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민 교수의 ‘한국이란 무엇인가’] <2> 인간은 벌거벗은 현실을 살지 않는다 
 ※ ‘칼럼계의 아이돌’이라 불리는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가 한국의 정체성, 역사, 정치, 사상, 문화 등 한국에 대한 근본적 물음을 찾아 나섭니다. <한국일보>에 3주 간격으로 월요일에 글을 씁니다.
우리는 옷을 입고 있어도, 옷을 입고 있다는 사실을 특별히 자각하고 살지 않는다. 사람들이 저마다 다른 계급에 속해 있지만, 계급적 처지를 매 순간 깨닫지 못하는 것과 같다. 옷도, 계급도 “사회적으로 구성된 현실”이란 걸 의식하는 건 격변의 시기가 닥쳤을 때다. 게티이미지뱅크

이른바 문명사회라는 곳에서 사람들은 옷을 입고 다닌다. 그들이 옷을 여미고 다니는 것은 단지 추위를 피하기 위해서만은 아니다. 그들에게는 가리고 다니기로 사회적으로 약속한 신체 부위가 있다. 미친 사람 취급을 받지 않기 위해서는 그 부위를 가리는 옷을 입고 거리에 나서야 한다. 여기에는 예외가 없다. 벌거벗고 다니는 노출증 환자가 있지 않냐고? 벌거벗고 날뛰는 사람이 있지 않냐고? 시내 한복판이나 축구 경기장 한가운데서 스트리킹을 하는 사람이 있지 않냐고? 그러나 그들은 진정한 의미에서 벌거벗고 있다고 하기 어렵다. 자신이 원하는 순간에, 원하는 방식으로, 원하는 효과를 위하여, 목적의식이 충만한 채로, 정교하게 벗고 있기 때문에, 그들은 아무 꾸밈 없이 벌거벗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들의 나체는 하나의 적극적인 표현이기에, 예술적 효과를 위해 미술관에서 옷을 벗고 자빠져 있는 행위예술가의 나체나, 교육적 목적을 위해 옷을 벗고 있는 누드모델의 나체와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 이러한 맥락에서 예술사학자 케네스 클라크(Kenneth Clark)는 누드와 그냥 벌거벗은 몸의 차이를 분명히 설명한 바 있다. 누드는 타인에게 보이고자 하는 특별한 목적을 염두에 두고 예술적으로 전시한 몸 상태라는 점에서, 아무것도 꾸미지 않고 그냥 있는 그대로의 벌거벗은 몸을 드러낸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즉 누드는 ‘재구성된 육체의 이미지’이다. 문명사회 속에서는, 관음증 환자가 되지 않는 한 타인이 무심하게 벌거벗은 몸을 보기 어렵다. 아니, 어쩌면 관음증 환자조차도 결국 사회적으로 재구성된 육체의 이미지를 보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 아무도 자신을 보고 있지 않다고 생각할 때조차, 우리는 우리 몸에 새겨진 사회적 흔적과 표정과 몸짓을 끝내 떨쳐버리지 못하곤 하니까. 아무도 없을 때조차도 우리는 옷을 입고 있지 않나. 사회적으로 학습된 포즈를 취하고 있지 않나.

혼자 남겨져 있을 때조차 완전히 사회로부터 분리되지 못하고, 사회적으로 습득된 표정과 몸짓과 의미를 소비하고 있는 것이 우리의 일상일진대, 인간은 벌거벗은 현실을 살래야 살 수가 없다. 그 어떤 사회적 영향으로부터도 자유로운 세계, 그런 진공 같은, 완전히 벌거벗은, 세계는 도대체 존재할 수 없다. 비슷한 맥락에서 우리는 ‘진짜 자연’ 같은 것도 경험할 수 없다.

미국 요세미티 국립공원에 있는 태프트 포인트(왼쪽) 위에서 한 부부가 결혼사진을 찍고 있다. AP=연합뉴스

영문학자 스티븐 그린블랫(Stephen Jay Greenblatt)은 자연/인공의 구분이 생각만큼 간단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미국 요세미티(Yosemite) 국립공원의 예를 든 적이 있다. 요세미티 국립공원에서 가장 인기 있는 산책로 중 하나가 네바다 폭포길이다. 하도 인기가 있어서 그 산책로의 첫 부분은 사람들이 다니기 편하게끔 잘 포장되어 있다. 그러나 결국 어느 지점부터 포장도로가 끝나고 표지판이 나타난다. “여기부터 대자연입니다.” 아울러 지켜야 할 규칙이 빼곡하게 적혀 있다. 개를 데리고 다녀서도, 쓰레기를 버려서도, 불을 피워서도, 허락 없이 캠핑을 해서도 안됩니다, 운운. 즉 이른바 대자연에서는 더 많은, 더 강력한, 인공적 규칙이 지배한다. 그뿐이랴. 황야 한가운데는 네바다 폭포를 잘 볼 수 있게 만든 강철 다리가 설치되어 있다. 그곳에는 다시 안전을 위한 규정이 적혀 있다. “위험하니까 기어오르지 마라.” 과연 이곳이 ‘진짜 자연’일까? 혹시 여느 인간사회보다 더 인공적인 곳이 아닐까?

이게 어디 미국만의 상황이랴. 부산국제영화제에 참석한 김에 해변으로 나가 본다. 가을이 되어 한산해진 해운대 백사장을 걸으면서, 기분이 상쾌해진 나머지 “역시 자연이 좋아”라고 중얼거린다. 그러나 냉정하게 말하여 그곳에 자연은 없다. 인간의 인공적인 필요에 최적화된 어떤 ‘자연환경’이 있을 뿐. 그 점을 증명이라도 하듯, 해운대에는 ‘자연보호’라는 지극히 인공적인 모뉴먼트(monument)가 서 있다. ‘죠스’같은 식인 상어가 출현하기 전까지, 해수욕장에 자연 같은 것은 없다.

대자연일수록 인공적 규칙은 더욱 도드라진다. 미국 요세미티 국립공원에 위치한 네바다 폭포를 감상하기 위해 강철 다리가 설치 돼 있다. 부산국제영화제 참석 차 들렀던 해운대 백사장에 ‘자연보호’라는 지극히 인공적인 기념물이 서 있다. 김영민 교수 제공

인간은 자력으로 해운대의 물속을 오래 유영하거나, 부산 하늘을 장시간 날 수 없다. 그런 유약한 인간 존재가 시도해 볼 수 있는 특수 체험이 바로 스킨 스쿠버와 비행기 타기이다. 이제는 대중화된 비행기 타기이지만, 사실 비행기를 처음 타는 체험은 스릴 만점이다. 난생 처음으로 지구로부터 꽤나 떨어지는 체험을 하는 것일 테니 말이다. 비행기를 여러 번 타본 사람조차도 이륙 순간에는 다소나마 긴장한다. 승무원들이 통로를 바삐 지나다니며, 안전벨트를 꼭 매라고 당부하고, 거듭 상황을 확인한다. 그만큼 기체가 이륙하는 순간은 평소와는 다른 순간, 익숙했던 환경으로부터 이질적인 환경으로 진입하는 특수한 시간이다. 드디어 기체가 굉음 속에서 사시나무 떨듯이 떨고, 시야가 기울었다가, 마침내 높은 대기 속으로 진입한다. 어떤 사람은 스릴을, 또 다른 어떤 사람은 고통을 느낄만한 시간이다.

그러나 이 느낌은 오래 가지 않는다. 점차 비행기의 환경에 익숙해지고, 좀 더 시간이 지나면 지금 비행 중인지 여부도 잘 느끼지 못하는 상태가 된다. 급격한 기류 변화만 없다면, 이제 다소 멍한 상태에서 비행기의 착륙을 기다리며 시간을 소일하게 될 것이다. 기내식을 먹던지, 기내 영화를 보던지, 꾸벅꾸벅 졸든지 하면서. 그러나 결국에 가서는 “쿵!” 하면서 기체는 지면 위로 다시 착륙한다. 그때 몸은 인지한다. 아, 지금까지 공중에 있었지. 독일어권 작가 막스 프리쉬(Max Frisch)는 ‘나를 간텐바인이라고 하자’라는 작품에서 이렇게 쓴 적이 있다. “활주로에 비행기가 닿을 때면 발생하는 통상적인 충격을 나는 기다리고 있다. 그것이 바로 현재다.”

인생도 마찬가지다. 우리 모두 많은 이들이 한 번쯤은 경험했을 인생이라는 비행기 타기. 사실 처음 이 세상으로 태어나는 체험은 스릴 만점이었을 것이다. 처음으로 엄마의 자궁 혹은 그와 비슷한 어떤 곳으로부터 분리되는 체험을 하는 것이니 말이다. 아무리 담력이 강한 사람이라도 출생 순간에는 다소나마 긴장했을 것이 틀림없다. 조산원의 산파 혹은 산부인과 간호원들이 진지한 목소리로, 산모에게 여러 가지 격려와 당부를 주고, 거듭 상황을 확인했을 것이다. 그만큼 이 세상으로 진입하는 순간은 평소와는 다른 순간, 익숙했던 엄마 몸으로부터 나와 이질적인 환경으로 진입하는 특수한 시간이다. 마침내 출생의 순간이 오면, 고고(呱呱)의 소리가 터져 나오고, 산모의 고통 속에서 세상으로 입장했을 것이다. 그 과정을 함께 한 가족은 기쁨을, 정작 태어난 자신은 어리둥절함을 느꼈을 법한 시간이다.

그러나 이 느낌은 오래 가지 않는다. 점차 자신이 태어난 사회의 환경에 익숙해진다. 그 사회가 부여한 역사와 문화와 정체성을 받아들여 나간다. 그러다 어느 순간, 자신이 어느 나라에 태어났는지에 따라, 누군가는 소위 선진국으로 가고 다른 누군가는 후진국으로 갔음을 깨닫는다. 그리고 자기 부모의 재력에 따라, 누군가는 해당 사회의 이코노미 좌석으로 가고, 다른 누군가는 일등석으로 갔음을 깨닫는다. 그 불편한 계급적 깨달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일상 속에서 매 순간 계급적 처지를 자각하고 싶지는 않다. 옷을 입고 있어도 매 순간 자신이 옷을 입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지는 않듯이, 매 순간 자신의 계급적 처지를 자각하려 들지는 않는다. 먹고 살기 위해, 자식을 부양하기 위해, 하루하루를 바삐 살아야 하기에, 사람들은 사회적으로 부여된 계급과 정체성과 문화와 역사 속을 그저 비행한다, 아니 유영한다, 아니 포복한다. 자신이 처한 현실이 벌거벗은 현실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구성된 현실’이라는 것을 잊고, 피로에 젖은 채로 인생의 종료를 기다리며 시간을 소일하게 되는 것이다. 구내식당에서 밥을 먹던지, 문화의 날 할인 영화를 보던지, 꾸벅꾸벅 졸든지 하면서. 그러나 간혹 “쿵!” 하면서 인생이란 것이 갑자기 어디엔가 불시착할 때가 있다. 바로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격변의 시기에. 그때 몸은 다시 인지한다. 아, 지금까지 사회적으로 구성된 현실 속을 살아왔다는 것을. 이제 현실을 재구성해야 할 때가 왔다는 것을. 누군가 ‘나를 한국인이라고 하자’라는 작품에서 이렇게 쓰는 거다. “2019년 한국 사회는 불시착 중이며, 이제 발생할 충격을 나는 기다리고 있다. 그런데 그것이 바로 현재다.”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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