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희정 아나운서와 아버지 임동명씨 동반 인터뷰] 
 50년 건설 노동자 아버지, 새벽 3ㆍ4시에 출근해 힘들게 일해온 삶 
 임희정 아나운서, 취업 준비 때부터 부모 재력ㆍ학벌 등 편견 부딪쳐… 
 “노동 천대시 하는 사회…모든 노동자 존중 받았으면” 
[저작권 한국일보] 임희정 아나운서와 아버지 임동명씨가 손을 맞잡고 있다. 아나운서의 고운 손이 50년 동안 건설노동을 하며 거칠어진 아버지의 손을 다독인다. 서재훈 기자 spring@hankookilbo.com

딸이 아버지와의 동반 인터뷰를 승낙한 건 “아빠가 신문에 난 사진을 보면 좋아하실 것”이라는 이유였다. 아버지를 언론에 내세우는 게 걱정돼 한 차례 거절했다가 마음을 고쳐먹었다.

아버지는 자신의 이야기를 담은 이 기사도, 딸이 자신에 대해서 쓴 책도 읽지 못한다. 아버지는 학교를 다니지 못했고, 글을 모른다. ‘50년 건설 노동자’로 살면서 보통 새벽 4시30분, 지방으로 갈 때는 3시10분에 집을 나섰다. 주택을 짓고 아파트를 세웠으며, 3층 높이에서 떨어져 얼굴 광대뼈 부위가 주저앉은 적도 있다. 그렇게 자식 3명을 키워냈고, 막내딸은 아나운서가 됐다.

왠지 ‘부잣집’ 딸에게만 허락될 것 같은 아나운서라는 직업. 임희정(35) 아나운서(프리랜서)는 너무나 당연하게 기대하는 눈빛과 말투로 “우리 임 아나운서님 아버지는 어느 회사에 다니세요”라는 질문을 받곤 했다. 아버지가 어느 대학을 나오셨는지도 물었다. 돈, 학벌, 타이틀, 명예가 사람을 평가하는 기준인 사회에 질식해, 임 아나운서는 아버지의 직업을 숨겼고 그것은 늘 아프고 갑갑했다. 그것을 풀기 위해 임 아나운서는 2년 전부터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로서 부모 이야기를 연재하기 시작했다. 얼마 전 ‘나는 겨우 자식이 되어 간다’(수오서재)라는 책도 냈다.

보통 자식이 부모 가슴에 못박힌다는데, 가난 속에 분투하며 ‘흙수저’에 사랑을 담뿍 담아준 부모는 자식의 가슴에 못박히나 보다. 기자가 아버지에게 “자식들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들었는지”를 물었을 때, 눈물은 딸의 눈에서 흘렀다. 노동의 가치를 제대로 인정하는 사회였다면 성실한 노동자의 딸이 눈물을 흘릴 일은 없지 않았을까.

 ◇세상의 기준대로 부모를 평가했던 시절 

임 아나운서는 어렸을 때부터 부모에 대해 생각이 많았다. “어릴 때는 내가 해달라는 것이나 사달라는 것을 못 사주시니까 어린 마음에 투정 부리는 정도였죠. 나이를 먹으면서 다른 부모님들하고 우리 부모님들이 달라 보이는 거예요. ‘우리 아빠 회사 다녀’ 하는 평범한 친구들의 말도 저에게는 부럽게 느껴졌어요. 회사를 다닌다는 것 자체도 저희 아버지는 한번도 해본 일이 아니시니까. 다른 아버지는 정장을 입고 회사에 출근하는데 저희 아버지는 항상 후줄근한 작업복을 입고… 그런 것들이요. 엄마는 다른 엄마들보다 촌스러워 보이기도 했고요. 그리고 엄마 아빠는 왜 한글을 잘 읽고 쓰지 못할까 하는 생각들, 그런 게 쌓이고 쌓이다 보니까 사회 생활을 하면서 아버지 직업을 묻는 말에 제대로 답도 못하고, 숨기거나 부끄럽게 생각했던 거예요.”

[저작권 한국일보] 임희정 아나운서와 아버지 임동명씨의 단란한 모습. 지난달 30일 한국일보 사옥에서 인터뷰에 응한 부녀는 서로에 대한 사랑과 존경이 가득했다. 서재훈 기자 spring@hankookilbo.com

아나운서 선후배를 보면 그의 집과 배경이 비슷한 사람은 아무도 없어 보였다. “다들 중산층 이상의 가정 같아 보였고, 심지어 되게 고위직 가정이거나 잘사는 친구들도 너무 많았어요.”

취업준비생 시절엔 물질적인 면도 힘들었다. 정장도 여러 벌 사야 하고, 한번 카메라테스트를 받기 위해서 헤어ㆍ메이크업을 할 때마다 10만원 정도가 들었다. 다른 친구들은 부모님 지원을 받아서 하는데 시험 비용을 벌기 위해 늘 아르바이트를 했다.

그는 아나운서를 준비하면서 “‘할 수 있을까’가 아니라 ‘내가 해도 될까, 내가 이 꿈을 가져도 될까’를 생각했다”고 말했다. “내 배경하고는 어울리지 않는 직업 같아 보였거든요. 저도 아나운서지만 아나운서를 바라보는 편견이 있었던 거죠.”

광주MBC, 제주MBC 아나운서로 일하다가 2016년 9월 프리랜서로 나서면서 여유가 생기자 본격적으로 부모 이야기를 쓰기 시작했다. 갑갑함을 푸는 방식이었다. 그의 글에는 초등학교 4학년 때까지 서울의 단칸방에서 살았던 가난, 언제나 힘들게 일하고 지쳐 있던 아버지, 가사와 부업을 하며 가정을 일군 어머니, 집안 형편 때문에 전남 무안의 할머니 손에서 커야 했던 두 오빠의 이야기들이 담겨 있다.

임 아나운서는 “사회생활을 하면 돈이라든지 학벌이라든지 타이틀, 명예 같은 것들로 남들이 나를 평가하곤 하잖아요. 거기에 맞춰서 그 기준으로 저희 부모님을 보면 한없이 작고 낮아 보이는 거예요. 부모님을 원망하거나 부끄러워한 시절이 있었죠. 저도 돈도 벌어보고 결혼해서 삼시세끼 밥도 지어보니 매일매일 노동을 반복한다는 게 얼마나 대단한 일이고 매일매일 가족들을 위해 끼니를 챙긴다는 게 얼마나 위대한 일인지 뒤늦게 알게 된 것 같아요. 저희 부모님이 저에게 주셨던 매일매일의 노동, 사랑, 헌신이 더 위에 놓여야 해요. 이제야 뒤늦게 알게 된 거죠”라고 말했다.

 ◇새벽 3시에 일하러 갔던 노동자 아버지 

아버지 임동명(71)씨는 귀가 잘 들리지 않아 4급 청각장애 판정을 받았고 보청기를 끼고 있다. “혹시 다치셨는지” 묻자, “아니 이게 빳데리가 약해가”라고 답했다. 나이가 들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렇게 됐다. 딸이 아버지 옆에 꼭 붙어 기자의 질문을 전달했다. “아빠, 일할 때 공사장에서 어떤 일 했는지”를 묻자 “공사장 할 때? 주택 같은 데(것), 옛날에 아파트를 많이 했어요(지었어요). 서울에 5층짜리, 19층짜리를 막 계속했어요. 지금 (우리 나이) 일흔둘인데 여태까지 노동일만 계속했었죠.”

[저작권 한국일보] 임희정 아나운서의 아버지 임동명씨. 서재훈 기자 spring@hankookilbo.com

“아빠, 일할 때 몇 시에 일어났지?”하고 역시 딸이 질문을 전달하자 “첫차 타려면 보통 4시 반 정도, 지방 같은 경우에는(지방으로 일하러 가야 할 때는) 보통 3시 10분, 20분 이렇게 나가고. 끝나고 집에 오면 요즘(가을)은 5,6시 반 정도. 여름에는 좀 더 늦게까지 6시 반, 7시 그 정도 해요.” 날마다 새로운 일거리를 구할 때도 있었고, 몇 달씩 지방에 가서 여인숙에서 묵으며 일할 때도 있었다. 임씨는 가난 때문에 고향 무안에서 1970년대 서울로 올라왔다. “옛날에 청소부로 들어갈려고 했어요. 그러다 노가다(건설 노동)를 했었죠.”

“자녀들을 잘 키우셨는데, 아이들 보시면 어떤 생각이 들었는지” 물었다. 임씨는 웃으며 “많이 기억이 안나요”라고 말했다. 아버지가 대답하는 모습을 지켜보던 딸은 목이 메고 한동안 눈물을 흘렸다.

자녀 학비 걱정 같은 것은 없었는지 묻는 질문에 “제가 학비를 제대로 대 주도 못 허고(하고). 대학 2년은 제가 노동일 해가지고 (뒷바라지를) 했어요. 그러다가 인자 제가 돈을 제대로 못 대 주고, 참 힘들더라고요. 지 노력대로 해가지고 융자받아서 대학까지 나오고 아나운서도 하고. 뒷바라지를 제대로 못 해줘서 딸한테 참 그렇죠. 못해준 것이 제일 한이에요. 제가 돈 있고 그러믄(그랬으면)….”

임씨는 어떤 점이 가장 힘들었을까. 집안형편이나 사회의 편견 같은 것이 힘들게 느껴졌는지 묻자, “아무래도 노동일을 하니까 힘들었죠. 쇳덩어리 같은 것 들어 올리고 조립하고 그러니까요”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하루하루 고된 노동에 지친 그는, 딸의 고민이었던 사회적 편견은 생각할 여유조차 없었던 것이다.

[저작권 한국일보] 임희정 아나운서. 서재훈 기자 spring@hankookilbo.com

임씨가 주로 기자에게 하고 싶은 말은, 여느 부모가 그렇듯 “똑똑한 딸” 자랑이었다. 아버지는 사뭇 들떠서 말했다. “우리 딸은 어느 회사에 시험을 친다 하면 도서관에 가서 하루 종일 거가(거기) 있어요. 밥을 먹었는가 안 먹었는가 나는 몰라. 큰 회사 같은 데 한두 명 뽑는데 그것도 차고 들어가더라고요. 아따 니가. (허허) 속으로는 머리가 영리하구나 (했어요). 느그(너희) 딸은 그렇게 영리하다고 다 말해요. 방송국에 가(들어가) 있었잖아요. 사람들이 인터넷 해가지고 (아나운서로 일하고 있는 것을) 알고 느그 딸은 정말 머리 좋다고 해요. 동네 사람들이 다 말해요.”

 ◇이 세상 모든 노동자 부모가 자랑이었으면 

임씨는 다리에 지금도 상처가 많다. 안전조치가 부실한 한국의 건설 현장에서 일하면서 다치고 살갗이 찢어지는 일은 예사였다. 추락 사고도 겪었다.

임 아나운서는 함부로 남들이 지칭하는 아버지의 직업, 즉 ‘막노동’이라는 말이 싫었다. 하지만 이제 ‘단어’가 중요한 것은 아니라는 걸 안다. “단순히 막노동이라는 용어의 ‘막’ 자를 빼고 다른 단어로 대체한다든가, 다른 직업군으로 분류해서 새롭게 이름을 붙여 부른다든가 이런 것은 중요한 게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것은 겉에 씌워진 껍데기고 불려진 이름일 뿐이니까요. 중요한 것은 노동자를 바라보는 시선이죠. 노동을 천대시하고 마치 못 배우고 가난한 사람들만이 하는 일처럼 우리 사회 속에 인식되어 있잖아요. 그게 바뀌지 않는 한 아무리 ‘막’자를 뗀다고 해도 해결될 문제는 아닌 것 같아요. 비단 노동뿐 아니라 각자의 배경이나 직업, 일을 존중해 주는 인식이 우선 돼야 하죠. 아빠 직업을 부끄러워했던 이유도 제가 스스로 당당하지 못했던 이유가 제일 크고요. 두 번째는 그런 사회적인 편견하고 인식 때문이었거든요.”

[저작권 한국일보] 임희정 아나운서와 아버지 임동명씨의 단란한 모습. 지난달 30일 한국일보 사옥에서 인터뷰에 응한 부녀는 서로에 대한 사랑과 존경이 가득했다. 서재훈 기자 spring@hankookilbo.com

임 아나운서는 부모에게 받은 것이 정말 많음을 느낀다. “부모님이 여유가 없었고 힘든 시간들이 있었지만 저를 굉장히 믿어 주셨어요. 저한테 가장 많이 하신 말씀이 ‘암시롱 안 해(아무렇지도 않아)’였는데, 제가 뭘 하든 제가 어떤 결과를 가지고 오든 ‘너는 항상 잘하고 책임질 줄 아는 아이니까 너 하고 싶은 대로 해라, 잘할거다’라는 믿음요. 그래서 여유는 없었지만 제 자존감은 높았던 것 같아요. 제가 저를 믿을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요즘 청년들은 저보다 더 여유 있는 환경을 가졌어도 본인 스스로에 대한 믿음이라든지 자존감은 많이 낮아져 있는 것 같아요. 여러 요인들이 있겠죠. 자꾸 실패를 경험했다거나 하는. 가장 밑바탕에 중요한 것은 내가 나를 믿는 것이라는 점을 말하고 싶어요.”

[저작권 한국일보] 임희정 아나운서와 아버지 임동명씨가 지난달 30일 한국일보 사무실에서 함께 자리했다. 건설노동자로 성실히 일해온 자랑스러운 아버지, 그리고 아나운서가 된 딸이 서로에 대해 이야기하는 자리였다. 서재훈 기자 spring@hankookilbo.com

임 아나운서는 자신이 쓴 부모 이야기 때문에 이름이 실시간 검색어에 오른 적이 있고 그때 이메일을 50~60통 받았다. “본인의 아버지도 소위 말하는 ‘막노동’을 했는데 자기도 부끄러워서 말하지 못했다, 아버지가 정육점에서 고기 써는 일을 오래 하셨는데 항상 피가 묻어 있는 그 모습이 너무 창피해서 못 본 척하거나 그냥 지나친 적도 있었다, 이런 사연들이었어요. 저랑 너무 똑같았던 거예요. 부끄러워하고 숨겼던 시간들이 있었던 거죠. 제 글로 용기를 많이 얻었다고 하시는데, 저는 그분들이 저에게 보내 주신 말들 때문에 더 용기를 얻게 됐어요. 책을 준비하면서도 제 부모님의 이야기니까 사적이고 사사로운 부분이 아닐까 조심스러웠는데 너무 많은 분들이 내 부모 이야기 같고 내 이야기 같다는 말을 해주시거든요. 우리가 사는 결은 크게 다르지 않구나. 그게 저한테는 또 위안이 되더라고요.”

임희정 아나운서와 어머니 조순덕, 아버지 임동명씨가 함께한 모습. 임희정 아나운서 제공.

나이가 들면서 건설 일이 없어져 고민이 많았던 임씨는 몇 달 전 청소 노동자로 다시 일을 하게 됐다. “일이 없응께. 멍청이같이 잠만 잔다”고 말하는 아버지가 안타까워, 임 아나운서는 함께 주민센터에 가서 구직 등록을 했다. 다행히 집 근처 아파트 외곽 미화원 자리가 나서 들어갈 수 있었다. 임 아나운서는 “아버지는 항상 ‘뭐라도 일을 해야 하는데, 돈을 조금이라도 벌어야 하는데’라고 생각하셨고요. 집 근처 공사장도 찾아가 써 달라고 말도 해 보고 주민센터에 가서 노인일자리 없는지 알아도 보고 하셨어요”라고 전했다. 노년기에도 여전히 일을 하는 그는, 노동자의 삶에 세상이 들이대는 잣대 ‘흙수저’라는 말을 알까? “아버님은 혹시 ‘흙수저’ ‘금수저’라는 요새 말을 아실까요”라는 기자 질문에 임 아나운서가 “아빠, 흙수저가 뭔지 알아?”라고 물었다. “어? 흐수저”라고 임씨는 되물었다. 딸은 “모르실 거예요”라고 말했다. 오히려 다행이라 여겨졌다.

 ◇사진 찍던 기자를 울게 만든 아버지 

인터뷰가 끝나고 부녀가 함께 사진촬영을 할 때, 임씨는 여느 아버지처럼 포즈가 뻣뻣하다. 긴장을 풀어 주기 위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던 사진기자는 “우리 아버지 같다”며 눈물지었다. 촬영도 잠시 중단됐다. 사진기자의 말에 임 아나운서도 다시 눈물을 흘렸고, 임씨는 “우리 딸 사랑한다”고 말했다. 딸은 “아빠에게 처음 들어 보는 말”이라고 했다. 사진촬영을 담당한 본보 서재훈 기자는 “저희 아버지도 서울에서 일하시다가 다쳐서 낙향하셔서 화물트럭 장사를 하셨는데, 나이도 고향도 비슷하고 아버지 생각이 났다”고 했다. “제 아버지도 팔짱을 끼고 사진을 찍으면 팔이 뻣뻣해서 촬영이 잘 안 돼요. 팔에 힘을 빼셔야 한다고 말하다가 아버지 생각이 나서요.” 어느 곳에서나 만날 수 있는, 우리의 노동자 부모와 그 아들딸 모습이다.

이진희 기자 river@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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