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회의 안건 199건 전체에 신청… 국회 올스톱
선거법ㆍ공수처법 등 상정 막으려 민생법안 볼모로
제1야당인 자유한국당이 29일 ‘유치원 3법’(사립학교법ㆍ유아교육법ㆍ학교급식법), ‘민식이법’(도로교통법 개정안), 일부 ‘데이터 3법’을 비롯해 국회 본회의에 상정될 예정이었던 199건의 안건에 대해 일명 필리버스터(합법적 의사진행 방해)인 무제한 토론을 신청했다. 내달 3일 이후 본회의에 상정될 공직선거법 개정안과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 설치법안, 검경수사권 조정법안 등 패스트트랙(신속처리안건) 법안의 상정 자체를 막기 위한 선제적 조치다.
이에 따라 이날 본회의가 무산되며 민생법안 처리가 불발됐다. 회기 종료를 10여일 앞 둔 정기국회도 사실상 파행 위기에 처해, 국회가 또다시 ‘식물국회’로 전락할 위험에 처했다.
한국당은 이날 오후 의원총회에서 정기국회가 종료되는 12월 10일까지 필리버스터를 이어가기로 결정했다. 이날 본회의에 오르게 될 199건의 안건에 대해 의원 1명당 4시간씩 토론을 하는 방식으로다. 이렇게 되면 이론적으로 한국당 소속 의원 108명이 법안 1건당 총 432시간의 토론을 진행할 수 있으며, 법안 199건에 대해서는 8만5,968시간의 토론이 가능하다. 정기국회 종료까지 11일(264시간) 정도가 남은 만큼, 이 계획대로라면 본회의에서 안건을 하나도 처리하지 못한 채 정기국회가 끝나게 되는 셈이다.
나경원 한국당 원내대표는 의총 후 연 기자회견에서 “불법으로 출발시킨 패스트트랙 폭거의 열차가 대한민국을 절망과 몰락의 낭떠러지로 몰고 있다”며 “불법과 다수의 횡포에 한국당은 평화롭고 합법적인 저항의 대장정을 시작할 것이고, 그 차원에서 필리버스터를 신청했다”고 밝혔다.
한국당의 이날 필리버스터 결정은 그야말로 기습이었다. 오전까지만 해도 나 원내대표는 ‘(당이 반대해 온) 유치원 3법의 본회의 통과 저지를 위해 필리버스터를 고려하느냐’는 기자들 질문에 “아직은 검토하지 않고 있다”고 했다. 오히려 유치원 3법의 자체 수정안을 준비 중이라고 밝혀, 본회의에 들어가 표결에 참여하겠다는 뉘앙스를 풍겼다.
그러나 이는 연막작전이었다. 나 원내대표는 이날 오후 2시로 예정됐던 본회의에 앞서 통상 열리는 의총을 비공개로 전환한 뒤 필리버스터 방침을 전격 발표했다. 이전까지 의총에서는 한 번도 거론되지 않았던 전략이라 의원들도 동요한 것으로 알려진다. 그러나 패스트트랙 법안이 상정되는 것 자체를 막을 유일한 방법이라는 점에서 반대 의견은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은 허를 찔린 분위기였다. 내달 3일 이후 상정될 패스트트랙 법안에 대한 필리버스터는 대체로 예상했었지만, 이날 바로 필리버스터를 선언할 것이라고 예상하는 이는 거의 없었던 탓이다. 민주당 의원들은 이날 본회의에 전원 불참했고, 문희상 국회의장도 “민주당이 들어오지 않으면 본회의를 열 수 없다”며 끝내 개의를 선언하지 않았다. 국회법에 따르면 본회의는 재적의원 5분의 1 이상이 출석하면 개의가 가능해 한국당 의원들만 출석해도 되지만, 이날처럼 법안 처리를 위한 본회의의 경우는 의결정족수(재적의원 과반)가 채워져야 개의가 가능하다는 게 문 의장의 입장이다.
한국당이 민생법안이 줄줄이 걸려 있는 본회의를 앞두고 전격 필리버스터를 결정한 것은 수적 열세인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던진 극약처방의 성격이 강하다. 한국당을 뺀 여야 4당이 공조해 패스트트랙 법안을 처리하려 한다면 막을 방법이 없는 만큼, 예상치 못한 시점에 필리버스터를 신청해 일단 패스트트랙 법안이 상정되는 것 자체를 틀어막아야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민생법안을 볼모 삼아 패스트트랙 법안 저지에 나섰다는 점에서 여론의 후폭풍이 만만치 않을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나 원내대표는 이 같은 비판을 의식한 듯 ‘민식이법 등을 필리버스터를 진행하지 않고 통과시킬 의사가 있느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당연하다. 급한 법에 대해서는 그렇게 할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사실상 ‘통과 시키고 싶은 법만 통과시키겠다’는 뜻으로 해석돼 민주당이 반발하고 있다.
현재로선 한국당의 필리버스터를 막을 방법은 국회법에 따라 재적의원 5분의 3(현재 재적인원 295명 기준 177명) 찬성으로 필리버스터를 강제로 종료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를 위해선 바른미래당의 일부 비당권파까지 설득해야 해 정족수를 확보하기 쉽지 않다는 전망이 나온다.
이서희 기자 shle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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