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얼굴의 배임]
론스타 사태로 2006년 구속 충격… 공무원 복지부동 심화 부작용 불러
회사를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한 도구로 이용하는 일부 악질 사주의 전횡을 처벌하는 데 배임죄가 유용한 도구임을 부정하기 어렵지만 부작용 역시 상당하다. 처벌 기준과 범위가 모호하다 보니 기업인과 공직자가 배임죄를 피하려 정상적인 경영 판단조차 꺼리거나 미루는 일이 비일비재하기 때문이다. 이는 투자 위축이나 공직사회의 복지부동으로 이어질 수 있어 경쟁력을 갉아먹는 요인이 될 수 있다.
10년도 더 된 일이지만 ‘변양호 신드롬’은 공공부문에 짙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변양호 전 재정경제부 금융정책국장은 2003년 미국계 사모펀드 론스타에 외환은행을 헐값에 팔아넘겼다는 혐의(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상 배임)로 2006년 구속기소돼 공직사회에 충격을 줬다.
변 전 국장은 무죄 판결로 누명을 벗을 수 있었지만, ‘책임질 일은 하지 않는 게 낫다’는 생각이 공직사회에 뿌리를 내리게 됐다. 사회부처의 한 고위관료는 “배임 리스크를 피하기 위해 법무담당관실과 변호사 면허를 가진 직원들에게 법률 검토를 맡기는 일이 일상이 됐다”며 “조금이라도 문제가 될 수 있다는 검토 결과가 나오면 그 정책이 필요하든 아니든 일단 조심한다”고 말했다. 중앙부처 국장급 공무원도 “소신껏 판단해 결정한 일인데도 사후(事後)에 배임 시비에 휘말릴 수 있다고 생각하면 움츠러드는 게 사실”이라며 “지금 열심히 추진한 정책이 정권이 바뀐 뒤엔 배임으로 찍혀 불이익을 받을 수 있다는 우려가 공직사회에 팽배하다”고 지적했다.
결정 딜레마에 빠지다 보니, 창의적 행정보다는 기계적으로 매뉴얼에 의존하는 일이 잦아지고 있다. 준정부기관의 한 고위인사는 법이나 하위법령에 ‘~를 해야 한다’고 되어 있으면 안심이 되는데 ‘~를 할 수 있다’고 돼 있으면 고민이 많다고 한다. 그는 “괜히 추진했다가 나중에 결과가 나쁘면 왜 했냐고 문책당할 수 있어 겁부터 난다”며 “감사원에서 ‘적극 행정은 면책한다’고 말하지만 주변에서 못 볼 꼴을 많이 봐서 불안한 게 사실”이라고 토로했다.
민간 영역도 배임죄 걱정에서 자유롭지 못하긴 마찬가지다. 회사가 잘나갈 때는 문제 삼지 않던 경영진의 의사결정을 회사가 어려워지면 갑자기 배임 행위로 의심하기 때문이다. 조선업체 법무팀에서 일했던 한 변호사는 “저가 수주를 실적을 높이기 위한 정상적 경영 판단으로 보던 사람들이, 실적이 악화하자 ‘배임 아니냐’고 몰아붙이더라”고 말했다.
대기업들이 최근 경영권 견제 장치의 하나로 지배구조(거버넌스) 위원회를 속속 도입하는 배경에는 배임 가능성을 사전에 예방하기 위한 측면이 없지 않다. 지배구조위원회를 통한 준법 경영이 나쁠 건 없지만, 한편으론 과감한 의사결정에 걸림돌이 될 수 있다는 시각도 상존하고 있다.
기업이 정부 정책과 배임 우려 사이에 끼여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사례도 드물지 않다. 시중은행들은 외환파생상품 키코(KIKO)가 의제로 오를 예정인 오는 12일 금융감독원 분쟁조정위원회를 주목한다. 키코 사태는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 환율이 치솟아 키코 상품에 가입했던 수출기업이 막대한 피해를 입고 줄도산한 사건이다. 10여년 전 사건을 다룬다는 점에서 금융당국이 은행들의 책임을 일부 인정하는 것 아니냐는 전망이 많다. 하지만 키코 판매가 불공정거래 행위가 아니라는 확정 판결을 대법원이 2013년에 내린 상황에서 당국의 압력에 떠밀려 배상을 하게 되면 배임에 걸릴 수 있다는 점을 은행들은 우려한다.
한 은행 관계자는 “배상을 거부해 단기적인 이익을 취할지, 통 크게 배상해 중장기적으로 회사 이미지를 높일지는 경영 판단의 영역인데 왜 형사처벌을 걱정해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이성택 기자 highnoo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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