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스 다윈의 진화론과 함께 영원히 기억될 비글호와 관련해서는 두 차례 항해와 선장들의 비극에 대해 살펴본 바 있지만, 정작 다윈 이야기를 하지는 못했다.
그가 박물학자로서 1831년 12월 27일 두 번째 항해에 동행하는 값진 기회를 얻고도 마지막까지 모험에 대한 두려움과 향수병 때문에 풀이 죽어 망설였다는 이야기, 항해 내내 복통과 멀미에 시달렸고 기항지에 내렸다가 다시 배에 올라 항해를 시작할 때면 거의 늘 “비참할 정도로 의기소침해 있었고, 심하게 앓았다”는 이야기. 그래서 선원들은 그가 언제 어떤 기항지에서 사라져 고국으로 돌아가버려도 전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 정도였다는 이야기. 그런 결정적 순간마다 눈부시게 아름다운 열대의 초목과 경이로운 생명체들이 기어코 그를 갈라파고스까지 나아가게 했다는 이야기. 모든 삶이 그렇듯 저 위대한 다윈과 그의 업적도 우연과 행운과 크고 작은 계기들이 겹쳐 이룬 일이라는 이야기.
선장 피츠로이와의 불화도 그의 동행을 방해하는 요소였는데, 32년 3월 살바도르에 상륙했을 때 시작된 언쟁의 발단은 인신매매 현장 등 노예제의 실상이었다. 다윈은 노예제 옹호론자인 선장에 대한 혐오감을 감추지 않았고, 둘의 언쟁은 무척 격렬했다고 한다.
다윈의 조부 이래즈머스 다윈 1세와 외가인 웨지우드의 창업자 조사이어 웨지우드는 18세기 중엽부터 맹렬한 반(反)노예제 운동을 벌여온 개혁적 귀족이었다. 1대 웨지우드의 접시 작품 중에는 흑인이 기도하듯 무릎을 꿇고 앉은 형상 위에 “나는 사람이 아니고 형제가 아닌가?”란 문구를 새겨 넣은 것도 있었다. 오늘날로 치자면 엄청난 SNS 활동가였을 다윈은 수만 통에 달하는 편지를 통해, 동식물 연구와 별개로, 비글호 항해 내내 보고 겪은 신대륙 노예무역의 실상과 백인들의 야만을 유럽의 지인들에게 고발하곤 했다.
하버드대 과학사 교수 재닛 브라운은 ‘찰스 다윈 평전’(임종기 옮김, 김영사) 서문에 다윈이 밝힌 ‘사실들’도 실은 서신 등을 통해 수집한 “집합적 노력의 표상”이며, ‘다윈주의’란 다윈과 빅토리아 시대의 영국이 함께 만든 사회적 결실이라고 썼다. 그에게 기존의 진화론과 적자생존의 이론을 알게 한 선대의 지식, 최고의 교육과 연구 여건을 마련해준 경제적 여건, 편지를 통해 조력을 아끼지 않은 동료 학자들과 자녀 등 가족의 조력 등이었다. 최윤필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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