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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은 예외가 아닌 관행” 금욕주의 정권 위선 들춘 여성들의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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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은 예외가 아닌 관행” 금욕주의 정권 위선 들춘 여성들의 증언

입력
2020.01.10 04:40
수정
2020.01.11 02:22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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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들 질문에서 영감 받아 ‘시녀 이야기’ 15년 후 다뤄

중세 가부장제 부활한 길리어드… 미덕 이면에 감춰진 악행 폭로

신(神)은 왜 남성인가. 결과적으로 진보는 세속화이자 여성 해방이었다. 그러나 늘 세상이 골고루 전진하기만 하는 건 아니다. 시간이 더디게 흐르는 곳이 반드시 있고, 본래 신의 세계를 마음에 품은 이들은 세계 구석구석에서 언제나 돌아갈 기회를 노리고 있게 마련이다.

캐나다 출신 소설가 마거릿 애트우드(81)를 거장의 반열에 올려 놓은 ‘시녀 이야기’(1985)는 중세 가부장제 신정(神政) 국가가 부활한다는 설정이 토대다. 세속화된 서구 사회 가운데 가장 종교적이란 평가를 받는 미국이 배경이니 딱 맞아떨어지기도 한다. 전 지구적 전쟁과 공해, 성병 탓에 출산율이 급감하며 사회가 혼란에 빠진 틈을 타 17세기 뉴잉글랜드 청교도 전통을 신봉해 온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이 정권을 잡는다는 상상으로부터 이야기는 전개된다.

여성을 생식 도구로만 보는 전체주의 신정 국가가 배경인 마가릿 애트우드의 소설 '시녀 이야기'는 2017년 미국 온라인 동영상 서비스 '훌루'에 의해 TV 드라마로도 만들어졌다. 드라마의 한 장면. 훌루 제공
여성을 생식 도구로만 보는 전체주의 신정 국가가 배경인 마가릿 애트우드의 소설 '시녀 이야기'는 2017년 미국 온라인 동영상 서비스 '훌루'에 의해 TV 드라마로도 만들어졌다. 드라마의 한 장면. 훌루 제공

가까운 미래 저 사회에서 여성은 ‘다리가 두 개인 자궁’일 뿐이다. 출산 도구에 불과한 셈이다. 기능을 기준으로 체제가 여성을 재분류하는데, 지배 엘리트의 ‘씨받이’ 노릇을 하도록 관리되는 그룹이 ‘시녀’다. 이런 기괴한 모습의 디스토피아를 다룬 ‘시녀 이야기’는 2017년 미국의 온라인 동영상 서비스 ‘훌루’가 TV 드라마로 제작, 큰 인기를 끌었고 ‘미투’ 캠페인과 페미니즘 운동 확산에 동력을 제공했다. 시녀의 유니폼인 흰색 모자에 붉은 옷은 페미니즘 운동의 상징처럼 활용됐다.

이번에 국내에 번역 출간된 애트우드의 ‘증언들’은 ‘시녀 이야기’ 이후 15년 뒤 벌어지는 일들을 그린 속편이다. ‘시녀 이야기’가 시녀 오브프레드를 중심으로 그 주변에서 벌어지는 일에 집중했다면 ‘증언들’은 여성 3명의 증언을 담았다. 이들의 증언을 통해 미국 주요 지역을 장악한 전체주의 정권 ‘길리어드’ 내ㆍ외부의 상황을 드러낸다. 애트우드는 “‘시녀 이야기’ 독자들의 질문이 영감을 줬다”며 “‘증언들’은 길리어드가 어떻게 붕괴했느냐는 질문의 답”이라고 했다.

장르를 따지자면 스릴러에 가깝다. 주인공은 길리어드의 붕괴를 촉발시키는 정권 내부 스파이 리디아 ‘아주머니’다. 길리어드에서는 문자가 남성의 독점 소유물인데, 체제 유지를 돕기 위해 결혼이 금지된 아주머니 그룹만 글과 책을 가질 수 있다. 길리어드 집권 이전 판사였던 리디아는 살아남기 위해 길리어드에 부역하고, 그 대가로 아주머니 수장이 돼 사령관과 권력을 분점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생존 본능에 따랐던 자신의 행동과 길리어드의 존재를 용인하지 못하게 되고, 체제 붕괴를 기도하며 음모를 꾸민다. 길리어드를 탈출해 저항 세력으로 변신한 시녀 오브프레드의 딸들이지만 길리어드 안팎에서 따로 자란 아그네스와 니콜 자매는 정권과 운명을 함께하는 리디아의 자해적 폭로를 돕는 조력자다.

매년 노벨문학상 유력 후보자로 거론되는 캐나다 작가 마거릿 애트우드. 한국일보 자료사진
매년 노벨문학상 유력 후보자로 거론되는 캐나다 작가 마거릿 애트우드. 한국일보 자료사진

길리어드에서 여성은 철저하게 남성의 부속물로만 존재한다. 특히 시녀는 자기 이름을 잃고 자신이 낳는 아이의 아버지이자 주인의 그림자가 된다. 남성 주인의 이름 앞에 소유를 의미하는 ‘오브(of)’를 붙이는 작명 방식이 상징적이다. 가령 오브프레드는 ‘프레드의 것’이라는 뜻이다.

여성은 특히 수동적이다. 아주머니들은 소명을 강조한다. “운명에 만족하고 반항하지 마라. 전쟁에서 희생하는 남자들과 다른 방식으로 여자들은 희생해야 한다. 세상이 나뉜 것이다.” 중세의 귀환이다. “아마 이유가 있을 거야”, “우리 손을 떠난 일이야” 같은 아그네스의 말이 그 결과다.

리디아가 폭로하려 하는 길리어드 비밀의 핵심은 금욕적인 전체주의 정권 엘리트의 위선이다. 그들은 극단적 통제로 집단을 구속하며 피지배 계층에 규범 준수를 강요하지만 자기들끼리는 은밀하게 일탈을 일삼는다. 아그네스는 “길리어드에서 거짓은 예외가 아니라 통상적 관행”이라며 “미덕ㆍ순수의 외면 밑에서 길리어드가 썩어가고 있었다”고 한탄한다.

일어나지 않은 일은 쓰지 않는다는 게 애트우드의 원칙이다. 때문에 그에게 소설은 예측이 아니라 관찰이다. 예를 들어 길리어드의 시녀 제도는 아리안족 순수 혈통을 전승하려는 의도의 나치 인종 실험 프로그램 ‘레벤스보른(생명의 원천)’이 모델이라고 한다.

증언들

마거릿 애트우드 지음ㆍ김선형 옮김

황금가지 발행ㆍ600쪽ㆍ1만5,000원

여성 3명의 증언이 나중에 발견된다는 설정은 여성을 소외시키고 침묵시키려는 남성 중심 공식 역사에 대한 항의의 뜻도 있는 듯하다. 성경 사전에 나오는 길리어드의 정의 중 하나는 ‘증언의 언덕’이다. 후반으로 갈수록 화자 교체가 빈번해지면서 읽는 데 속도감이 붙는다.

‘증언들’은 지난해 10월 애트우드에게 세계 3대 문학상 중 하나인 부커상 공동 수상의 영예를 안겼다. ‘눈먼 암살자’(2000)로 부커상을 받은 지 19년 만에 두 번째 수상이었다. 이 소설은 지난해 출간 이후 미국과 영국에서 주요 베스트셀러 차트 1위를 휩쓸었고, 데일리 텔레그래프와 파이낸셜타임스, 가디언 등이 올해의 책으로 선정했다.

권경성 기자 ficcione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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