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가 기억하는 유명한 배들, 가령 콜롬부스의 ‘산타마리아’나 청교도들의 ‘메이 플라워’ 못지않게 과학ㆍ철학사적으로는 어쩌면 더 중요하고 널리 알려진 배가 19세기 영국 왕립해군의 군함 ‘HMS 비글(Beagle)호’다. 승선인원 60명 남짓의 체로키급에 두 쌍의 가로 돛을 단 그 브리그(brig)선이 1835년 9월 15일 남미 에콰도르령 갈라파고스에 접안했다. 진화론의 과학자 찰스 다윈(Charles Darwin, 1809~1882)이 갈라파고스에 상륙한 것도 그날이었다.
1820년 군함으로 건조된 비글호는 5년 뒤 탐사선으로 개조돼 제국 영국의 해로 개척과 지도 작성, 신대륙 지질 및 동ㆍ식물 탐사 목적으로 투입됐다. 비글은 1826~30년의 첫 항해를 시작으로 모두 세 차례 대양 탐사에 나섰고, 다윈은 두 번째 항해(1831.12.27~1836. 10.2)에 동승했다. 영국 플리머스 항을 출항한 배는 대서양을 사선으로 가로질러 브라질과 우루과이, 포틀랜드를 거쳐 남미 대륙을 돈 뒤 칠레 발파라이소를 지나 에콰도르 갈라파고스에 닿았다. 배는 다시 태평양을 횡단 뉴질랜드와 호주를 찍고, 아프리카 대륙 남단을 돌아 대서양을 다시 건너 브라질에 살바도르 항구에 머문 뒤 플리머스항으로 귀항했다.
그 근 5년 중 그들이 항해한 기간은 18개월이었고, 나머지 3년 3개월은 정박했다. 청년 과학자 다윈은 그 항해 도중 숱한 지질학ㆍ생물학적 발견을 했고, 생물 진화의 열쇠가 된 중요한 증거들을 확보했다. 의대를 중퇴하고 신학 대학을 다녀 성공회 신부가 될 수도 있었던 청년 ‘창조론자’는 모든 생명종이 신의 창조물로서 고유한 불변의 존재가 아니라 같은 종이라도 서식 지역과 환경에 따라 시간 속에서 사뭇 다른 형태로 변해왔다는 명백한 사실을, 대륙에서 1,000km 떨어진 격절(隔絶)의 섬 갈라파고스 등지의 거북과 흉내지빠귀, 포클랜드 제도의 여우 등을 통해 확인했다. 그는 생명과학 역사상 가장 중요한 저작으로 꼽히는 ‘종의 기원’을 1859년 출간했다.
비글호는 한 차례 더 대양을 항해(1837~43)한 뒤 템스강 하구와 에섹스 주 해안 밀수 단속선으로 쓰였고, 1870년 해체됐다. 하지만 비글호의 명예 이면에는 당대 최고 실력자였을 첫 선장 프링글 스톡스와 두 번째 항해 선장 로버트 피츠로이의 자살 이야기도 서려 있다. 최윤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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