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일 별세한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에게 대우는 ‘그의 시작이자 끝, 그의 모든 것’이었다. 그런 대우그룹은 창립자인 김 전 회장보다 먼저 불명예 해체로 공중 분해됐고, 지금은 겨우 과거의 영광을 ‘대우’라는 이름의 흔적으로만 남긴 채 명맥만을 유지하고 있다.
대우그룹의 모태가 된 대우실업이 설립된 때는 1967년 3월 22일. 트리코트 원단 수출의 귀재라고 해서 ‘트리코트 김’이라 불리던 청년 김우중은 서울 충무로의 열 평 남짓한 사무실을 빌려 셔츠, 내의류 원단을 동남아시아에 수출하기 시작했다. 정부의 수출진흥정책에 힘입어 설립 이듬해에 대통령 표창을 받을 정도로 급성장했다.
1969년에는 호주 시드니에 국내 최초로 해외지사를 설립했는가 하면 1971년에는 우리나라의 대미 섬유수출의 40%를 확보, 업계를 평정했다.
김회장은 이 같은 성장에 힘입어 1973년 한 해에만 대우기계, 신성통상, 동양증권, 대우건설 등 10여개의 계열사를 인수, 본격적인 기업 확장에 박차를 가했다. 1976년에는 대우중공업의 전신인 한국기계를 인수했고, 1978년에는 대우조선의 전신인 옥포조선, 대우자동차의 전신인 새한자동차를 인수해 만성적자에 허덕이던 기업들을 우량기업으로 회생시켰다. 1978년에는 계열사 수가 무려 42개에 이르렀고, 1982년에는 대우실업을 ㈜대우로 바꾸면서 그룹회장제를 도입, 그룹의 모습을 갖췄다.
㈜대우는 1983년 국내 최초로 단일상사 월간 수출 5억달러를 달성했고, 1988년에는 동베를린에 국내 최초의 동구권 지사를 세워 세계 경영의 교두보를 구축했다.
해외진출과 함께 95년에는 국내 처음으로 대북협력사업의 일환으로 첫 남북한 합작투자회사인 민족산업총회사를 북한 남포에 설립했다. 그리고 대우는 계열사 41개, 국내 종업원 10만5,000명, 해외사업장 외국인 종업원 21만9,000명, 해외법인 396개사의 공룡재벌로 성장했으며, 자산기준으로 삼성, LG를 제치고 재계 2위로 올라서기까지 했다.
하지만 거침없이 몸집을 불리던 대우그룹은 국제금융기구(IMF) 구제금융 사태로 급격하게 사세가 기울기 시작했다. 무리하게 빚을 내 과잉투자를 하는 차입경영의 허점이 드러났다. 외형확대에 치중하느라 다른 그룹에 비해 구조조정이 늦었다. 국가신용등급 추락 여파로 해외 채권자들의 상환 압력이 거세지고 해외 자산가치가 추락하자 대우그룹은 유동성 위기에 빠졌다.
1998년 12월 계열사를 10개로 감축하는 구조조정안이 발표되면서 대우그룹은 확연히 쇠락의 길로 들어섰다.
삼성차를 받고 대우전자를 주는 빅딜 계획이 실패하며 이듬해 8월엔 12개 주요 계열사 워크아웃이라는 극약 처방을 받았다. 큰 기업은 망하지 않는다는 '대마불사' 법칙이 이때 깨졌다.
이어 2000년에 수십조원 규모 분식회계가 적발되며 대우그룹은 회생 불능 사태가 됐다. 당시 밝혀진 대우그룹 분식회계는 1997년 19조여원, 1998년 21조여원에 달했다.
남상욱 기자 thoth@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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