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에 자유를! 우리 시대의 혁명!”
홍콩 출신 프로게이머 청응와이(활동명 블리츠청)는 6일(현지시간) 대만에서 열린 ‘하스스톤 그랜드마스터즈’ 3일차 경기에서 승리를 거두고 인터뷰를 하던 중 이렇게 외쳤습니다. 홍콩에선 범죄인 인도법(송환법) 반대에서 촉발된 민주화 시위가 4개월째 이어지고 있습니다. 홍콩 시위대의 상징인 고글과 방독면을 쓰고 있던 청응와이는 이 구호와 함께 장비들을 벗어 던지기도 했죠.
청응와이의 외침에 누구보다 놀란 것은 이 대회를 주최한 미국의 게임업체 블리자드였습니다. 블리자드 측은 즉각 “해당 발언은 블리자드나 하스스톤을 대표하는 발언이 아니다”라며 그의 대회 참가 자격을 1년간 박탈하고, 대회 상금도 몰수하는 중징계를 내렸습니다. 심지어 해당 경기 중계진과도 관계를 끊겠다고 선언했는데요, ‘표현의 자유’를 민주주의의 핵심 가치라고 여기는 미국의 기업이 중국과 홍콩 시민 간 민주화를 둘러싼 갈등에 지지는커녕 이렇게까지 쩔쩔매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또 누가 중국 편 들었을까
블리자드뿐이 아닙니다. 미국프로농구(NBA) 인기 팀 중 하나인 휴스턴 로키츠의 대릴 모리 단장이 4일(현지시간) 자신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자유를 위한 홍콩 시위를 지지한다”는 글을 올렸다가, 본인은 물론 선수들까지 중국에 머리를 숙여야 했습니다. NBA 측은 성명을 내고 “깊은 상처를 입은 중국 팬들에게 사과한다”고 밝혔죠.
미국의 대표적인 정보기술(IT)업체 애플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따르면 애플은 9일(현지시간) 성명을 통해 앱스토어에서 홍콩 경찰의 위치를 추적할 수 있는 애플리케이션 '홍콩맵라이브'(HKmap.live)를 삭제하기로 했다고 발표했습니다. 해당 앱은 홍콩 시위대가 경찰을 피하는 데 쓰였죠. 애플은 "이 앱이 현지 법을 위반하고 경찰과 거주자들을 위태롭게 한다"고 말했으나, 홍콩맵라이브 측은 이날 트위터를 통해 "이 주장을 뒷받침할 근거는 전혀 없다"고 반박했습니다. 그러면서 "명백히 홍콩의 자유와 인권을 억압하기 위한 정치적 결정"이라고 꼬집었죠.
역시 미국의 대표 업체인 구글도 최근 구글플레이 스토어에서 이용자들이 홍콩 시위자 역할을 할 수 있는 모바일 게임 ‘우리 시대의 혁명’을 지운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구글은 “개발자들이 심각하게 진행 중인 분쟁이나 비극 등 민감한 이벤트를 이용해 게임으로 돈벌이를 하려는 것을 금지하는 내부 정책에 따라 이 앱을 삭제했다”고 설명했습니다
◇큰 손 ‘차이나 머니’가 아쉬워
미국의 기업들은 왜 ‘홍콩 시위에 대한 지지 표명을 하지 말라’는 중국 정부의 으름장에 굴복하게 됐을까요. 원인은 어마어마한 ‘차이나 머니’라는 게 중론입니다. 지난해부터 미ㆍ중 무역전쟁이 본격화하고, 홍콩의 민주화 시위까지 겹치면서 중국에서 자국 정부에 비판적인 외국계 기업, 제품에 대해 잇단 압박에 나서는 사례가 많아졌습니다. 거대 시장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기업은 고개를 숙이는 모양새가 됐죠.
실제로 이런 기업에 대한 중국의 보복 조치 역시 속속 이뤄지고 있습니다. 중국의 관영방송 CCTV와 IT업체 텐센트는 NBA 시범 경기 중계를 보류했고, 로키츠를 후원하던 중국 기업들은 후원 중단을 선언했습니다. 중국 인터넷 매체 펑파이(澎湃)는 "NBA를 후원하는 중국 기업 25곳 중 18곳이 NBA와의 협력을 중단했다"고 보도하기도 했습니다. 중국 내 주요 온라인 쇼핑몰은 로키츠 상품 판매를 중지시켰습니다. 중국 SNS 웨이보에서는 이를 지지한다는 댓글이 쏟아졌죠.
NBA의 경우 중국시장에서 벌어들이는 돈은 매년 10억 달러(한화 약 1조1,880억원), 중국의 NBA 시청자는 연간 5억~6억명에 달한다고 하네요. 특히 휴스턴 로케츠는 2000년대 초반 당시 중국 최고 농구스타 야오밍을 영입하면서 중국에서 최대 인기를 누리는 구단입니다. 중국의 NBA 시청자 수가 미국 인구(약 3억명)보다 훨씬 더 많다 보니 중국을 대체할 시장을 찾기 어려울 수밖에 없습니다. 일각에서는 이번 사태로 인해 NBA에서 뛰는 선수들의 연봉이 1인당 평균 20% 줄어들 것이란 관측까지 나왔을 정도입니다.
블리자드는 과거 프랑스 통신회사 비방디로에서 매각되는 과정에서 텐센트를 중심으로 한 중국 자금이 상당액 유입됐다고 합니다. 또 애플 역시 최대 스마트폰 시장인 중국을 외면할 수 없는 처지입니다. 중국은 애플에 매출액 기준으로 세 번째로 큰 시장이기도 하죠.
◇미국 내 반발에 ‘갈팡질팡’ 눈치게임?
연일 중국에 고개를 숙이는 미국 기업들에 대한 비판도 커지는 상황입니다. 미국 정치권에서도 반발이 거셌는데요, 공화당 소속 마르코 루비오 상원의원은 자신의 트위터에서 NBA에 대해 “중국 시장 접근권을 지키기 위해 모리 단장을 희생양으로 삼고, 표현의 자유를 행사한 미국 시민을 벌 주도록 했다”고 비판했습니다. 미국의 애니메이션 ‘사우스파크’도 비판 대열에 합류했어요. 지난주 중국의 검열정책을 풍자하는 내용을 방영, 중국으로부터 삭제 조치를 당한 사우스파크 제작진들은 “NBA와 마찬가지로 중국의 검열이 들어오는 가족이 된 것을 환영한다”며 “자유와 민주주의보다 우리는 돈을 더 사랑한다”고 조롱성 사과문을 게시했습니다.
블리자드 역시 전 블리자드 개발자인 마크 컨으로부터 "블리자드는 선수를 돈과 바꿨다. 게임에서 정치를 배제한다더니, 중국 공산당에 충성을 바치고 있다"는 쓴소리를 들어야 했죠. 전 세계 누리꾼들도 SNS에 ‘#블리자드보이콧(Blizzardboycott)’ 이라는 해시태그와 함께 블리자드 탈퇴 인증샷을 올리거나 조롱하는 이미지를 제작하며 반발하고 있다고 해요. 일부 블리자드 직원들은 항의성 파업까지 검토하고 있다고 합니다.
미국과 중국 사이에 낀 기업들은 눈치 보기에 여념이 없습니다. 애덤 실버 NBA 총재는 기존의 입장을 뒤집고 7일 일본을 방문한 자리에서 “누구나 자신의 견해를 밝힐 자유가 있다“며 모리 단장을 두둔했죠. 애플도 홍콩맵라이브 앱 삭제 과정에서 해당 앱 출시를 허락하지 않았다가, 이를 다시 취소했다가, 또 삭제하는 등 갈팡질팡 행보를 보여줬습니다.
이들의 눈치게임은 언제까지 계속될까요. 박승찬 용인대 중국학과 교수는 “자본주의 국가의 자본주의 비즈니스인 만큼 결국 돈에 의해서 무너질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꼬집었습니다. 박 교수는 이어 “대부분의 미국 기업들은 다 (중국에) 고개를 숙이고 들어갔다”며 “과거 미국의 영화나 콘텐츠 부분에서 중국이나 중국인 묘사는 부정적인 것들이 많았는데, 최근엔 중국 자본 유입 영향으로 긍정적인 측면을 부각시키는 것만으로도 볼 수 있다”고 전했습니다.
전혼잎 기자 hoihoi@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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