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 전도연
※ 한국영화가 지난해 탄생 100년을 맞았습니다. 새로운 100년을 시작하며 영화보다 재미있는 한국영화 100년의 이야기를 영화전문가를 통해 매주 토요일 <한국일보>에서 들려드립니다.
전도연(47)이 처음부터 배우를 꿈꿨던 건 아니었다. 창덕여고 3학년 때 청소년 잡지 응모에 당첨돼 상품을 타러 잡지사를 찾아간 것이 생각지 않게 인생을 바꾸는 계기가 됐다. 그 자리에서 잡지의 표지 모델로 발탁된 전도연은 1990년 “깨끗해요”라는 광고 카피를 내세운 존슨즈 베이비 로션 광고의 CF 모델로 데뷔해 얼굴을 알렸고 연이어 초콜릿 미니쉘 CF를 찍으며 인지도를 얻기 시작했다. “TV를 통해 나 자신을 확인하고 대중에게 인식되는 것이 즐거웠어요. 아주 단순한 시작이고 동기였죠.”
국어시간에 희곡 읽는 것도 부끄러워 잘 하지 못했을 만큼 수줍음 많은 성격이었던 전도연은 모델 활동을 하면서 조금씩 카메라 앞에 서는 일에 매력을 느끼게 됐다. 그러나 배우가 돼야겠다는 진지한 결심이 있던 건 아니었다. 서울예전(현 서울예술대) 진학 때 친구를 따라 원서를 냈는데, 뭘 할 줄 아냐는 면접관의 질문에 대뜸 “할 줄 아는 거 없다”고 답했다고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배우를 지망했던 친구가 떨어진 대신 전도연이 붙었다.
◇연기 욕심 없던 신인 시절
졸업 후 MBC 탤런트 공채 시험에 떨어진 전도연을 우연의 손길이 붙잡아 배우의 길로 이끌었다. CF 모델로 활동하던 모습을 인상적으로 기억하고 있던 방송국 PD의 추천으로 1992년 TV드라마 ‘우리들의 천국’(1990~1994)의 2기 배역진에 합류하게 된 것이다. 최진실 염정아 유호정 한석규를 스타의 반열로 올렸던 인기 드라마에 출연해 최진영의 상대역을 연기했고, 이후 드라마 ‘사랑의 향기’와 ‘종합병원’(1994) ‘사랑은 블루’(1995) 등에 조연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전도연의 주가가 금세 치솟은 건 아니었다. 동안이었지만 비슷한 연배의 청춘 스타들에 비하면 수수하고 평범한 인상에, 연기력에 있어서도 아직 특기할 면모를 보여주지 못하던 시절이었다.“데뷔 초에는 배우를 오래 하리라고 생각한 적이 없었어요.”
영화사 신씨네에서 영화 ‘구미호’(1994)를 준비하고 있을 때의 일이다. 신철 신씨네 대표는 전도연에게도 오디션을 보러 오라는 전화를 넣었고, 만난 자리에서 영화의 내용을 대략 설명하고는 테스트 촬영을 요청했다. 이때 전도연의 대답은 “안 되겠는데요. 저 약속 있어서 가야 해요”였다. 이후 연기에 절실함을 느끼게 된 전도연은 점점 의욕적으로 배역에 임했다. KBS2 드라마 ‘젊은이의 양지’에서는 하희라가 맡은 주연 임차희의 동생인 문학소녀 임종희로 출연했는데, 이때 “밥을 먹자”며 전산 PD를 찾아가 배역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피력했다고 한다. 30분쯤으로 생각했던 이야기는 5시간 동안 이어졌고 “맹랑한 신인이란 생각이 들었다”는 전 PD는 “이정도 욕심이면 잘할 거라는 믿음”에 전도연의 비중을 크게 늘렸다.(한겨레신문 2015년 5월 21일)
◇‘접속’으로 탄생한 멜로의 여왕
KBS1 일일연속극 ‘사랑할 때까지’(1996)에 출연할 때 아버지 역이었던 중견배우 박근형은 “네가 무슨 말 하는지 하나도 안 들린다, 네가 무슨 배우냐 앵무새지!”라며 연습시간 때 호되게 꾸짖었다고 한다. 그때까지 본인의 연기를 모니터링해 본 적이 없었던 전도연은 녹화된 영상을 반복해 보면서 부족한 점을 찾아낸 뒤 평소의 빠른 말투를 또렷하고 천천히 말하도록 교정하는 노력을 기울여 종국에는 박근형에게 인정 받기에 이르렀다. 좋은 배우가 돼야겠다는 야망을 품은 전도연은 다수의 드라마에 출연하고 예능프로그램 MC를 맡는 와중에 1997년 4월 2일 서울 대학로 하늘땅 소극장에서 공연한 ‘리타 길들이기’로 연극 무대에도 도전하며 연기 내공을 착실히 다져나갔다. 대배우의 싹은 조용히 움트고 있었다.
전도연의 스크린 데뷔작은 장윤현 감독의 멜로영화 ‘접속’(1997)이었다. 사실 감독을 비롯한 제작진에게 있어 전도연은 이 작품의 최우선 섭외 대상이 아니었다. 그러나 시놉시스 단계에서부터 전도연은 ‘여인 2’ 수현 역에 관심을 보이며 배역에 대한 강한 자신감을 내비쳤고, ‘사이버 연애’라는 연기의 맥을 정확히 짚고 있었다. 당시 제작사 명필름의 심보경 이사 또한 드라마 ‘젊은이의 양지’에서 선보인 연기를 눈여겨보며 “전도연만큼 멜로 연기를 잘할 수 있는 배우는 없다”고 확신하면서 우여곡절 끝에 전도연을 캐스팅하게 된다. PC통신 대화를 통해 서로 간에 친밀감을 키워가는 두 남녀를 그린 영화는 서울 관객 67만명이라는 흥행을 기록하며 1990년대 한국 멜로영화의 대표작이 됐고, 전도연은 일약 스타의 반열로 뛰어올랐다. 이 작품에서 함께 연기한 한석규는 전도연을 두고 “연기에 대한 본능적인 끼와 감성이 놀랍다”며 감탄했다고 한다. 아니나 다를까 그 해 제35회 대종상영화제와 제18회 청룡영화상 신인여우상은 모두 전도연의 차지였다.
◇완벽주의가 일군 쾌거
“‘해피엔드’(1999)를 통해 ‘아, 나는 배우구나’라는 사실을 스스로 발견하고 인정했어요. 촬영 전 노출장면이 있다는 사실을 미리 어머니께 말씀 드리던 중에 ‘엄마 난 배우고, 딸 시집 잘 보내려고 배우 시킨 거 아니잖아’하는 말이 저도 모르게 튀어나왔어요. 평소에 준비한 말도 아니고 설득할 요량도 아니었는데 그 이야기하고 내 방에 돌아와 얼마나 대견하던지! ‘해피엔드’는 전도연이 전도연에게 ‘넌 이런 배우’라고 말해준 영화예요.”(영화주간지 씨네21 2007년 5월 18일호)
영화 ‘약속’(1998)의 의사 희주와 ‘내 마음의 풍금’(1999)의 소녀 홍연 등을 연기하며 ‘멜로의 여왕’ 또는 ‘눈물의 여왕’이란 별명을 얻었지만 전도연은 멜로드라마의 여주인공으로 이미지가 고정되는 걸 원하지 않았다. 그의 다음 선택은 정지우 감독의 상업영화 데뷔작 ‘해피엔드’였다. 당시 영화의 제작자였던 심재명 명필름 대표는 “시나리오에 형광펜으로 색칠하고 포스트잇을 붙여가며 표지가 닳을 때까지 읽고 또 읽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고 회고한다. “정부를 만나기 위해 딸에게 수면제를 먹이고 늦은 밤 집을 나서는 여자”라는 다소 엽기적인 인물 설정은 쉬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었지만 인물이 느끼는 외로움과 공허함에 초점을 맞추고 배역에 몰입한 전도연은 노출 수위에 아랑곳 않고 내연남을 둔 유부녀 연기를 훌륭히 소화해냈다. ‘해피엔드’에서의 성숙한 커리어우먼 연기는 그 해 초 ‘내 마음의 풍금’에서 선보인 천방지축 소녀 연기와는 극단적인 대비를 이뤄, 전도연이 지닌 연기 스펙트럼이 얼마나 다채로운가를 입증했다.
이후 전도연의 행보에는 거칠 것이 없었다. 설경구와 공연한 ‘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2001), 박흥식 감독과 다시 호흡을 맞춘 ‘인어공주’(2004), 황정민과 짝을 이룬 ‘너는 내 운명’(2005)에서 ‘멜로의 여왕’다운 호연을 선보였다. 류승완 감독의 ‘피도 눈물도 없이’(2002)에서는 밑바닥 인생의 처절함을 진흙탕을 뒹굴고 액션을 마다 않는 악바리 근성으로 표현해내는가 하면, 처음으로 사극에 도전한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2003)에선 숙부인 정씨 역을 맡아 정반대로 절제된 말투와 몸짓으로 우아하고 기품이 넘치는 고전적인 한국여인상을 그려냈다. 연기에 관한 완벽주의 또한 대단한 것이어서 ‘인어공주’ 때는 한 겨울에 대역을 쓰지 않고 바다에 들어가 연기했고, 방은진 감독의 ‘집으로 가는 길’(2013)에선 역경을 겪고 단단해진 인물의 감정을 그리기 위해 법정 장면에서만 16번을 반복 촬영했다.
‘밀양’(2007)은 전도연의 필모그래피에서 큰 도전이었다. 순전히 이창동 감독과 송강호를 믿고 각본도 나오지 않은 시점에서 출연을 승낙했지만, 시나리오는 좀처럼 이해되지 않았고 이 감독이 주는 지시는 모호하고 불투명했다. 결혼하지 않은 상태에서 하는 엄마 연기가 가짜처럼 느껴져 촬영을 접는 일도 있었다. 혼란스러워하는 전도연에게 이 감독은 “그냥 네가 느끼는 대로 하면 된다”는 한마디만을 보태주었고, 그때부터 전도연은 자신이 이해한 주인공 신애의 심정과 그녀가 느끼는 고통을 온몸에 실어내기 시작했다. ‘밀양’은 2007년 제60회 칸영화제 경쟁부문에 진출했고, 5월 27일 뤼미에르극장에서 열린 폐막식에서 전도연은 알랭 들롱의 시상으로 최우수여자배우상의 영광을 거머쥐었다. CF 모델로 미약하게 출발한 배우가 한국 최초로 ‘칸의 여왕’에 등극하는, 창대한 순간이었다.
조재휘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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