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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조문 대신 소설… ‘법조인 소설가’에겐 특별한 무엇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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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조문 대신 소설… ‘법조인 소설가’에겐 특별한 무엇이 있다

입력
2019.11.05 04:40
수정
2019.11.05 09:46
2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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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권 한국일보]소설 쓰는 법조인. 그래픽=신동준 기자
[저작권 한국일보]소설 쓰는 법조인. 그래픽=신동준 기자

최근 출간된 ‘암흑 검사’는 13세 초등학생 살인 사건을 중심으로 심신 미약 감형, 소시오패스 범죄 등 묵직한 주제를 검사와 피고인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풀어낸 장편소설이다. “현실감 있는 스토리, 숨 막히는 심리 싸움, 머뭇거림 없는 전개, 모든 것이 완벽하다”는 평가와 함께 카카오페이지와 CJ ENM이 주최한 제2회 추미스 소설 공모전에서 우수상을 수상했다. 흥미롭게도 작가는 현직 검사다. 대중문화에서 권력에 눈먼 악의 화신, 아니면 정의의 사도로만 그려지는 대한민국 검사들의 진짜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 소설을 쓰게 됐다는 초연(필명) 검사는 보통 사람들처럼 감정도 있고, 약점도 있는 평범한 검사들의 모습을 소설에 담아냈다.

‘소설 쓰는 법조인’이 몰려오고 있다. 동명 TV드라마로도 만들어져 대중에게도 친숙한 장편소설 ‘미스 함무라비’의 작가이자 서울중앙지법 부장판사인 문유석 작가, 추리소설 ‘변호사 고진’ 시리즈로 유명한 전 서울북부지법 부장판사 출신의 도진기 작가, 1억원 고료의 세계문학상을 수상한 전 의정부지법 판사인 정재민 작가 등이 법조인 소설가의 대표주자들이다. 남다른 이야기와 필력으로 무장해 한국 소설에 새 바람을 불어넣고 있는 이들의 창작세계를 들여다봤다.

◇소설 쓰는 이유? “창의성ㆍ상상력 발휘하고파”

같은 ‘법조인’이라고 해서 소설을 쓰는 이유도 다 같을 수는 없다.

도진기 전 판사의 경우 “(판사 일이) 철저히 개인을 죽이고 법 시스템을 우선해야 하는 업무다 보니, 창의성이나 상상력이 발휘할 수 있는 다른 일을 해보고 싶었다”고 소설을 쓰게 된 이유를 밝혔다. 정재민 전 판사는 “정신적인 것들을 모두 담아낼 수 있는 틀이 ‘소설’이라고 늘 생각해왔다”며 “판사 일을 하면서 사업 같은 일을 병행하기는 힘들겠지만, 소설 쓰는 것은 앉아있으면 할 수 있는 일이니 성의만 있다면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초연 검사는 문예창작학과 진학을 희망했을 정도로 ‘문청’이었다. 그는 “정신 없이 공부하고 앞을 향해 달려가는 와중에도 언젠가는 소설을 쓰겠다는 막연한 소망을 놓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언제 시작하냐는 단순히 타이밍 문제였다”고 했다.

문유석 판사의 소설 ‘미스 함무라비’는 동명의 TV드라마로도 만들어졌다. 스튜디오앤뉴 제공
문유석 판사의 소설 ‘미스 함무라비’는 동명의 TV드라마로도 만들어졌다. 스튜디오앤뉴 제공

◇실제 사건은 소재로 하지 않는다

법조인이라고 하면 직업 특성상 주변에 소설의 소재가 무궁무진하게 널려있을 것이라 생각되지만, 의외로 다들 “실제 사건은 소재로 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재판을 하면 굉장히 많은 아이디어를 얻게 될 거라고 생각들 하지만, 절대 직접 재판한 사건은 쓰지 않아요. 칼로 잔인하게 살해하거나, 친부가 자녀를 강간하거나, 그런 이야기를 문학으로 형상화시키고 싶지 않아요.”(정재민 전 판사) “실제 사건을 소재로 쓰는 것은 직업윤리상 적절하지 않죠. 게다가 의외로 실제 사건은 우발적이고 허술한 경우가 많아서 추리 소설의 소재로는 어울리지 않는 경우가 많아요.”(도진기 전 판사) “실제 사용되는 범행수법이나 수사기법을 쓰는 건 최대한 지양해요. 작가이기 전에 검사이기 때문에, 수사기밀 누출이나 악용, 모방범죄 시도를 우려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죠.”(초연 검사)

◇도대체 언제 소설을 쓰냐고?

대한민국에서 가장 바쁜 직업을 꼽자면 빠지지 않을 이들이 법조인이다. 본업만으로도 눈코 뜰새 없이 바쁠 것 같은데, 소설은 도대체 언제 쓰는 걸까.

“‘암흑검사’의 초고는 사실상 KTX 안에서 완성된 거나 다름없어요. 지방 근무 중이어서 대중교통 안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았거든요. 출퇴근 시간, 식사 시간, 회식 시간, 집안일 하는 시간 틈틈이 구상을 해두고 잠들기 전 한 두 시간 바짝 집중해 글로 옮겼죠.”(초연 검사) “판사 때는 주중에는 판사 업무에 집중하고 주말 새벽 가족들이 다 잠든 시간에 소설을 썼어요. 그래도 판사 때는 주말 이틀이 보장되기 때문에 소설을 쓸 수 있었는데 변호사가 되고 나서는 주말을 가리지 않고 일이 오기 때문에 더 쓰기가 힘들어졌어요.”(도진기 전 판사)

수백장의 수사자료를 읽고 논리가 집약된 판결문을 써내야 하는 법조인들에게 소설창작은 생각보다 도전 해볼만한 일이다. 게티이미지뱅크
수백장의 수사자료를 읽고 논리가 집약된 판결문을 써내야 하는 법조인들에게 소설창작은 생각보다 도전 해볼만한 일이다. 게티이미지뱅크

◇법조인, 의외로 글과 매우 친숙한 직업

그렇다면 왜 법조계에서 소설가들이 많이 배출되는 것일까. 법조 업무 자체가 ‘글’과 밀접하기 때문이다. 수 백장에 달하는 수사 자료를 검토하고, 판결문 하나에 모든 논리를 집약시켜야 하는 법조인들에게, 소설 창작은 생각보다 ‘도전 해볼만한’ 일이다.

“법조인들은 논리적으로, 간결하게, 읽는 사람이 단번에 이해할 수 있는 글을 쓰기 위해 연습해요. 감정과 인간성에 호소하면서 사람의 마음을 흔들어 놓는 글을 쓸 때도 있죠. 다양한 사람과 사건을 만나고 그에 대한 생각을 글로 녹여내는 작업을 하고 있으니 어떻게 보면 모든 법조인이 기본적으로는 작가라고 볼 수 있을 것 같아요.”(초연 검사)

◇소설 쓰는 의사, 기자, 인권위조사관도 있다

최근 들어 잇달아 법조인 소설가들이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일이 늘어났지만, 저마다의 전문성을 살려 소설가로 나선 직업인들은 다양하다. 대림성모병원 원장이자 유전성 유방암의 국내 최고 권위자인 김성원 박사는 최근 유방암 관련 의학 정보를 소설로 풀어낸 ‘시시포스의 후손들’을 냈다. 김유명 서울대 대학원 성영외과학 박사는 지난해 프로포폴을 소재로 한 재난 소설 ‘마취’를 펴냈다. 추리소설가인 최혁곤 작가, 송시우 작가 역시 각각 현직 기자이자 국가인권위 소속 공무원으로 직업 전문성을 십분 활용해 추리소설을 쓰며 자신만의 독특한 작품세계를 펼치고 있다.

한소범 기자 beom@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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