덕담의 기술’] 

 “오느라 힘들었지” “친정 가야지” 공감을 전하세요 

[저작권 한국일보]일러스트=박구원 기자
[저작권 한국일보]일러스트=박구원 기자

차례상, 성묘, 세뱃돈… 민족 최대 명절 설을 앞두고 준비할 것이 산더미다. 정작 중요한 것은 따로 있다. 형식에 치우쳐 잊힌 지 오래지만, 한 해의 기운을 불어넣어주는 ‘덕담(德談)’이다. 가만 생각해보면 이제껏 지내온 숱한 명절의 괴로운 추억은 가까운 이들이 던진 칼날 같은 말 때문이 아니었던가. 종일 부엌에 서 있어야 하는 수많은 며느리들을 힘들게 하는 것은 노동보다 그들의 수고를 당연히 여기는 가족의 말이다. 취업과 결혼을 앞둔 조카들에게 친척과 만나는 자리가 가시방석인 것도 장난치듯 던지는 말 한 마디 때문이다. 그렇다. 번번이 설 명절이면 ‘아무말 대잔치’가 열렸다. 올해 설에는 가족들이 모여 따뜻한 덕담을 주고 받으며, 한 해의 안녕을 기원하는 설의 본질을 되살려 보는 것은 어떨까. 의학, 심리, 화법 등 각 분야 전문가들이 훈훈한 설을 보내기 위한 ‘덕담의 기술’을 귀띔했다.

[저작권 한국일보]일러스트=박구원 기자
[저작권 한국일보]일러스트=박구원 기자

 ◇조선시대에는 “새해 부자가 되었다지” 완료형으로 

덕담은 삼국시대 새해 첫날 임금과 신하가 서로 하례하는 궁중 의식에서 비롯된 것으로 전통적으로는 새해를 맞아 웃어른이 아랫사람에게 하는 인사말을 뜻한다. 조선시대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는 “원단(元旦)부터 사흘간은 남녀들이 왕래하느라 떠들썩하다. 길에서 아는 사람을 만나면 반갑게 웃으며 ‘새해에 안녕하시오’하고 서로 좋은 일이나 경사를 들추어 축하한다”고 나와 있다. 정연학 한국민속박물관 학예연구관은 “삼국시대 때부터 설에 덕담을 주고 받은 기록이 남아 있다”라면서 “과거에는 웃어른이 아랫사람의 세배에 대한 답례로 덕담을 건넸다”고 설명했다.

덕담의 형식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조선시대에는 정황에 따라 “새해에는 부자가 되었다지” “올해는 장가갔다지” “올해 꼭 합격했다지” 등의 완료형 덕담을 건넸다. 정 연구관은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부자 되세요’ 등 명령형 어감보다는 격려하면서 기원하는 의미로 완료형을 썼다”고 설명했다. 문인 최남선(1890~1957)도 새해 덕담은 “’그렇게 되라’고 축원하는 것이 아니라 ‘벌써 그렇게 되었으니 고맙다’고 경하하는 데 의미가 있다”고 밝힌 바 있다. 과거에는 덕담의 내용이 주로 생자(生子), 득관(得官), 치부(致富) 등에 관한 것이었다. 정 연구관은 “조상들이 아랫사람에게 좋은 일을 기원해주면서 어감까지도 고려했던 마음을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라면서 “형식은 자유롭게 하되 따뜻한 마음이 느껴지도록 하는 것이 덕담의 기본이었다”고 부연했다.

[저작권 한국일보]일러스트=박구원 기자
[저작권 한국일보]일러스트=박구원 기자

 ◇덕담 가장한 평가, 사적인 질문은 삼가야 

“올해는 결혼해야지” “형제자매가 있는 게 좋으니 둘째도 있어야지” “올해는 좋은 데 취직해서 부모님께 효도해야지” 등 부담스러운 덕담도 실은 상대를 끔찍이 생각해서 하는 말일 수 있다. 덕담을 건넨 이의 권위와 체면, 깊은 마음까지 헤아려 한 귀로 듣고 흘리며 꾹꾹 참기 마련이지만, 불편하고 괴로운 감정이 두고두고 밀려드는 건 어쩔 수 없다.

전문가들은 덕담이 오래도록 남아 상처가 되는 이유는 덕담을 가장한 평가가 담겨 있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박재연 리플러스 인간연구소 소장은 “고마운 마음을 나누는 것이 덕담인데 고마운 마음이 아니라 평가하는 생각을 전하는 데서 덕담이 악담으로 바뀐다”며 “아무리 좋은 평가라도 상대를 가르치게 되고, 조언하게 돼 듣는 상대가 불편해지기 마련이다”고 설명했다. 그는 덕담을 할 때 소위 피해야 할 3종 세트로 조언과 평가, 비난을 꼽았다.

예를 들어 조카에게 삼촌이 “돈도 잘 벌고 능력도 좋은 우리 조카, 결혼은 안 해도 되지 뭐, 요즘은 능력 있는 게 최고지”라고 말했다면 덕담일까. 박 소장은 “조카가 출중한 능력을 갖춰 삼촌으로서 고맙고 뿌듯하다는 의도만 분명하게 전달하면 되는데 굳이 조카가 결혼을 하지 않은 데 대한 평가를 곁들여 덕담으로 보기 어렵다”고 했다. 대신 “삼촌이 네가 벌써 승진도 하고, 연봉도 올랐다는 얘기 듣고 참 기뻤다. 쉬운 일이 아니었을 텐데, 축하한다”고 한다면 한결 낫지 않을까.

덕담과 평가의 구분이 어렵다면 일단 상대가 부담스러워할 사적인 주제는 아예 피하는 게 좋다. 명절이면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결혼, 출산, 취업, 성적 등이 대표적이다. 오은영 소아정신의학과 전문의(박사)는 “전통 사회에서는 때가 되면 결혼하고, 아이 낳고, 관직에 오르는 것이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행복이었지만 요즘은 시대가 달라졌고, 다양한 가치를 추구한다”며 “결혼, 출산, 취업 등 아주 사적인 것을 물어보는 것을 덕담이라고 착각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여자친구 있니” “성적은 좀 올랐니” “살 많이 빠졌네” 등 연애, 성적, 외모 등도 지극히 사적인 주제에 속한다. 김범준 커뮤니케이션 전문가는 “결혼, 출산, 취업 등은 자기 의지대로 할 수 있는 게 아닌 일이어서 다양한 사정이 있기 마련”이라며 “자주 만나거나 잘 알지도 못하면서 획일적인 기준으로 상대에게 덕담을 해서는 안 된다”고 지적했다.

전문가들은 한 목소리로 덕담을 하기 전에 상대방의 입장과 기분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오은영 박사는 “덕담은 상대가 들었을 때 기분이 좋을 얘기들이어야 한다”며 “행복해라, 건강해라, 즐겁게 살아라 등 누구나 들었을 때 기쁘고 즐거운 말을 건네는 게 기본”이라고 말했다. 오수향 SHO대화심리연구소 소장은 “대부분이 10대에게는 성적을, 20대에게는 취업을, 30대에게는 결혼을 주제로 덕담을 시작한다”라며 “내가 묻고 싶은 말 대신 상대가 듣고 싶은 말을 먼저 떠올려야 한다”고 조언했다.

[저작권 한국일보]일러스트=박구원 기자
[저작권 한국일보]일러스트=박구원 기자
[저작권 한국일보]일러스트=박구원 기자
[저작권 한국일보]일러스트=박구원 기자

 ◇덕담의 세 가지 필수 요소 ‘감사, 인정, 공감’ 

결혼, 출산, 취업, 성적, 외모 등 아무말 잔칫상에 오르는 단골 소재들을 제외하면 도통 할 얘기가 없다는 웃어른들의 불만이 속출하기 마련이다. 명절 내내 함께 있는 자녀, 며느리, 사위에게 건강 타령만 하기에는 멋쩍고, 오랜만에 만난 반가운 사촌과 조카들에게 그간의 안부를 묻지 않을 순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덕담의 목적이 상대에게 듣기 좋은 얘기를 해야 하고, 상처를 주어서는 안 되는 것은 맞지만 친지 간의 따뜻한 격려와 응원조차 원천봉쇄하자는 얘기는 아니다.

성공적인 덕담을 하려면 일단 ‘고맙다’로 시작하는 게 좋다. 한국에서는 대체로 웃어른들이 아랫사람에게 고맙다고 표현하기를 주저한다. 아랫사람이 웃어른을 공경하는 게 당연시됐던 유교문화가 뿌리깊게 남아 있어서다. 특히 이 방법은 전통사회와 현대사회 간 개념 격차가 가장 큰 시어머니와 며느리 사이에서 큰 효과를 발휘할 수 있다.

오은영 박사는 “전통사회에서 며느리는 출가외인이라 불리며 ‘시집 식구’로 인식됐지만, 요즘에는 며느리가 ‘남의 집 귀한 딸’”이라며 “상대를 고려해 며느리에게 덕담을 할 때는 고맙다고 표현하는 것이 좋다”고 말했다. “혼자 해오던 일을 네가 도와주어 무척 고맙다.” “네가 고생하는구나, 정말 고맙다.” 일단 고맙다는 말로 시작하면 그 뒤는 한결 수월해진다. “음식은 간단히 하자”, “어서 친정에 가야지”, “아들도 거들어라” 등 구체적인 방식으로 고마움을 표현하면 덕담 한 마디로 관계가 더욱 돈독해지는 효과까지 볼 수 있다. “네가 별 탈 없이 잘 지내줘서 고맙다” “이렇게 와 줘서 고맙다” “행복하고 건강해 보여서 고맙다” 등 며느리뿐 아니라 사위, 조카, 사촌 등 명절에 만나는 누구에게나 적용 가능하다.

상대를 인정하고, 공감하는 것도 중요한 덕담의 원칙이다. “여기까지 오느라 힘들었지” “차례 준비하느라 고생했지” “길 막히지는 않았니” “공부하느라 많이 애썼지” 등 상대의 입장을 알아차려 공감해주는 것만으로도 덕담의 첫 단추를 잘 꿸 수 있다. 정병태 커뮤니케이션 전문가는 “먼 친척끼리는 이름 한번 제대로 부르는 것만으로도 분위기가 훈훈해질 수 있다”라며 “구체적인 조언 대신 상대의 입장을 공감해주는 것으로도 덕담은 충분하다”고 설명했다.

집안 꼰대가 되지 않기 위한 덕담의 기술은 줄줄 외운다고 저절로 툭 튀어나오지 않는다. 평소에 스스로 권위를 빌어 상대의 삶에 무분별하게 관여하고, 획일적인 잣대로 상대를 바라본 것은 아닌지 진심으로 깊은 반성이 선행돼야 한다. 그러고 난 뒤에 기술을 연마해도 늦지 않다. 오수향 소장은 “평소 가족과 상대를 존중하고 배려하는 이들은 덕담의 기술을 따로 습득하지 않아도 성공적으로 덕담을 할 수 있다”며 “덕담을 건네기 전에 왜 덕담을 하는지 한 번만 더 생각해보면 덕담인지 아닌지 스스로 구별할 수 있다”고 말했다.

강지원 기자 stylo@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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