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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레니얼 청문회] 요즘 것들 멘탈이 약하다고? 밀레니얼이 곰돌이 푸를 찾는 이유

입력
2019.12.24 04:40
수정
2019.12.24 09:43
2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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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행복하진 않지만, 행복한 일은 매일 있어.”

통통한 노란 몸에 빨간 티셔츠를 입고, 꿀단지를 들고 다니는 귀여운 캐릭터, ‘곰돌이 푸’의 목소리입니다. 추억의 애니메이션 속 주인공인 곰돌이 푸는 이제 ‘힐링’ 에세이의 대명사가 됐습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 다 잘될 거야’라며 푸가 건네는 위로 메시지도 인기입니다. ‘곰돌이 푸, 행복한 일은 매일 있어’는 지난해 대형서점 연간 베스트셀러 1위를 차지했을 정도니까요. 푸뿐만이 아닙니다. 미키마우스, 빨강머리 앤, 보노보노 같은 캐릭터로 표지를 장식하고 위로를 건네는 힐링 도서는 최근 서점가를 달구고 있습니다. 매일매일 힘겨운 사람들에게 현실 밖 캐릭터들이 건네는 말 한 마디가 하루를 버틸 힘이 되는 상황이 서글프기도 합니다.

물론 ‘아프니까 청춘이다’라는 말을 들으며 힘든 시절을 버티길 강요 받던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늘구멍 같은 입시와 취업전선을 뛰어넘어, 정글 같은 사회생활에 뛰어든 밀레니얼 세대에게 ‘더 열심히 해’라는 메시지는 가혹한 측면도 있습니다. ‘누구라도 좋으니 위로해달라’는 이들의 목소리에 응답한 곰돌이 푸, 그 목소리는 밀레니얼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올까요.

'곰돌이 푸, 행복한 일은 매일 있어' 책 표지.
'곰돌이 푸, 행복한 일은 매일 있어' 책 표지.

◇ ‘하면 된다’ 안 통하는 사회

미트볼 샌드위치(이하 미트볼)=취업 준비할 때 ‘곰돌이 푸, 서두르지 않아도 괜찮아’ 읽으면서 위로 받은 적이 있어. 그때는 예민한 시기니까 사소한 일에 짜증이 나고, 짜증을 내는 자신이 더 싫어지는 악순환이 반복되더라고. 그때 “눈앞이 막막하거나 다른 이의 힘든 마음이 전해져 마음이 가라앉을 때는 힘든 감정에 묻혀 시야가 좁아지게 마련입니다”라는 책 속 문구를 읽었어.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내가 느끼는 감정이 자연스러운 거란 생각이 드니까 위로가 되더라.

마이마이=인스타그램에서 친구가 게시한 ‘겉으로 보이는 타인의 행복에 흔들리지 말라’는 푸의 문구를 보고 공감했어. 예전엔 나도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매일같이 했었는데, 요즘엔 잘 안 해. 언젠가부터 다른 사람의 행복한 순간을 보면서 스스로가 참 불행하게 느껴지고 힘이 빠지더라고. 사실 SNS는 누구나 가장 행복한 순간만을 게시하는 공간인데도 말이야.

숭례문 뽀글이=그 문구를 인스타그램에서 봤다는 게 역설적이야. SNS는 자신의 행복을 겉으로 보여주는 공간인데, SNS에서 이런 문구가 유행하다니.

할많하않=분명 누구나 아는 얘기지만 가끔 나에게 해줬으면 하는 말들이 있어. 고민상담도 마찬가지잖아. 내가 답을 알고 있지만 누군가에게 그런 말을 듣고 싶을 때가 있어. 노래도 마찬가지잖아. 옥상달빛의 ‘수고했어, 오늘도’처럼 위로가 되는 가사를 반복해서 들은 적이 있지 않나. 요샌 그런 걸 힐링 도서가 대신해주는 게 아닐까.

마이마이=가장 유용한 건 취업 준비나 금전 문제처럼 내가 현실에서 겪는 어려움에 대해 자세하게 조언을 해주는 거지. 그렇지만 그렇게 내 마음에 쏙 드는 정답은 없잖아. 우리가 일상에서 겪는 문제는 너무 복잡한데, 간단한 해결책을 찾고 싶으니까 계속 이런 책을 찾는 것 같아.

할많하않=난 ‘하마터면 열심히 살 뻔했다’를 인상 깊게 읽었어. 스무 살 때까진 ‘성공 신화’를 맹신했었지. 내가 열심히 했고, 열심히 한 만큼의 결과를 얻었고. 그게 세상의 이치라고 생각했어. 열심히 해서 대학에 들어갔으니 앞으로도 별일 없을 거라 생각했던 거지. 그런데 수능으로 인생 계주가 끝난 게 아니더라. 여전히 끝이 없는 레이스를 하고 있다는 걸 깨달은 거지. 그런데 입시도 취업 준비도 노력에 정비례하는 게 아니잖아. 친구 중엔 학교ㆍ학점ㆍ스펙 다 좋은데 최종면접에서 늘 떨어지는 애도 있어. 이 친구는 과연 노력을 안 해서 취업을 못 했을까. 노력과 상관없는 결과물을 계속 보니까 열심히 사는 게 맞는 것인지 회의감이 들 때도 있어.

날아라 펭수(이하 날펭)=맞아. 투입과 보상이 비례하지 않아. 지인들 보면 그렇게 겨우 취직을 해도 회사생활이 행복하지가 않아 보이더라.

미트볼=나도 열심히 산 사람들이 ‘내가 열심히 살아서 이렇게 됐어’라고 하는 게 싫어서 ‘열심’이라는 말 자체에 거부감이 들었어. 자수성가한 사람들이 ‘네가 열심히 안 해서 그렇지’라고 말하니까 그냥 열심히 하기가 싫은 거야. 왜 열심히 사는 것만이 제대로 사는 거야. 그러니까 그냥 ‘그렇게 열심히 안 해도 돼’라는 말에 더 공감이 가더라고.

◇힘듦을 장사로 이용하는 건 싫어

누헨지니=난 좀 다른 생각이야. 원래 이런 힐링 도서를 잘 찾지 않았는데, 이번 기회에 읽어보니 모호하게 맞는 말들을 늘어놨더라고. 모호한 말을 하는 점쟁이 같았어.

숭례문뽀글이=동감이야. ‘생활 속 팁! 음식이 싱거울 때는 소금을 넣으세요!’ 같은 말 아냐. 당연한 말을 하니까 힘이 빠져. 우리가 몰라서 그런 것도 아니잖아. 좋은 이야기를 한 번에 모아 놓다 보니까 상충되는 것도 많아.

피곤한 칸트(이하 피칸)=난 좀 유치하게 느껴졌어. 그런 뻔한 이야기를 하는 책은 어렸을 때 많이 읽었던 것 같은데, 친구들 사이에서 다시 유행하는 게 신기해. 너무 보편적인 이야기를 늘어놓으니까 말하고 싶은 게 뭔지도 모르겠고, 너무 당연한 이야기를 듣고 있으니까 위로가 되진 않았어.

누헨지니=노래는 길어야 5분이면 끝나지만 이런 이야기를 200페이지로 늘려서 할 만한가. 이런 책들이 인기 있는 캐릭터를 이용해서 대량으로 쏟아지는 걸 보면, 요즘 사람들이 힘들다는 걸 이용해 먹는 것 같기도 해.

피칸=나도 힐링 도서 자체는 좋아해. 도움이 필요할 때 취사선택해서 필요한 정보를 읽는 게 책이잖아. 그렇지만 요새 유행하는 ‘다 괜찮다’ 식의 힐링 도서는 정말로 고민을 담아 누군가를 위로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 같지 않아. 이런 사회적 분위기를 이용해서 공장에서 마구 찍어내는 도서라는 느낌이야. 인스타그램에 있는 얕은 메시지를 바구니에 쓸어 담아서 전시하는 듯해. 출판사에서 ‘위로 받고 싶은 우리’를 이런 식으로 이용하는 건 싫어.

날펭=힐링 도서 보니까 생각나는 게 있어. 예전에 유행했던 자기계발서 있잖아. ‘아프니까 청춘이다’ 같은 책 말이야.

할많하않=자기계발서는 사회 문제를 개인 탓으로 돌리는 느낌이 들어서 싫었어. 피라미드를 올라가면 서 있을 공간이 좁은데, 그 피라미드 위에 올라가지 못하는 우리를 탓하는 건 뭔가 잘못됐다고 생각했어. 힐링 도서는 ‘네가 문제야’라고 말하는 대신 ‘그래도 넌 괜찮은 사람이야’라고 말해주잖아.

누헨지니=자기계발서가 사회 문제에서 우리 눈을 돌리게 했다면, 힐링 도서 역시 다른 맥락에서 구조적 문제에서 자꾸만 눈을 돌리게 하는 것 같아. ‘괜찮다’고 말하면 뭐가 달라지나. 당장 내 일자리가 없는 건 똑같은데 말이야. 자기계발서가 자신에 대한 ‘과한 부정’을 하게 했다면, 힐링 도서는 ‘과한 긍정’으로 몰아가잖아. 계속 ‘열심히 안 해도 괜찮아’라고 말하니까 답답하다는 거지. 취업이 안 되는데 이걸로 위로한다고 해서 상황이 나아지는 게 아니잖아.

숭례문뽀글이=결국 ‘다른 사람도 나처럼 힘들어 한다’는 메시지도 큰 도움이 안돼. 남이 겪는 고통이랑 내 고통이랑 무슨 상관이야. ‘내가 해봐서 아는데’를 더 예쁘게 포장한 데 지나지 않는 거 같아.

◇고민 털어놓을 사람도 없고

숭례문뽀글이=이런 책이 유행한다는 사실 자체가 위로가 필요한 사람이 많다는 방증 같아서 안타깝기도 해. 삶이 너무 팍팍하고 앞이 너무 막막하니까 이런 두루뭉술한 데서 억지로 힐링을 얻게 되는 측면이 있어. 나도 ‘눈 가리고 아웅’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가끔은 그런 선문답 같은 문구를 찾게 되더라고.

할많하않=나도 퇴근하고 집에 들어가면 ‘아, 오늘도 다른 게 없구나’ 이런 생각을 해. 삶의 의미를 못 찾는다고 할까. 속 터놓고 이야기할 데도 없어.

날펭=이런 고민을 친구들한테 털어놓기도 힘들어. 내가 인턴기자로 일하면서 힘든 게 있어도, 그걸 취업도 못한 친구에게 이야기하는 건 꺼려지잖아. 친구나 선후배들도 각자 다른 상황에서 힘들어하니까 이걸 누구에게 선뜻 이야기하기가 힘든 거야. 말할 사람이 없어.

숭례문뽀글이=20대가 공황장애도 많이 늘었다잖아. 내 친구도 부모님께 얘기했더니 ‘요새 젊은 애들은 ‘멘탈’이 너무 약하다’라는 말을 하셨대. 이런 이야길 계속 듣다 보니까 섣불리 내 감정 상태를 이야기하기가 더 어려운 거야.

날펭=그런데 어른들 말대로 옛날에도 똑같이 힘들었다고 해도, 당시 그 분들의 대응이 옳았던 건 아니잖아. 지금까지도 그런 잘못된 인식이 이어져오는 것 같아.

피칸=조심스런 말이지만, 우리 또래에 ‘우울’이라는 정서가 만연한 거 같아. 최근 젊은 연예인이 잇달아 자살했을 때도 친구들이 많이 힘들어하면서 ‘우울’, ‘죽음’ 같은 이야길 많이 했어. 이유야 어찌 됐든 우울함을 느끼는 젊은이들이 많다는 거고, 그래서 이런 힐링 도서가 많이 읽히는 거잖아.

숭례문뽀글이=우울증은 치료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해. 그런데 실질적으로 의학적 도움을 받기가 너무 어려워. 내가 다니던 대학교에선 상담센터를 운영하는데도, 대기자가 너무 많아서 상담 받으려면 1년이나 기다려야 해.

피칸=나도 교내 상담센터에 개강 즈음인 8월 말에 예약하러 갔는데, 결국 종강 때인 12월까지 상담을 못 받았어. 접근하기가 너무 어려워. 무료로 운영되는 곳은 대기자가 너무 많아서 제때 상담 받기가 어렵고, 유료인 곳은 가격이 부담돼. 실질적 도움을 받을 방법이 부족하니까 힐링 도서를 찾는 거 같아. 전문적인 도움을 받는 게 아니라 ‘인스턴트 처방’으로 급하게 치유하는 거지. 본질적으론 치유가 안 돼도 말이야.

◇그럼에도, 위로와 힐링의 순간들

날펭=힐링 도서의 낯간지러운 말은 싫지만, 소소한 행복의 순간들이 필요하다는 데는 동감이야. 일상에 치이다 보니까, ‘행복은 평범한 데 있다’는 메시지가 반복되잖아. 힐링 도서 말고 힐링과 위로의 순간들이 또 있을까.

누헨지니=내가 응원하는 프로야구팀이 이겼을 때 기분이 좋아져. 언젠가부터 유일한 일상의 낙이야. 학교 다닐 땐 그냥 보고 기분이 좋은 정도였는데, 졸업하고 백수가 되고 나니까 스포츠 말고는 딱히 웃을 일이 없더라고. 아침에 일어나서 해외야구 경기를 보고, 응원하는 팀이 이기면 하루 종일 기분이 좋아.

마이마이=예전엔 힐링과 행복이란 게 별개라 느꼈는데, 요샌 그 소소한 힐링의 순간을 행복이라고 느껴. 누군가는 사회를 냉철하게 바라보고, 모두 잘 사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당장 업무에 치이는 일상에서 사회문제까지 들여다보라는 메시지는 너무 벅차. 나는 퇴근길에 족발 사서 먹을 때가 가장 행복해.

피칸=난 아직도 성공해야 한다는 마음을 버리지 못하고 있어. 내 지위가 높아지면 누릴 수 있는 게 많아지니까 그때 더 행복하지 않을까. 울어도 땅바닥에서 우는 거랑 리무진에서 우는 거랑 다르단 말이 있잖아. 물론 이건 너무 먼 행복 이야기고, 지금은 우리 집 강아지랑 꼭 껴안고 있을 때가 좋아.

날펭=나도 비슷해. 인턴 신분을 던져 버리고 정규직이 되는 게 지금으로선 최대 목표야. 맛있는 도넛을 먹을 때 지금도 분명 힐링이 되고 소소한 행복을 느끼지만, 정규직이 되면 이 소소한 행복이 훨씬 크게 다가올 것 같아. 지금은 웃고 있어도 내가 이렇게 웃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피칸=동감이야. 일상의 소소한 행복이 있지만 마음 한편으론 해결하지 못한 숙제가 있어서 온전한 행복이라고는 말하지 못하겠어. 위로는 필요하지만, 그것만으론 충분치 않다는 거지.

숭례문뽀글이=마음 속 찝찝함이 해결될 날이 올까. 주위를 둘러보면 세대를 막론하고 모두 그 숙제를 안고 사는 것 같아. 행복이 별 게 아니라는 걸. 작은 행복들이 쌓이고 쌓이면 행복이라는 것쯤은 알고 있어. 나도 그럴 때 행복하다고 느끼지만, 이게 전부가 아니었으면 좋겠어. 아직 다가오지 않은 큰 행복을 바라는 마음이 있다는 거지.

미트볼=요즘 내게 가장 큰 행복은 아침에 어떤 양말을 신을지 고르는 거야. 양말을 고르고, 달콤한 디저트를 사 먹고, 그런 게 내 힐링 방법이야. 그래도 정말 바쁘고 눈앞의 일에 쫓길 땐 그런 걸 해도 행복하지는 않지. 그 순간을 행복이라고 느낄 수 있는 삶의 여유, 그 정도만 있었으면 좋겠어.

정리=이미령 인턴기자

참여=김민준, 노희진, 윤소정, 임태형, 차승윤, 한채영 인턴기자

※ 밀레니얼들이 열광하거나 주목하는 ‘그들’에겐 어떤 특별한 것이 있을까요. 밀레니얼 세대인 한국일보 인턴기자들이 밀레니얼을 대표하는 것처럼 보이는, 혹은 밀레니얼 사이에서 화제가 되고 있는 인물들을 선정하고 이들을 둘러싼 문화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소비하는지 방담 형식으로 소개(매주 화요일 연재)합니다. 밀레니얼들은 어린 시절부터 끊임없이 숙제로 ‘자소서’를 써 왔지만, 사실 ‘세대소개서’를 쓸 때는 난감합니다. 세대를 한 가지로 정의할 수 있다는 것은 환상이니까요. 그저 좋아하는 ‘인물’, 화제가 되는 ‘인물’을 통해 젊은 개개인이 ‘사회구성원’으로서 보고 듣고 느끼는 점을 있는 그대로 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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