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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붓다를 넘어서는 우리의 행복

입력
2019.11.21 04:40
3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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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의 한 왕자는 왕궁의 삶에 만족하지 못하고 명상을 통해 완벽하게 행복한 자, 붓다가 된다. 그리고 이 행복을 사람들에게 가르쳤다. 이것이 바로 불교다. 때문에 모든 불교는 그것이 어떤 불교든 간에 핵심에 명상이 있다. ©게티이미지뱅크
인도의 한 왕자는 왕궁의 삶에 만족하지 못하고 명상을 통해 완벽하게 행복한 자, 붓다가 된다. 그리고 이 행복을 사람들에게 가르쳤다. 이것이 바로 불교다. 때문에 모든 불교는 그것이 어떤 불교든 간에 핵심에 명상이 있다. ©게티이미지뱅크

경제력이 안정되면서 웰빙과 힐링이 유행하더니, 이제는 심리 상담과 명상으로 옮겨붙고 있다. 건강을 넘어선 행복의 요구가 빗발치는 것이다. 외적인 기술변화에서 4차 산업이 최대의 화두라면, 내적으로는 단연 명상을 꼽을 수 있다.

불교는 원래 종교라기보다는 명상주의다. 인도의 한 왕자는 왕궁의 삶에 만족하지 못하고 명상을 통해 완벽하게 행복한 자, 붓다가 된다. 그리고 이 행복을 사람들에게 가르쳤다. 이것이 바로 불교다. 때문에 모든 불교는 그것이 어떤 불교든 간에 핵심에 명상이 있다.

동아시아의 선불교는 명칭부터가 선(禪), 즉 명상 불교다. 이런 점에서 선불교는 붓다의 정신을 가장 오롯하게 계승하고 있다. 우리나라 선불교의 대변자는 조계종이다. 때문에 조계종 승려들은 현대에도 겨울 집중 수행을 위해 2,000명 이상이 동안거(冬安居)에 들어간다. 다람쥐도 잠드는 겨울에 승려들은 선원에서 자기로부터의 투쟁과 혁명에 나서는 것이다.

동안거 기간에는 그에 맞춘 특별한 체계가 필요하다. 그래서 선원에서는 용상방(龍象榜)이라는 소임표를 짜서 내건다. 용상방은 ‘용 같은 능력을 갖춘 코끼리’가 되어 보자는 수행 대중의 의지다. 불교에서 용상은 붓다에 대한 상징이기 때문이다.

선원에는 간혹 ‘선불장(選佛場)’이라는 현판이 내걸린 곳도 있다. 이는 ‘붓다를 뽑는 과거장’이라는 의미다.

당나라 때 단하천연은 과거시험을 보러 가던 도중 한 사찰에 유숙했다. 예전에는 과거시험도 어렵지만, 과거장까지 가는 것도 보통 난제가 아니었다. 이때 주지 스님은 저물녘 청춘의 가슴에 불을 지른다. “젊은이는 어디를 가는 길인가?” “과거를 보러 서울에 가고 있습니다.” “관리로 선발되는 것보다는 붓다로 선발되는 것이 더 좋지 않을까?” “세상에 그런 곳도 있습니까?” “여기가 바로 선불장이라네.” 이렇게 해서 천연은 그 사찰에 주저앉았다. 진정한 행복은 관직과 재산에 있지 않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개처럼 자유로운 생활을 추구한 희랍의 철학자 디오게네스에게, 하루는 알렉산더가 찾아와 소원을 물었다. 헐벗은 상태로 햇볕을 쬐던 디오게네스는 담담하게, 태양을 가리지 말고 비켜 줄 것을 요구했다. 단 1초의 주저함도 없이 사용된 소원인 셈이다.

디오게네스는 천금 같은 기회를 잃은 바보였을까? 우리는 알렉산더가 끊임없는 정복 전쟁 과정에서 33세에 요절한 것을 알고 있다. 살육의 전쟁터를 누비다 죽은 희랍 최고의 제왕, 그는 과연 디오게네스보다 행복했을까?

다시 천연의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천연이 깨침을 얻은 후 하루는 어떤 절에 유숙하게 됐다. 그런데 사찰의 주지는 구두쇠여서 객승의 방에는 군불을 안 지펴줬다. 천연은 이 문제를 매우 기괴한 방식으로 해결한다. 법당의 나무 불상을 가져와 아궁이에 넣고 불을 지핀 것이다. 그리곤 뜨끈한 방에서 금세 곯아떨어졌다. 새벽 예불을 하려던 주지 스님은 아연실색해, 죽일 듯한 기세로 천연을 찾아와 항의했다. 이때 천연은 태연하게 말한다. “화장해서 사리를 수습하는 중입니다.” “목불에서 어떻게 사리가 나온단 말이오?” “그럼 붓다가 아닌데, 장작으로나 쓰면 될 일 아닙니까!”

이 일화는 선불교의 형상주의에 대한 부정을 잘 나타내준다. 그리고 ‘대장부의 큰 뜻에는 붓다가 되는 것마저도 들지 않는다’는 웅대한 호연지기를 드러내 주고 있다. ‘나의 나됨’, 이것이야말로 수행자의 멋이며 명상에 함축된 진정한 행복이 아닐까?!

삶에 지친 도시인들이 산사의 선승이 될 수는 없다. 그러나 명상은 자기로부터의 혁명이 아니던가! 이런 점에서 행복은 멀리 있지 않은 ‘나의 나에 대한 추구’임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행복은 선택이 아닌 인간 존재의 정당한 권리이므로...

자현 스님ㆍ중앙승가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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