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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덕현 칼럼] 촌스러움의 가치

입력
2019.10.31 18:00
2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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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드라마에서 촌스러움의 가치를 드러내는 건 사투리의 정감이나 시골 사람들의 따뜻한 정만을 뜻하는 게 아니다. 황용식이라는 인물에 투영된 촌스러움의 가치는 어떤 편견이나 선입견 없이 있는 그대로 어떤 존재들의 가치를 바라봐주는 그 시선에서 나온다. KBS ‘동백꽃 필 무렵’ 영상 캡처
이 드라마에서 촌스러움의 가치를 드러내는 건 사투리의 정감이나 시골 사람들의 따뜻한 정만을 뜻하는 게 아니다. 황용식이라는 인물에 투영된 촌스러움의 가치는 어떤 편견이나 선입견 없이 있는 그대로 어떤 존재들의 가치를 바라봐주는 그 시선에서 나온다. KBS ‘동백꽃 필 무렵’ 영상 캡처

‘촌(村)’의 사전적 의미는 ‘도시에서 떨어져 자연적으로 형성된 마을’이란 뜻이다. 농촌은 농업에 종사하는 주민들이 거주하는 지역이고, 어촌은 수산업에 의존하여 생활하는 사람들이 거주하는 촌락을 뜻한다. 본래 촌의 의미에는 어떠한 가치 평가가 들어 있지 않다. 하지만 촌이란 단어를 활용해서 쓰는 말들 속에는 노골적인 가치 평가가 담긴다. ‘촌스럽다’는 ‘세련된 맛이 없이 엉성하고 어색한 데가 있다’는 뜻이고, ‘촌뜨기’는 ‘시골에 사는 촌스러운 사람을 얕잡아 이르는 말’이다. ‘촌놈’은 ‘촌사람을 얕잡아 이르는 말’이기도 하지만 일상적으로는 도시인과 비교해 세련되지 못한 사람을 낮춰 부르는 말로 쓰인다. 심지어 서울에서 시골로 이사와 시골살이에 익숙지 않은 사람에게 ‘서울 촌놈’이라고 부르는 걸 보면 ‘촌’은 어느 순간부터 낮게 바라보는 시선이 담긴 의미로 굳어져 가는 것 같다.

촌을 은연중에 낮춰 보는 시선은 사투리에 대한 편견과 선입견에서도 잘 드러난다. 우리가 흔하게 보고 있는 사극은 대표적인 사례다. 역사 속 인물들인 신라의 김유신이나 백제의 계백은 지역적 특성상 경상도와 전라도 사투리를 썼을 테지만 대부분의 사극들은 ‘인물의 존재감과 무게감’ 때문에 사투리를 배제하고 표준어를 쓰는 경향들이 생겼다. 이준익 감독의 ‘황산벌’이 과감하게 사투리를 쓰는 장군들을 보여준 건 그래서 당시로선 코미디가 섞인 장르라는 안전장치가 있었지만 그래도 파격적이었다. 이런 경향은 최근까지도 이어진다. 동학농민혁명을 소재로 했던 사극 SBS ‘녹두꽃’도 그 편견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보기 드물게 걸쭉한 전라도 사투리를 전면에 내세움으로써 드라마는 호평을 받았지만, 그럼에도 역사 속 인물로 이 혁명을 이끌었던 전라도 고부 출신 전봉준(최무성)은 사투리를 배제한 표준어를 썼다. 물론 이건 작가의 고심 끝에 ‘특수성’보다는 ‘보편성’으로 가자는 의도로 선택된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 선택에는 대중들이 사투리나 촌을 낮거나 가볍게 보는 선입견을 이미 내면화하고 있는 걸 작가 스스로도 인정하고 있다는 뜻이 담겨 있다.

물론 촌에 대한 이런 편견과 선입견들을 바꾸려는 시도들도 계속 이어져왔다. tvN ‘응답하라 1997’을 연출한 신원호 감독은 의도적으로 표준어대신 경상도 사투리를 사용했다고 밝힌 바 있다. 경상도 사투리의 무뚝뚝하지만 은근히 드러나는 진심이 요즘의 젊은 세대들의 쿨한 정서와 잘 맞는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응답하라 1997’을 통해 한때 경상도 사투리는 ‘힙’한 표현 방식이 되기도 했다.

최근 화제가 되고 있는 KBS ‘동백꽃 필 무렵’은 촌과 사투리가 버무려져 ‘촌스러움’이 얼마나 매력적인 가치를 갖고 있는가를 드러내는 드라마다. 옹산이라는 가상의 시골마을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이 드라마에서 황용식(강하늘)이란 인물은 구수한 충청도 사투리를 구사하며 말 그대로 촌티를 풀풀 풍기지만, 앞뒤 재지 않고 직구로 날리는 말 한 마디 한 마디로 시청자들을 헤어나지 못하게 만들고 있다. 심지어 ‘촌므파탈’이라는 표현이 나올 정도다. 황용식만이 아니라 옹산에서 장사를 하며 살아가는 아주머니들 또한 마찬가지다. 좁은 지역 사회라 편견과 풍문이 돌고 도는 곳이지만, “밥은 먹었냐?” “김치는 있냐?”고 묻는 따뜻한 정이 숨겨지지 않는 곳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드라마에서 촌스러움의 가치를 드러내는 건 사투리의 정감이나 시골 사람들의 따뜻한 정만을 뜻하는 게 아니다. 황용식이라는 인물에 투영된 촌스러움의 가치는 어떤 편견이나 선입견 없이 있는 그대로 어떤 존재들의 가치를 바라봐주는 그 시선에서 나온다. “전 무식해서 그런 거 잘 몰라유”라고 거두절미하며 편견어린 시선들을 거둬내는 그는, 고아에 미혼모라는 편견 때문에 스스로를 평가절하하고 있는 동백에게 돌직구 위로를 날린다. “고아에 미혼모가 필구를 혼자서 저렇게 잘 키우고 자영업 사장님까지 됐어요. 남 탓 안하구요 치사하게 안 살고 그 와중에 남보다도 더 착하고 더 착실하게 그렇게 살아내는 거 그거 다들 우러러보고 박수쳐줘야 될 거 아니냐구요. 남들 같았으면요 진작에 나자빠졌어요. 근데 누가 너를 욕해요? 동백씨 이 동네에서 제일로 세구요 제일로 강하고 제일로 훌륭하고 제일로 장해요.”

편견과 선입견에 의한 소외나 평가절하는 어느 하나를 가치의 중심으로 세우는 시선에서 비롯된 것이다. 도시를 중심으로 세우면 지방은 변방으로 소외된다. 우리는 이렇게 가진 자, 정상, 세련된 것을 중심으로 세워 못 가진 자, 비정상, 촌스러운 것을 변방으로 소외시킨다. 어째서 우리는 ‘동백꽃 필 무렵’의 황용식처럼 있는 그대로의 가치를 보려고 하지 않았을까.

‘촌스러움’의 사전적 의미는 달라져야 한다. 도시의 특색과 비교해 ‘세련된 맛이 없이 엉성하고 어색한 데가 있다’고 할 게 아니라, 촌만이 가진 따뜻한 정감과 자연이 살아있는 시골의 가치를 드러내는 그런 새로운 정의로 말이다.

정덕현 대중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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