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가을 태국 여행 때 사 온 라텍스 담요 위에 풀썩, 다시 누웠다. 그러니까 지금 내가 깔고 덮고 베고 자는 이 모든 침구는 150년 전 헨리 위캄이 밀수한 고무나무 씨앗에서 한 스푼 떠낸 클론들인 셈이다. ©게티이미지뱅크

멍하니 앉아서 간밤에 깔고 잔 포슬포슬한 담요와 베개를 쓰다듬었다. 모처럼 시간이 날 때, 지금 내 곁의 물건이 어디서 왔는지를 따져보는 일은 그 자체로 유익하다.

하필 이 남자의 생애가 떠오른 건 열 달 넘게 편집작업에 매달리고 있는 찰스 만의 저작 덕이다. 비상한 머리에다 넘치는 열정으로 신세계를 누비며 쇠락한 가문을 일으키려 발버둥 쳤던 남자. 하지만 손대는 사업마다 실패하며 착한 아내에게까지 끝내 버림받고 만 남자. 누군가는 그를 영국 근대화의 일등공신이라 치켜세우고, 다른 누군가는 기발한 벤처를 말아먹는 데 천부적 소질을 지녔던 인간이라고 비아냥댄다.

헨리 알렉산더 위캄은 1846년, 런던의 명망 있는 변호사와 모자공장 사장의 딸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런데 네 살 나던 해에 아버지가 콜레라로 사망하면서 상황이 요동쳤다. 한 계단 한 계단씩 추락했던 사회적 신분 사다리를 단시간에 점프하기 위해 필요한 건, 다른 무엇도 아닌 돈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바야흐로 영국이 산업혁명을 주도하며 패권적 식민지 개척에 열을 올리던 그 시기, 신세계에서 특수작물을 심어 큰돈을 벌었다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신문과 잡지에 오르내렸다. 당대의 벤처였다. 솔깃해진 위캄은 가족들을 이끌고 브라질로 날아갔다. 거기서 마니오크 농장을 개척했으나 사랑하던 어머니와 누이를 전염병으로 잃고 사업을 접어야 했다. 포기할 수 없었던 그는 오스트레일리아로 날아갔다. 담배를 심었으나 실패. 그는 다시 온두라스에 가서 바나나 벤처를 시도했다. 이마저 말아먹었지만 여기서 멈출 수가 없었다. 그가 뉴기니 앞바다에 있는 무인도 칸플릭트 제도로 가서 코코넛을 심겠다고 했을 때, 그동안 불평 한 마디 없던 아내가 마침내 폭발했다. ‘코코넛과 나, 둘 중 하나만 선택해요.’ 위캄은 시원하게 코코넛을 선택했고, 두 번 다시 아내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고 한다. 말년에 위캄이 작위를 받고 은단추가 달린 연미복 차림으로 연단에 서서 고통에 굴하지 않은 자기 생애를 자랑하던 때에도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고 하니, 그 남자로 인해 그녀가 겪어야 했던 궁핍과 고통의 강도를 대강 짐작할 수 있다.

그렇게나 갈망하던 위캄의 꿈을 실현해 준 건, 다소 노골적으로 표현하자면 ‘도적질’이었다. 브라질에서 절치부심 재기를 모색하던 그에게 재밌는 소식이 들려왔다. ‘영국 산업계의 항구적이고 안정적인 고무 공급망 확보를 위해’ 고무 씨앗을 밀수해오는 사람에게 정부가 돈을 지급한다는 내용이었다. 때마침 고무나무 원산지인 아마존 지역에 머물던 위캄은 재빨리 행동에 나섰다. 주변 미국인들의 도움으로 약 7만개의 고무 씨앗을 주워 모은 그는 런던으로 돌아왔다. 그 씨앗은 곧바로 영국 왕립식물원에 심겼고, 여기서 싹을 틔운 묘목들이 아시아에 있는 식민지 각국으로 보내져 무럭무럭 자라났다. 일이 이렇게 되자 뒤늦게 수선을 떨며 위캄을 ‘때려죽일 놈’으로 몰아붙인 건 브라질이었다. 자국의 소중한 산림자원을 허락도 없이 밀반출한 위캄을 두고 브라질인들은 지금도 ‘쓰레기 같은 상도둑놈’ 혹은 ‘산업스파이’의 원조라며 쌍심지를 켠다. 하지만 그들 역시 남 욕할 처지는 못 되는 것이, 다른 나라 외교관 부인을 꼬셔서 밀반입한 세 그루 커피 묘목의 후손들이 한 세기 넘게 브라질 경제를 떠받쳐 오고 있잖은가? 어차피 피장파장이다.

지난 가을 태국 여행 때 사 온 라텍스 담요 위에 풀썩, 다시 누웠다. 그러니까 지금 내가 깔고 덮고 베고 자는 이 모든 침구는 150년 전 헨리 위캄이 밀수한 고무나무 씨앗에서 한 스푼 떠낸 클론들인 셈이다. ‘기절 베개’의 폭신함에 젖어 나른해진 마음으로, 나는 다만 인류사의 내밀한 이야기들이 내 삶 곳곳에 스며들어 있음을 실감할 뿐이다.

지평님 황소자리 출판사 대표

공감은 비로그인 상태에서도 가능합니다

web_cdn 저작권자 © 한국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피니언 최신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