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대 황제 가운데 누가 가장 뛰어난 인물일까. 사람마다 시대마다 평가 기준이 다르기 때문에 같은 답이 나올리는 없지만 대개 진시황, 한나라 무제, 당나라 태종, 청나라 강희 등이 사극에 자주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중국인들이 좋아하는 황제라고 짐작해도 될 성싶다. 그런데 황제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이 역대 황제를 평가하면 어떨까. 아무래도 일반인들의 안목과는 다르지 않을까.
산해관을 넘어 자금성의 옥좌에 처음 앉은 만주족 황제가 청나라 순치제(재위 1643~1661)이다. 그가 신하들에게 한나라 고조와 문제, 후한 광무제, 당나라 태종, 송나라 태조, 명나라 태조 가운데 누가 제일 낫냐고 물었다. 신하들은 위에 열거한 황제들을 거론했지만, 정작 순치제는 명나라 태조인 주원장(朱元璋, 재위 1368~1398)을 꼽았다. 순치제의 아들 강희제도 남경에 있는 주원장의 효릉(孝陵)을 참배하여 세 번 무릎을 꿇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예를 행했다. 그리고 ‘치륭당송(治隆唐宋)’이라는 비석을 세웠다. ‘주원장의 치적이 당나라 송나라 때보다 낫다’는 의미이다.
청나라 황제들의 칭송에도 불구하고 주원장은 극단적으로 엇갈리는 평가를 받는다. 훌륭한 정치 개혁을 이루고 백성 생활 안정에 힘을 다한 위정자라는 평가와 권력에 미친 잔혹한 살육자라는 대립된 평가이다. 분명 백성에게는 한없이 인자했다. 유난히 농민들에게는 애정이 지극했는데 상인에게는 금지한 비단옷을 농민은 입어도 좋다고 할 정도였다. 반면 측근과 지식인들은 늘 의심했고 거침없는 살육을 자행하였다. 관리들의 부정부패에 대해서는 더 광적으로 가혹했다. 자기 사위가 밀매를 하자 죽였을 정도다. ‘초목자(草木子)’라는 책에는 당시의 살벌했던 상황이 기록되어 있다. ‘조정의 관리들이 매일 아침 입궐할 때 처자식과 눈물로 이별을 고하고, 저녁에 무사히 돌아오면 다시 서로 기뻐하며, 이로써 또 하루를 살았다고 하였다.’ 조금이라도 황제의 권력에 도전할 낌새가 보이는 공신들 역시 모두 숙청했다. 일례로 재상 호유용의 반역 사건에는 도합 3만 명, 장군 남옥의 사건에는 1만5,000명이 연루되어 죽었다.
이런 그의 성격을 말해주는 유명한 일화로 두 장의 초상화 이야기가 전해온다. 한 장은 품위 있는 제왕의 모습이고, 다른 한 장은 추악한 얼굴을 하고 있다. 어떤 초상화가 진짜 주원장의 모습인지는 모른다. 두 얼굴을 갖고 있던 사람이라고 넌지시 알려주는 것 같다. 빈농의 자식으로 태어나 유랑 걸식까지 했던 그가 황제가 되었다는 것은 분명 남다른 수완이 있었음을 보여 준다. 또한 사방에 난립한 반란군을 모두 섬멸한 것은 어떤 잔혹한 일이라도 결행할 성격이 없이는 불가능했으리라.
주원장은 한 고조 유방이 자신처럼 서민 출신이었기에 각별한 애착을 가졌다. 그래서인지 그의 행적을 보면 유방을 본받으려 노력한 모습이 보인다. 인재를 모시려고 애쓰고 고언을 기꺼이 수용했던 점에서는 오히려 유방보다 나았다고 평가할 수 있다. 주원장이 삼고초려 끝에 모신 인물이 여럿이지만 단연코 출중한 인물이 유기(劉基, 1311~1375)이다.
유기의 호는 백온(伯溫)으로 23세에 원나라 진사 시험에 합격한 천재이다. 원나라는 인종 차별이 심하여 남인(南人)으로 천대받던 한족(漢族)은 과거 급제가 하늘의 별 따기였다. 단순한 유학자가 아니라 천문학 수리학에도 뛰어났고, 강직한 성품으로 직언을 서슴지 않았다. 불량배 같은 인물이 많았던 주원장 측근과는 대비되는 고결한 인품과 학식의 소유자였다. 그래서 유방의 장량(張良)과 비견되고 했는데, 주원장도 유기를 나의 ‘자방(子房, 장량의 자)’이라고 했다. 후세에 오면 유기에 대한 존경이 과해져 예언서를 지은 예언자로까지 신비화된다.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이 ‘유백온소병가(劉伯溫燒餠歌)’이다. 주원장이 구운 빵을 먹고 있을 때 유기가 들어와 황제의 물음에 대답하는 형식으로 미래를 예언한 책인데, 지금도 중국의 서점에 가면 심심치 않게 보인다. 유기의 이름을 도용한 예언서가 넘치는 것은 민간에서 그를 얼마나 경모했는지 말해 준다.
그렇게 대단한 유기도 잘못 판단한 적이 있다. 반란군의 지도자로 활약하던 주원장에게는 진우량과 장사성이라는 두 명의 라이벌이 있었다. 주원장은 장사성을 먼저 공격하고 진우량을 공격하고자 했다. 유기가 반대했다. 장사성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런데 주원장은 자기 맘대로 전쟁을 시작했다. 결과는 대승이었다. ‘그대 의견을 듣지 않아도 내가 이길 수 있다’며 거드름을 피울 만도 한데, 주원장의 태도는 예상 밖이었다. “그때 장사성을 공격하는 게 아니었다. 만약 진우량이 기습했다면 속수무책이었다. 그대 말을 안 들었다가 큰일 날 뻔했다”는 것이 아닌가. 유기의 말을 따르지 않아 성공한 것인데도 그의 판단을 존중하며 포용하는 모습을 보인다.
주원장이 명나라를 세우고 유기를 수하로 거둘 수 있었던 비결은 이러한 넓은 도량에서 나왔는지도 모르겠다.
박성진 서울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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