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은영의 화해’는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인 오은영 박사가 <한국일보>와 함께 진행하는 정신 상담 코너입니다.
저는 7년 전 백혈병에 걸렸습니다. 대학 재학 중에 취직해 1년도 채 안됐을 때였어요. 다행히 여러 사람의 도움 끝에 조혈모세포 이식을 받았고, 죽을 고비 끝에 완치해 대학 졸업 후 지금은 대학원을 다니고 있습니다. 20대 중반을 탄탄히 살아오진 못했지만 저에게 온 병도 나름 이유가 있을 것이라 생각하며 자책하지 않고, 열심히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요즘에는 ‘내가 괜히 살았나’라는 생각이 들어 스스로 목숨을 끊고 싶은 충동이 듭니다. 아버지가 술을 마시고 “돈도 못 버는 주제에, 그때 차라리 죽지, 괜히 살렸다. 석사, 박사 하면 뭐하냐”는 등의 폭언을 하기 때문이에요. 매일 잘 지내다가도 불쑥 아버지가 한 말이 머릿속에 떠오르면서 계속해서 메아리치고, 몹시 우울해져서 일상을 유지하는 게 무서워요.
아버지는 제가 초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아버지가 운영하던 공장이 잘 안돼 실직하고부터 예민해지셨어요. 중학생 때는 갑자기 제가 버릇이 없다며 버럭 화를 냈습니다. 그러고선 한 달 넘게 저와 말을 안 하시더니, 한 달 뒤쯤 저를 불러 “내가 말을 안 하니깐, 너도 불편하지? 그렇게 버릇없이 굴면 다시는 너와 이야기 안 할 거야. 이번만 용서해준다”고 하셨어요. 그럴 때면 어머니는 무조건 잘못했다고 하고 용서를 빌라고 하십니다. 그 이후에도 아버지는 자주 기분이 내키지 않으면 말을 안 하고, 거칠게 행동합니다. 물건을 던지거나 문을 세게 닫고, 욕을 하고요. 그러면서도 본인이 기분이 좋은 날에는 간식도 사오고, 여행도 가자고 합니다.
최근에는 어머니와 제가 주방에서 분주히 저녁을 차리는데,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물 좀 가져와”라고 하셔서 제가 “엄마도 일하고 와서 저녁 준비하는데, 물 정도는 직접 갖다 마시면 안 될까?”라고 한마디 했다가 “가족끼리 물 떠달라고 했는데, 그것도 못 들어주는 게 가족이냐, 버릇없는 X, XXX”라는 폭언을 들어야 했어요. 그리고도 며칠 동안 아버지의 폭언과 폭력에 시달렸어요. 그때도 아버지는 괜히 저를 치료받게 했다며 욕을 했어요.
욕을 들어도 저는 어려운 집안 형편에 부모님이 늘 애쓰고 있다는 걸 잘 알고 감사하게 생각해요. 건설 현장에서 일하는 아버지를 부끄럽게 여긴 적도 없어요. 이만큼 사는 것도 부모님의 헌신 덕분이라고 생각하고요. 제가 아팠을 때 경제적으로 큰 도움도 받은 것에 대해서도 감사하고 죄송해요. 그런데 아버지가 본인을 무시한다고 생각해서 제게 화를 내면서 내뱉는 말들이 ‘내가 괜히 살아서 집안을 더 어렵게 만들었나’라는 생각을 떠올리게 하고, 그런 말을 자꾸 곱씹게 되면서 비참해집니다.
아버지의 폭언을 피해 제가 집에서 독립해도 괜찮지만, 어머니가 마음에 걸립니다. 어머니는 아버지한테 많이 맞춰주시는 편이지만 제가 없으면 영화를 보거나 나들이를 하거나, 잠깐 수다를 떨 친구도 없습니다. 제가 나가 사는 것도 좋아하지 않으신 눈치예요. 그렇지만 매번 욕설과 ‘괜히 치료받게 했다’는 아버지의 말이 시시때때로 제 마음을 꿰뚫고 들어와 저를 우울하게 하고, 세상을 떠나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합니다. 저는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요.
이선희(가명ㆍ29ㆍ대학원생)
선희씨, 병마와 싸워 이기고, 완치가 된 당신을 꽉 끌어안아주고 싶어요. 진단을 받았을 때 얼마나 놀라고 힘들었을지, 치료 과정이 얼마나 고통스러웠을지 저도 잘 알기 때문에 병을 잘 이겨낸 당신이 참 자랑스럽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당신은 지극히 인간적이고, 인간다운 사람이에요. 많은 사람들에게 받았던 혜택, 부모가 치료비를 감당하면서 힘들었던 사정을 마음 깊이 간직하고 그것에 대해 깊은 고마움을 느끼고 있지요. 자신한테 기꺼이 손을 내밀어준 이들에 대한 고마움을 간직하고, 어려운 치료의 과정을 꿋꿋이 잘 이겨내는 것, 그것이 인간다운 겁니다. 그런 당신에게 아버지의 ‘너를 치료하는 게 아니었어’라는 말은 당신의 마음을 얼마나 아프게 하고 헤집어 놓았을까요.
당신의 아버지는 아버지로서 세 가지 문제가 있어요. 첫 번째는 자식의 나이가 몇 살이든, 부모와 자식의 관계에 있어서 부모는 언제나 어른이라는 사실을 모른다는 겁니다. 당신의 아버지는 감정에 따라 잘 토라지고, 그걸로 몇 달간 얘기를 하지 않지요. 그런가 하면 기분이 좋으면 살갑게 행동하지요. 그런 행동은 마치 어린아이를 연상시켜요. 어른답지 않은 아버지이지요.
두 번째는 당신의 아버지는 권위와 독재를 구별하지 못한다는 겁니다. 부모는 언제나 꼭 필요한 만큼의 권위가 있어야 해요. 우리 사회는 권위를 안 좋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만, 권위는 사회가 유지되는 중요한 뼈대 중에 하나예요. 가정과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권위를 인정해야 하고, 그런 권위는 필요합니다. 그런데 선희씨의 아버지는 집안 내에서 아버지로서의 권위를 상대가 떠받들어줘야 하고 무조건 복종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물도 떠줘야 하고, 의견을 내면 안 되지요. 떠받들어줘야 권위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상대를 굴복시키려 합니다. 당신의 아버지는 굴복의 방식으로 상대의 존재를 부정하지요. ‘너를 치료해 주는 게 아니었다’라는 건 존재를 부정하는 얘기예요. 자기의 알량한 자존심이 건드려지면 무시당한다고 느끼고 상대가 자기를 떠받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자기의 권위를 세우겠답시고 언어폭력을 통해 상대를 굴복시키지요. 흔히 부모들이 “너를 낳는 게 아니었어” “내가 왜 너를 낳아가지고”라는 말을 내뱉는데 이런 얘기는 권위가 아니라 독재이고 폭력이라는 것을 꼭 깨달아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당신의 아버지는 배움의 개념을 잘못 알고 있어요. 인간이 꼭 직업을 갖기 위해 배우는 것은 아니에요. 배우는 것의 궁극적 목표는 직장을 갖는 게 아니라 인간답기 위해서입니다. 인간이 여타 동물과 구별되는 것은 배움을 통해 다듬어지고 인간다워지는 데 있어요. 예를 들어볼게요. 저는 아이들에게 시험 볼 때 모르는 문제의 답은 찍지 말라고 해요. 찍어서 운이 좋아 맞으면 아는 문제라고 착각하고 그냥 넘어가면 모르고 맙니다. 시험은 내가 무엇을 알고 모르는 것인가를 확인하고 제대로 배우기 위한 목적이 크지요. 모를 때는 틀려야 해요. 틀리면 다시 배우면 됩니다. 배움의 궁극적 목표는 점수가 아니고 제대로 배우고 깨닫게 돼서 인간다워지는 것이에요. 당신의 아버지는 이 과정의 중요함을 잘 모르는 것 같아요. 대학원에 다니면서 공부를 하는 것의 가치를 모릅니다.
인간이 성장할 때는 보이지 않는 가치가 훨씬 더 중요한 게 많아요. 타인에 대한 공감, 이해력, 옳고 그름을 구별하는 능력, 불의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 약자에 대한 배려, 인간은 협조와 협동을 한다는 것, 어떤 모습이든 존재하는 것으로 소중함을 느끼는 것, 이런 게 모두 보이지 않는 가치들이에요. 이 가치를 당신의 아버지는 모르고 있어요. 무형의 가치보다 당장 눈에 보이고 측정할 수 있는 것을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지요. 반대로 당신은 보이지 않는 가치를 너무나 잘 알고 있지요. 그래서 타인에 고마워할 줄 알고, 부모에게도 고마움을 느껴요. 당신은 매우 인간답고, 인간적인 사람이에요. 그런 당신이 아버지를 생활에서 맞닥뜨릴 때 얼마나 괴로울까요.
당신의 어머니는 순종적이고, 헌신적인 분 같아요. 아버지와 평생을 살면서 아버지와는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때 그때 그 순간을 넘어가는 것이 가장 현명한 방법이라는 걸 알고 있어요. 한 가지 아쉬운 점은 폭언에 시달리는 딸에게 “아버지의 행동은 옳지 않아, 네 아버지는 평생 그렇게 살아왔으니, 아버지를 바꾸는 데 너의 에너지를 빼지 마, 네 생각이 옳지만 무조건 따라주라고 하는 것은 네 에너지를 소진하지 않게 하기 위함이야”라고 설명해주었더라면 아마 당신은 상처를 덜 받았을 거예요.
선희씨, 당신은 극복하기 힘든 병마도 잘 이겨냈어요. 다른 사람들로부터 도움을 받았지만 당신이 병을 이겨내고 완치된 가장 큰 공은 당신 스스로가 당신 생명을 구하기 위해 애썼기 때문이에요. 당신은 참 훌륭합니다. 건강을 회복해서 생존하는 것은 당신을 위해서 아주 잘한 일이에요. 그것은 아버지가 기분이 나쁠 때 당신에게 폭언을 한다고 훼손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언제나 절대적 가치를 갖고 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생존한다는 것은 절대적인 가치예요. 이것을 꼭 명심해 두고 잊지 마세요.
나이가 서른쯤 되면 아버지와 사이가 좋더라도 독립을 해도 되는 나이예요. 아버지가 싫어서, 아버지를 피해서 도망 나온다고 생각하지 말고, 건강도 회복했고 주체적인 삶을 살기 위해서 때가 됐다고 생각하고 독립하기를 권합니다. 아버지와 의식주(생활)만 공유하지 않더라도 자극이 덜할 거예요. 어머니가 딸의 집에 와서 지내기도 하고, 자주 만나고 주말에 영화도 보고, 지금과 같은 생활을 비슷하게 유지하는 것은 가능한 일이에요. 어머니와 멀어지는 것도 아니고, 아버지와 등을 돌리고 의절하는 것도 아니에요. 아버지가 보기 싫어서 나오는 것도 아니며, 부모를 저버리는 것도 아니에요. 당신은 독립할 능력이 있으니 두려워하지 말고 그렇게 하세요.
아버지를 이해하고 용서할 수 없지만 그를 잘 알아차려야 해요. 아버지가 그렇게밖에 말을 못하는 것은 아버지의 문제이고, 어른답지 못한 아이 같은 아버지는 당신이 알려줘서 바뀌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아버지가 또다시 폭언을 할 때 마음 속으로 ‘아직도 저러시는구나’라고 생각하고 ‘속상해도 그런 말은 하지 마셔야죠’라고 마음속으로 생각하고 그냥 넘기도록 해보세요. 아버지의 폭언은 잘못됐지만, 그가 당신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는 건 아니에요. 아버지도 당신이 살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순간들이 훨씬 많을 거예요.
선희씨, 당신은 선하고 인간답고, 병을 이겨낸 내적인 힘도 있어요. 그것을 잘 이겨냈을 때는 어떠한 보이지 않는 무형의 정신적 영역으로 본다면, 당신이 살아야 할 큰 의미가 있기 때문이고 당신 존재 자체가 좋은 역할을 하기 때문이에요. 아버지가 하는 말에 당신의 가치를 훼손시키지 마세요. 당신은 당신의 인생을 살아가야 합니다.
정리=강지원 기자 stylo@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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