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년 만의 남북한 월드컵 축구 예선전 경기가 평양에서 생중계와 응원단 없이 치러졌다. 돼지열병에 대한 남북한 공조도 무산되었다. 지난 2월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 결렬의 여파가 남북 관계에 치명적인 타격을 주고 있는 모양새다. 북미 관계 교착에 따라 남북 관계도 옴짝달싹 못하는 상황이 긴 시간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북한은 우리를 향해 여러 불만을 쏟아내고 있지만 결국 대남 관계를 통해서는 근본 문제 해결이 어렵다는 판단을 한 듯하다. 핵문제 발생 원인 제거라는 근본 문제는 철저하게 미국과 해결할 과제로 인식하고 있다. 결국 북미 대화가 진전되지 않으면 남북 관계는 교착 국면에서 벗어나기 어려운 구조가 공고화되고 있는 셈이다. 제재가 완화되기 이전에라도 제재 면제를 받아 남북 간 다양한 교류협력 사업을 추진하겠다는 문재인 정부의 구상도 힘을 잃어가고 있다. 정부는 지난해 4ㆍ27 판문점 선언 이행을 위해 올해 4,700억원 예산을 책정해 놓았으나, 북한이 호응하지 않는 바람에 예산집행률이 2.3%에 머물고 있다.
남북 관계가 어쩌다 이 지경까지 왔을까. 북한은 표면적으로 정부가 4ㆍ27 판문점 선언을 비롯해 9ㆍ19 평양공동선언을 이행하지 못하는 점에 비판의 초점을 맞추고 있다. 더불어 우리 정부가 겉으론 평화를 외치면서 뒤에서는 군비 증강에 몰두하는 이중적 행태를 보이고 있다며 날선 비판을 이어가고 있다. 김성 유엔주재 북한대사는 9월 30일 유엔총회 연설을 통해 전 세계인이 지켜보는 앞에서 우리 정부를 저격했다. 민족 내부 문제인 남북 관계를 북미 관계와 비핵화에 스스로 종속시켜 남북 정상 간 합의사항 이행을 교착 상태에 빠뜨린 것이 바로 중재자, 촉진자 역할의 실상이라고 쏘아붙였다. 자신들을 겨냥한 최신 공격형 무기 반입과 한미합동 군사 연습은 상대방에 대한 적대 행위를 전면 중지하며 무력 증강을 하지 않기로 합의한 판문점 선언 이행을 위한 군사분야 합의서에 대한 위반이며 도전으로 규정했다. 그러면서 이제 남쪽 당국과는 더 이상 할 말도 없고, 마주앉을 생각도 없다고 선언하였다. 이를 행동으로 보여주듯이 북한 당국은 우리의 다양한 제안들에 냉대로 일관하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평양에서 열렸던 월드컵 축구 예선전이 무중계, 무관중 경기로 끝난 것은 얼어붙은 남북 관계에 따른 자연스러운 귀결이다.
이 시점에서 더 우려되는 점은 북미 협상이 우여곡절 끝에 급진전되어 대북 제재가 완화되는 상황이 오더라도 자동적으로 남북 관계가 개선되지 않을 수도 있는 상황이다. 북한 측은 이미 북미 대화에 기대어 남북 화해 분위기가 저절로 형성될 것으로 생각한다면 그것은 망상이라고 밝혀놓은 터다. 설마가 현실이 될 수 있다는 의미다. “남북 관계 개선은 남측 당국이 사대적 근성과 민족 공동의 이익을 침해하는 외세 의존 정책에 종지부를 찍고 남북 정상 선언의 성실한 이행으로 민족 앞에 지닌 자기 책임을 다할 때만이 이뤄질 수 있다.” 북한은 남북 관계의 해법을 이렇게 던져놓고 있다. 김성 유엔주재 대사의 공개적인 발언이기도 하다. 또한 북한 입장을 대변하는 조선신보는 “미국에 대고 할 소리나 바로 하면서 ‘상식을 뛰어넘는 상상력’으로 남북 관계를 주견있게 처리해나갈 대안을 제시하라”고 주문했다. 필요하면 미국에 대해서 ‘노(NO)’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하고, 남북 관계 자율성을 확보하는 방안을 모색하라는 목소리로 들린다. 사실 북한은 예전에는 이렇게 강경 일변도로 나오다가도 자신들의 필요에 따라 대화 국면으로 정세를 전환시키곤 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이전과 같은 패턴을 반복할 가능성이 커 보이지 않는다. 이들이 요구하는 남북 관계 개선 조건은 일시적인 레토릭이 아닐 수 있다는 얘기다. 정말 상식을 뛰어넘는 상상력을 발휘해야 할 시점이 아닌가 싶다.
임을출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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