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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시선, 워코노미] 2500만명 몰살 1차대전 끝나자… 7000만명 사망 더 큰 후폭풍

입력
2019.12.21 04:40
1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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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 1차대전과 스페인독감 

※ 태평양전쟁에서 경제력이 5배 큰 미국과 대적한 일본의 패전은 당연한 결과로 보입니다. 하지만 미국과 베트남 전쟁처럼 경제력 비교가 의미를 잃는 전쟁도 분명히 있죠. 경제 그 이상을 통섭하며 인류사의 주요 전쟁을 살피려 합니다. 공학, 수학, 경영학을 깊이 공부했고 40년 넘게 전쟁에 대한 관심을 기울여온 권오상 프라이머사제파트너스 공동대표가 <한국일보>에 격주 토요일 연재합니다.

1차대전은 기관총, 폭격기, 독가스 등 진일보된 살상 능력을 갖춘 무기들이 대거 실전에 투입되면서 막대한 인명 피해를 낸 전쟁이었다. 1916년 유럽 서부전선에서 벌어져 113만명의 사상자를 낸 솜전투에서 영국 육군 병사들이 참호를 넘어 독일군 진영 쪽으로 돌격하는 훈련을 하고 있다. ⓒ위키피디아
1차대전은 기관총, 폭격기, 독가스 등 진일보된 살상 능력을 갖춘 무기들이 대거 실전에 투입되면서 막대한 인명 피해를 낸 전쟁이었다. 1916년 유럽 서부전선에서 벌어져 113만명의 사상자를 낸 솜전투에서 영국 육군 병사들이 참호를 넘어 독일군 진영 쪽으로 돌격하는 훈련을 하고 있다. ⓒ위키피디아

1918년 11월11일, 연합국과 독일 사이에 휴전협약이 체결되었다. 1914년 7월28일에 오스트리아-헝가리가 세르비아에 선전포고하며 시작된 1차대전의 종전이었다.

1차대전은 기본적으로는 유럽 국가들간의 전쟁이었다.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가 한편이었고, 프랑스 러시아 영국 등이 다른 한편을 이뤘다. 서전에 독일이 침공한 벨기에와 오스트리아-헝가리가 침공한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는 선택의 여지 없이 편이 정해졌다. 이때까지만 해도 이 전쟁은 유럽에서 흔하게 벌어지던 다른 전쟁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직접적인 이해관계가 없음에도 영토와 세력에 욕심을 낸 나라들이 연달아 참전했다. 오스만투르크는 페르시아와 러시아를, 불가리아는 세르비아를 공격했다. 전세가 동맹국 쪽에 불리하게 돌아간다고 판단한 이탈리아와 루마니아는 각각 1915년과 1916년에 오스트리아-헝가리를 침공했다.

다소 뜬금없는 참전국은 일본이었다. 러시아의 팽창을 아시아에서 견제할 조력자로 일본을 낙점한 영국은 개전 직후부터 일본의 참전을 종용했다. ‘아시아를 탈피해 구라파로 들어가자’는 탈아입구(脫亞入歐)를 국시로 삼은 일본은 유럽이 하는 일은 모조리 흉내내고 싶었다. 1914년 8월23일, 일본은 독일의 식민지였던 칭다오와 태평양의 여러 섬을 점령했다. 막상 일본이 거의 피를 흘리지 않고 중국과 태평양의 요충지를 차지하자 영국과 미국은 노골적으로 불편한 기색을 드러냈다.

아시아나 태평양 외 지역에서도 전투는 벌어졌다. 특히 영국ㆍ프랑스와 독일은 각각 식민지로 차지하고 있던 아프리카에서 전쟁을 벌였다. 즉 1차대전이 세계대전인 이유는 참전국의 구성 때문이 아니라 전투가 유럽이 아닌 나머지 대부분 지역에서도 벌어졌기 때문이었다.

 ◇폭격기ㆍ독가스… 잔혹해진 살상무기 

4년 넘게 치러진 1차대전은 참혹한 전쟁이었다. 이전과 차원이 다른 살상병기들이 연달아 등장한 탓이었다. 예를 들어, 기관총과 중포는 밀집한 보병부대를 순식간에 전멸시킬 수 있었다. 비행기가 등장해 하늘에서 폭탄을 쏟아붓고 육상군함을 표방한 전차가 철조망을 뭉개면서 총탄을 튕겨내기 시작했다. 그걸로도 모자라 여러 종류의 독가스가 실전에 투입되었다.

일례로, 1914년 8월부터 9월까지 동부전선에서 러시아와 독일이 맞붙은 탄넨베르크전투와 마수리안호전투에서 독일군은 4만 명을 잃으면서 러시아군에게 약 30만 명의 사상자를 안겼다. 이는 손실이 큰 걸로 악명 높았던 러일전쟁의 뤼순전투와 묵덴전투 사상자 수인 12만 명과 14만 명보다 두 배 이상 컸다.

사실 탄넨베르크와 마수리안호전투는 같은 시기에 치러진 1차대전의 다른 전투에 비하면 피해가 적은 편이었다. 1914년 9월6~12일 총 7일간 독일과 프랑스가 맞붙은 1차마른전투의 전사자는 15만 명, 부상자는 35만 명이었다. 같은 해 8월23일부터 9월11일까지 러시아와 오스트리아-헝가리가 대결한 갈리시아전투는 사상자가 53만 명, 포로는 16만 명이 발생했다.

 ◇전투 한번에 수십만명이 몰살되다 

시간이 갈수록 공세적 작전으로 인한 사상자 수는 더 증가했다. 양쪽 군대의 살상능력이 끊임없이 발전한 탓이었다. 독가스가 대규모로 사용된 1916년의 베르됭전투에서는 31만 명이 죽고 46만 명이 부상당했다. 전차가 실전에 최초로 투입된 같은 해의 1차솜전투의 사상자는 영국군 46만 명, 독일군 47만 명, 프랑스군 20만 명으로 총 113만 명이 죽거나 다쳤다. 1918년 서부전선에서 벌어진 독일군 춘계공세와 연합군 100일 공세의 사상자는 각각 155만 명과 186만 명으로 솜전투보다도 손실이 컸다.

보는 이에 따라 편차가 있지만, 결과적으로 1차대전의 사망자 수는 최대 2,500만명에 달했다. 이중 민간인은 약 770만 명이었고 나머지는 군인 전사자와 실종자였다. 또한 2,100만 명 이상의 군인이 부상당했다. 서구에서 피를 많이 흘린 잔인한 전쟁으로 보통 언급되는 30년전쟁(1618~48년)의 총 사망자 수는 750만 명으로 1차대전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물론 역사상 1차대전보다 더 많은 사망자가 나온 전쟁이 없지는 않았다. 가령, 위ㆍ촉ㆍ오 삼국의 전쟁에서 군인과 민간인을 망라한 총 사망자 수는 3,800만 명 정도로 추정되었다. 또 몽골이 유라시아대륙을 정복할 때 약 3,700만 명이 죽었다.

그럼에도 1차대전이 남달랐던 부분은 사망자 발생의 시간상 밀도였다. 약 4년간 치러진 1차대전의 연간 평균 사망자 수는 600만 명을 상회했다. 96년간 치른 위ㆍ촉ㆍ오 삼국전쟁이나 162년간 진행된 몽골의 정복은 작게는 연간 20만~40만 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즉 1차대전의 살상능력은 이전에 치러진 가장 잔인한 전쟁의 20배 수준에 달했다고도 할 수 있다.

 ◇차원 다른 대량살상무기, 전염병 

그러한 1차대전의 살상 규모를 능가하는 대규모 몰살의 원인이 한 가지 있었다. 바로 전염병이었다. 역사에 기록된 가장 참혹한 전염병은 흑사병이었다. 페스트에 감염된 흑사병 환자는 고열과 패혈증, 또는 폐렴을 동반하면서 증상 발현 후 빠르면 하루 만에, 늦어도 5일 안에 죽을 가능성이 컸다. 특히 1347년 제노바 해군에 의해 시칠리아에 전파된 흑사병은 곧이어 유럽대륙 전체로 들불처럼 번져나갔다. 1351년까지 유럽의 흑사병은 대략 유럽 인구 전체의 50%를 사망시켰다. 즉 적게는 5,000만 명에서 많으면 7,500만 명의 사람이 죽었다.

14세기의 흑사병에 못지 않은 전염병 피해로 16세기 여러 아메리카원주민 국가들의 몰락이 있었다. 인구가 1,500만 명 정도였던 잉카나 약 1,000만 명이었던 아즈텍이 극소수의 스페인 콩키스타도르에게 멸망 당한 이유는 그들 몸에 지니고 온 천연두를 위시한 각종의 전염병 때문이었다. 영국인들이 메이플라워를 타고 나타나기 전 북아메리카의 인디언도 최소 1,000만 명 이상은 되었다. 상징적인 사례로 1621년 11월 총독 윌리엄 브래드퍼드는 모피를 주고 농사와 사냥법 등을 가르쳐 준 92명의 인디언을 추수감사 식사에 초대했다. 이들 인디언은 몇 년 내로 전염병으로 모조리 죽었다.

전염병이 치명적이려면 몇 가지 조건이 동시에 충족되어야 한다. 첫째로 전염율이 어느 수준 이상이어야 한다. 흑사병이 치명적이었던 이유 중 한 가지는 환자를 보살피거나 시체를 치우는 과정에서 감염자를 만진 사람은 거의 틀림없이 페스트에 전염됐기 때문이었다. 둘째로 치사율이 적당해야 한다. 치사율이 너무 높으면 병을 옮기기도 전에 죽으면서 병의 전파가 저절로 제한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약간의 잠복기가 있으면 병의 전파에 더 유리하다.

 ◇전쟁 사망자의 3배, 전후 독감에 희생 

1918년 11월 1차대전이 끝나자 소집해제된 수천만 명의 군인들은 각기 모국의 집으로 돌아갔다. 좁고 비위생적인 환경에서 생활하던 군인들은 자신의 몸에 담아온 독감 인플루엔자를 퍼트렸다. 평균 치사율이 12%인 독감에 당시 전세계 인구의 약 3분의 1이 감염됐다. 즉 전세계 인구의 4%에 해당하는 약 7,000만 명이 1919년까지 독감으로 숨졌다. 이는 1차대전 자체로 인한 사망자 수의 거의 세 배에 달하는 숫자였다. 언론을 통제했던 미국을 포함한 대다수 참전국가들과는 달리 중립을 유지했던 스페인은 인플루엔자로 인한 사망자의 심각성을 있는 그대로 보도했다. 스페인에게는 억울하게도, 이때의 독감에 ‘스페인독감’이라는 이름이 붙은 이유였다.

알고 보면 역사적으로 가장 심각했던 위 세 번의 치명적 전염병은 모두 전쟁과 관련이 있었다. 스페인독감은 1차대전 때문에, 아메리카원주민의 멸절은 스페인 군대 때문이었다. 흑사병이 유럽에 퍼진 이유도 전쟁이었다. 몽골제국의 일원인 킵차크칸은 크림반도의 도시 카파가 오랜 포위공격에도 불구하고 항복하지 않자 흑사병으로 죽은 시체를 공성병기를 통해 성 안으로 날려 보냈다. 이때 카파에 와있던 제노바 선단이 전염된 후 시칠리아를 거쳐 이탈리아로 돌아오면서 온 유럽에 퍼지게 됐다.

권오상 프라이머사제파트너스 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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