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얼굴의 배임] 
 전남개발공사 前본부장 전씨, 외부업체에 감리 맡겼다가 유착 혐의 
 檢, 증거 안 나오자 배임으로 수사 전환… 무죄 받았지만 직장 잃어 
 아덴만 영웅도 KBS 사장도 한 순간에 ‘낙인’ 범죄자로 몰아가 
배임 범죄자로 낙인 찍혀 고초를 겪었던 전남개발공사 개발사업본부장 출신의 전모씨가 감사와 수사, 재판을 받는 기간 중 작성한 A4용지 46페이지 분량의 비망록. 박형기 인턴기자

“열심히 일한 것이 죄였습니다.”

임무에 위배되는 행위로 조직에 손해를 입힌 사람을 처벌하는 업무상 배임죄는 공직자와 기업인에겐 ‘걸면 걸리는 마법’으로 통한다. 법 문구가 모호하고 수사기관의 재량이 커 검찰의 표적수사에 이용된다는 시각이 뿌리 깊다. 법원에서 무죄 판결을 받아도 한번 범죄자로 찍힌 낙인은 쉽사리 없어지지 않는다. 일 하다가 처벌 받느니 복지부동 하겠다는 푸념이 나오는 이유다.

전남개발공사의 개발사업본부장을 지낸 전모(56)씨는 수년 전 겪은 배임죄의 악몽에서 아직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2014년 도지사가 바뀐 뒤 전남도는 산하기관들에 대한 고강도 감사에 착수해 전남개발공사를 수사의뢰 했다. 공사가 무안군 오룡지구 택지개발사업을 추진하면서 개발공사 내부인력을 활용하지 않고 외부업체에 책임감리를 맡겨 감리비용 40억원을 부당하게 낭비했고 업체와 유착 의혹이 의심된다는 내용이었다. 검찰은 전씨와 그의 상급자인 공사 사장의 사무실과 자택, 사택, 휴대폰 등을 압수수색하고 광범위한 계좌추적을 실시했다. 그러나 탈탈 털어도 감리업체와의 유착 의혹을 입증할 증거가 나오지 않자, 검찰은 수사방향을 틀어 전씨에게 배임 혐의를 적용했다. 배임은 금품이 오간 사실이 없어도 처벌할 수 있어 검찰이 금품수수 수사가 막히면 마지막 카드로 꺼내 드는 일이 드물지 않다.

하지만 1, 2, 3심 재판에서 전씨는 모두 무죄를 선고 받으면서 검찰의 배임죄 기소는 무리수라는 것이 확인됐다. 법원은 △공사가 이전에 다른 개발사업을 할 때 외부에 감리를 맡기지 않고 직접 감독했다가 부실시공 문제가 제기돼 담당 직원이 수사를 받아 경영자가 외부 감리를 검토할 수밖에 없었던 점 △법령이 전면 책임감리 방식의 적용을 허용하고 있는 점을 근거로 “전씨 등이 오룡지구 개발사업을 직접 감독이 아닌 전면 책임감리로 결정한 것은 경영상 판단에 의한 결정으로 보인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전씨의 고통은 법원 판결로 사라지기는커녕 더욱 커졌다. 전남도는 2심 무죄판결이 나온 뒤에도 전씨에게 정직 3개월의 징계를 강행했고, 전씨는 징계 무효를 구하는 행정소송에서 이긴 끝에 가까스로 공직에 복귀할 수 있었다.

배임죄는 이처럼 수사기관이 자의적으로 적용하기 쉬운 데다, 기업투자와 공직자의 적극 행정을 위축시킬 수 있어 처벌 대상 행위를 대폭 줄여야 한다는 움직임이 예전부터 있었다. 그러나 ‘재벌 봐주기 아니냐’는 반대 여론에 밀려 별다른 진전이 없었다. 실제로 사익 추구를 위해 계열사 등에 손해를 입히는 기업인을 처벌하는 데 배임죄의 존재가 긍정적 역할을 했다는 평가가 적지 않다. 문제는 배임죄가 갈수록 외과용 칼이 아닌 우악스런 몽둥이처럼 사용되며 기업과 공직사회를 얼어 붙게 만들고 있다는 점이다. 법과 제도 개선이 없으면 전씨 같은 피해자가 또 나올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한국일보는 현행 배임죄의 문제점을 집중 해부하고 대안을 제시할 예정이다.

검찰 기소율. 그래픽=신동준 기자

남들처럼 주어진 일만 할 걸…

한국일보가 입수한 A4용지 46페이지 분량의 전씨 비망록에는 그가 2년 동안(2015년 1월20일~2017년 2월14일) 감사와 수사, 재판을 받는 동안 느낀 처절한 소회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직접 감독으로 할 수도 있었겠지만 가용 인력이 부족하고 당시 혁신도시 감독 과정에서 발생한 선 준공 처리, 부실시공문제 등으로 전라남도 감사결과에 따라 경찰에 (직원 2명이) 고발된 상태였다. 이렇다 보니 다들 책임감리 필요성을 공감하고 당연히 그렇게 해야 되는 줄로 인정하고 있었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막장 드라마를 보는 듯하다. 감사의 권한이, 한계가 어디까지일지 모르겠다. 죽으란 소리는 아닐 텐데 더욱 치욕스럽게 해 간다.’

그는 당시 억울하게 수사 받는 말 못할 심적 고통도 자세히 적었다. ‘사무실과 숙소, 광주 집, 도청 숙소까지 압수수색을 받았고, 핸드폰도 압수당했습니다. 금융계좌 추적과 출국금지 연장도 계속됐습니다. 제 부모, 처 이모, 처제 그리고 거래가 있던 사람들까지 전부 들여다 보았고, 특히 처제는 광주 집과 대여금고까지 수색했습니다.’ 극단적 선택을 피하기 위한 고뇌도 상당한 듯했다. ‘(수사 이후) 늘 나를 감사하는 대상이 있지 않나 의심이 들 때가 많다.’ ‘살아야 돼요 꼭. 다 내려놓는다. 오직 하나만 놔두고…’

결국 그가 얻은 씁쓸한 교훈은 ‘일 한 것이 죄’라는 사실이었다. ‘모든 행정행위와 일은 주어진 법과 규정의 틀 안에서 이뤄지고 선택하는 의사결정의 하나인데도 권력의 한계와 책임이 어디까지인지 알 수 없다. 남들처럼 주어진 일만 했어야 했는지 모르겠다.’ ‘일 한 것이 죄다.’

어렵게 취재에 동의한 전씨는 실명 공개를 극구 꺼렸다. 검찰을 공격하는 것처럼 비치면 보복 받을 것을 우려하는 듯했다.

정연주 전 KBS 사장이 지난 2일 한국일보 기자를 만나 배임죄의 문제점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이성택 기자

아덴만 영웅도 KBS 사장도 못 피해

2011년 소말리아 해적에게 납치된 우리 선원들의 구출작전을 성공적으로 지휘해 ‘아덴만의 영웅’으로 불렸던 황기철(62) 전 해군참모총장 역시 배임죄의 올가미에 걸려 고통을 겪었다. 2015년 검찰의 방산비리 수사가 확대되면서 황 전 총장의 통영함 납품비리 의혹이 함께 불거졌다. 검찰 입장에서 황 전 총장을 옥죌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카드는 금품이나 향응을 받은 증거를 확보하는 것이었지만, 털어도 그런 증거는 나오지 않았다.

검찰은 그러자 배임죄를 적용해 그를 구속기소했다. 황 전 총장이 2009년 방위사업청에서 근무할 당시 해군참모총장에게 잘 보여 승진하기 위해 총장 관련업체에 납품권을 주고 성능미달의 음파탐지기를 사들여 국가에 손해를 끼쳤다는 이유였다. 그러나 1, 2, 3심 법원 모두 “배임 행위의 명백한 동기가 없고, 허위문서 작성을 공모했다고 보기도 어렵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지난 3일 경남 창원시 진해구에서 한국일보와 만난 황 전 총장은 “대통령 지시로 방위사업비리 정부합동수사단이 꾸려진 상황에서 검찰이 해군참모총장이라는 고위급을 엮어 넣기 위해 무리하게 나를 배임죄로 몰았다”고 분을 삭이지 못했다. 해군 수장이던 그는 한 순간에 범죄자로 전락해 199일 동안 구치소에 수감되는 치욕을 맛봤다. “전쟁에서 져서 포로가 되면 수용소에 갈 수 있겠다는 생각은 해봤지만 이렇게 구속될 줄은 평생 생각해 보지 못했다. 풀려난 이후에도 늘 감시 받는 것 같고 사람들이 나를 범죄자로 손가락질 하는 것 같아 한동안 후유증에 시달릴 정도였다. 가족과 동료들이 고통을 받은 건 물론이다.”

황기철 전 해군참모총장이 지난 3일 한국일보 기자를 만나 배임죄의 문제점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박지연 기자

황 전 총장은 시종일관 배임죄를 집중 성토했다. 그는 “(금품이 오간 증거가 필요한) 뇌물죄 등과 달리 별다른 증거가 없어도 ‘저 사람을 타깃으로 해야겠다’고 검찰이 작정하면 적당한 동기를 만들어서 범죄자로 엮을 수 있는 게 배임죄”라며 “나 같은 피해자가 더 이상 나오지 않고, 심각한 인권침해를 막기 위해서라도 제도개선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검찰 역사상 최악의 표적수사 사례로 꼽히는 정연주(73) 전 KBS 사장에 대한 2008년 기소 당시 죄명도 배임이었다. KBS는 국세청과 수년 동안 법인세 취소소송을 하다가 2005년 법원의 조정 권고를 받아들여 법인세를 일부 환급 받고 소송을 취하했다. 검찰은 그러나 판결까지 기다렸다면 법인세를 전액 돌려받았을 수 있었다고 보고, 조정을 받아들인 정 전 사장의 판단을 KBS에 손해를 끼친 행위로 해석했다. 정 전 사장이 당장의 적자 폭을 줄여 연임에 유리한 여건을 만들기 위해 배임을 했다는 범행 동기도 제시했다.

그러나 1, 2, 3심 법원은 범행 동기를 입증할 증거가 없고, 끝까지 판결로 갔을 때 어떤 결과가 나올 지 예측할 수 없기에 법원 조정에 응한 것은 정당한 경영 판단이라는 결론을 일관되게 내렸다. 지난 2일 서울 서초동에서 한국일보와 만난 정 전 사장은 배임죄 피해자로서 심경을 밝혔다. 그는 “법원 조정에 응하지 않으면 재판 결과가 어떻게 될 지 예측할 수 없고, 국세청과 세금소송이 끝없이 반복될 것이기에 조정이 합리적이라는 회사 안팎의 법적 자문을 받아 내린 결정이었는데도 검찰은 나를 배임으로 몰고 갔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최선의 경영 판단을 배임이라고 하니 속을 뒤집어 보여줄 수도 없고, 검찰 조사를 받다가 자살하는 사람의 심정이 이해가 가더라”라는 말까지 꺼낼 정도였다. 그는 특히 영세한 업체일수록 억울하게 배임죄로 몰리기 쉽다고 우려했다. 큰 회사는 정상적인 경영 판단임을 뒷받침하는 이사회 회의록 등 무수한 근거 자료가 있어 그나마 방어할 무기라도 있지만, 자료 관리가 미흡한 작은 회사 경영자는 검찰이 마음먹기에 따라 배임죄의 수렁에서 빠져 나오기 어려울 것 같다는 걱정이다. 법무부 검찰 과거사위원회는 지난해 5월 정연주 전 사장에 대한 기소가 검찰권 남용에 해당한다는 결론 내렸고, 검찰은 이를 수용해 대국민 사과를 했다.

최준선 성균관대 법학전문대학원 명예교수는 “검찰이 배임죄를 판단할 때 예전보다 신중해졌을 수는 있지만 그들의 선의에만 맡겨서 해결될 일은 아니다”라며 “기업과 공직사회가 배임죄로 크게 위축된 상태이기 때문에 경영판단의 경우에는 결과적으로 회사에 손해가 가더라도 책임을 면하는 내용이 법에 담기도록 관련법 개정을 서둘러야 한다”고 강조했다.

무안ㆍ진해=이성택 기자 highnoon@hankookilbo.com

박지연 기자 jyp@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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