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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료 기다리다 죽고, 연금 없어 자살… 존엄 찾으려 존엄 광장에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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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료 기다리다 죽고, 연금 없어 자살… 존엄 찾으려 존엄 광장에 온다”

입력
2020.01.16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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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적대사회, 신음하는 지구촌] <5> 나는 왜 시위를 하는가 

지난해 11월 칠레 수도 산티아고 중심지 리베르타도 거리에서 시민들이 세바스티안 피녜라 대통령 하야를 요구하며 시위를 벌이고 있다. 교민 박수향씨 제공
지난해 11월 칠레 수도 산티아고 중심지 리베르타도 거리에서 시민들이 세바스티안 피녜라 대통령 하야를 요구하며 시위를 벌이고 있다. 교민 박수향씨 제공

칠레 수도 산티아고의 중심지 가운데서도 관광지로 유명한 바케다노 광장. 이탈리아 광장(플라자 이탈리아)이라고도 불리는 이곳은 지난해 10월 대규모 시위가 발생한 이후 시위의 메카가 됐다. 극단의 불평등을 참지 못하고 일어선 칠레 국민들에게 지금은 ‘플라자 디그니닷(Plaza Dignidad)’이라는 이름이 더 통용되는 장소다. 우리말로 바꾸면 ‘존엄 광장’이다. 시위에 나선 칠레 국민들이 인간다운 삶의 보장을 정권에 요구하고 있다는 얘기다. 시위가 격화하던 지난해 11월 19~25일 산티아고를 찾은 기자는 거의 매일 ‘존엄 광장’을 찾아 정부를 향해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 젊은 시위대와 만났다. 이들의 생생한 말을 통해 ‘남미에서 제일 잘 사는 나라’로 꼽히는 칠레의 이면을 들여다봤다.

 ◇ “먹고 자고 교육받기 위해 빚 져야” 

제 이름은 가브리엘 몰리나입니다. 25살입니다. 제가 매일 ‘존엄 광장’을 찾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부당함에 맞서기 위해서죠. 현재 칠레 국민 대부분은 월말까지 버티기에는 부족한 일당을 받으며 살고 있습니다. 먹고, 자고, 공과금 내고, 교육받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빚을 져야 하는 상황입니다. 더불어 국영의료보험(포나사ㆍFONASA)이 적용되는 공공 의료는 시스템으로써 가치가 없을 정도로 열악합니다. 1년에 수천명이 진료를 기다리다가 죽습니다. 이를 피하려 사람들은 위급한 병을 치료받으려 사립병원에 가는데 너무 비싸 또 빚을 지게 됩니다. 치과에서 이 하나를 빼는 비용이 25만페소(한화 약 16만원)에 달합니다. 연금제도(칠레는 연금도 민영화했다)도 문제가 많습니다. 칠레 자살자 가운데 가장 큰 비중을 80세 이상 노령층이 차지합니다. 한평생 열심히 일하고도 편히 쉴 수 있을 만큼 연금이 나오지 않기 때문이죠. 50년 동안 일하신 제 할아버지의 연금이 월 9만페소에 불과합니다. 이 돈으로 약을 사면 음식을 못 사고, 음식을 사면 약을 구하지 못합니다. 최근 몇 년 동안 정부에 이런 점을 개선해달라고 요구했지만,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국민들이 일어선 이유입니다. 시위 상황을 더욱 악화시킨 것도 정부입니다. 군경이 폭행, 강간, 살인을 저지르면서 국민들의 입을 닫으려 합니다. 그럼에도 아무런 처벌을 받지 않는다는 것 또한 저를 분노케 합니다. 저는 억압받는 사람들의 권리를 위해, 합당한 연금을 위해, 모두에게 적용되는 보건시설과 교육을 위해 시위합니다.

가브리엘라 몰리나
가브리엘라 몰리나

 ◇“10대 가문이 나라 좌지우지… 계급사회 타파해야” 

저는 23살 공학도 빅토르 이게라입니다. 칠레는 교육비가 너무 많이 들고 평등하지 않습니다. 돈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교육의 질이 달라집니다. 사교육은 돈이 너무 많이 드는 반면, 공교육은 거의 무너졌습니다. 정부는 이를 방관해왔습니다. 대학에 많이 들어가지 못하지만 어렵게 들어가도 학자금 대출을 받아야 하고 졸업할 땐 대부분 빚을 지게 됩니다. 빚을 진 채 대학을 나서면 일할 곳을 찾기 힘듭니다. 대기업 등 좋은 직장은 있는 사람들끼리만 공유됩니다.(칠레는 대기업 공채가 없다고 한다.) 이곳에선 가문이 좋지 않거나 돈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허드렛일만 해야 합니다. 좋은 집안끼리, 부유층끼리 서로 연결되는 피투토(Pitutoㆍ우리나라의 혈연, 지연, 학연 등이 모두 합친 개념)가 없으면 절대 좋은 직장을 가질 수 없습니다. 칠레에서는 10대 가문이 국부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이들 가문들이 정치와 경제를 좌지우지 합니다. 가문 사회를 이루고 있는 셈입니다. 이들은 1800년대부터 잘 살아왔습니다. 200년 넘게 이들은 무너지지 않았고, 그래서 서민들은 부를 쌓을 수 없는 구조입니다. 세바스티안 피녜라 대통령(항공사 라탐 대주주)도 사업가 출신이잖아요. 소수만이 잘 사는, 기득권을 뺏기지 않을 나라를 만들어 왔습니다. 좌파, 우파 상관 없이 자기들끼리만 사는 나라를 만든 겁니다. 성(famaily name)으로 사람을 구분 짓고 평가하는 사회가 됐습니다. 그나마 어렵게 살다가 부를 쌓은 사람들은 대부분 군 출신으로 독재자 피노체트가 광산, 수도, 전기, 연금 등을 민영화하면서 하나씩 받은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회가 지속되면 안 되는 것 아닌가요. 저는 그래서 시위에 나서고 있습니다.

 ◇“새 헌법 통해 국민 권리 지켜지는 나라를” 

저는 23살 나탈리아 후에르타입니다. 저는 현재 칠레의 정치ㆍ경제ㆍ사회 시스템으로는 모든 국민들이 질 좋은 삶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에 시위를 합니다. 우리는 편견 가득하고, 남성 우대이며, 불공평하고, 계급 차별하는 나라에 살고 있습니다. 정부는 인권이라는 개념이 없습니다. 국민을 보호해야 할 정부를 우리는 가지지 못했습니다. 사람들이 병원 진찰을 기다리다 죽고, 터무니없는 벌이로 빚을 지며 살고, 필수적인 수도ㆍ전기를 터무니 없이 비싸게 이용하고 있습니다. 노인들은 죽기 전까지 일하지 않으면 안 되는 연금을 받습니다. 칠레 정치는 철학이 없습니다. 경영마인드로 나라를 운영합니다. 적은 비용으로 더 많은 것을 얻으려고 합니다. 그러니 국민들의 권리가 상업화되고 결국 돈이 있는 사람들만 존중을 받고 없는 사람들은 물건취급을 받게 된 것입니다. 인간적이지 못한 시스템입니다. 가난이라는 수렁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은 반면 나라는 성장해왔습니다. 그 성장의 열매는 오직 부자들에게만 돌아갔습니다. 이들의 부는 많은 국민들을 착취해 얻는 것입니다. 정부는 그 착취의 공범입니다. 제가 살아오면서 이렇게까지 많은 시민들이 광장에 모이는 모습을 본 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정부는 우리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국민들이 직접 참여한 헌법이 만들어져야 합니다. 새 헌법은 정부가 국민들에게 뭘 해야 하는지를 규정할 것입니다. 이를 통해 모든 국민들의 존엄과 권리가 지켜져야 합니다. 새 헌법이 좋은 변화들을 가져올 것으로 기대합니다. 그 결과가 50년 후에 나올지라도 저는 다음 세대를 위해서라도 계속 싸울 것입니다.

산티아고=이대혁 기자 selected@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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