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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부산대는, 유신정권은…” 40년 뒤에서 부마항쟁을 되돌아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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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부산대는, 유신정권은…” 40년 뒤에서 부마항쟁을 되돌아보다

입력
2019.10.11 04:40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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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ㆍ16 부마항쟁 당시 부산 안팎에서 시위에 참가하고 목도했던 관련자들이 집담회를 하고 있다. 오른쪽부터 반시계 방향으로 최자영, 엄태언, 박준석, 송성준, 김창우, 황선용, 백하현, 정광민. 산지니 제공
10ㆍ16 부마항쟁 당시 부산 안팎에서 시위에 참가하고 목도했던 관련자들이 집담회를 하고 있다. 오른쪽부터 반시계 방향으로 최자영, 엄태언, 박준석, 송성준, 김창우, 황선용, 백하현, 정광민. 산지니 제공

‘1979년 10월 16일 오전 9시35분, (부산대) 상대생 50명에 의한 데모 시발.’

10ㆍ16 부마항쟁의 시작을 분석한 유일한 국가기록, 부산경찰청의 일지다. 아주 단순 명료한 문장이나 이 기록이 쓰여질 때까지 쌓인 시민의 울분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것이다. 1980년 5ㆍ18 광주민주화운동, 1987년 6ㆍ10 항쟁으로 이어지는 민주화 행보에 불씨를 댕긴 사건으로 기억되는 부마항쟁. 역사적 가치가 상당하지만 다른 민주화 움직임에 비해 제대로 평가 받지 못한 게 사실이다.

‘다시 시월 1979’는 이러한 부마항쟁의 역사 복원을 위해 당시 사건 안팎에 있던 생존자들이 직접 나서 펴낸 책이다. 부산대, 동아대 학생이자 항쟁을 이끌었던 주역들과 민간인으로서 시위를 도운 시민 등이 한 자리에 모여 당시를 증언했다. 부마항쟁에 대한 증언을 공식 기록, 출판한 건 ‘다시 시월…’이 처음. 주역들 외에도 집회 현장을 지키던 시민과 해외에서 맘 졸이며 항쟁 전개를 지켜 봤던 이들의 인터뷰, 전문가 진단까지 다양한 내용이 담겨 있다.

대학 안팎 인쇄소에서 복사되는 유인물마저도 모두 경찰의 감시망에 놓이던 시절. 부산대 학생이던 정광민과 엄태언은 등사기와 등사판을 가진 친구를 겨우 찾아 정부를 비판하는 유인물을 만들었다. 조직이 꾸려지지 않았던 터라 이를 뿌릴 방법은 학생들이 모인 강의실을 직접 찾아 나서는 것뿐이었다. “유인물을 갖고 있는 것만으로도 위험이 있었기 때문에 절반 정도는 받지 않을 것이라고 예상을 했는데 의외로 학생들이 거의 다 받았어요. 받는 학생들의 표정을 보니 ‘기다렸다’고 말하는 것 같았어요.”(부산대 학생이던 엄태언씨) 이 작은 움직임은 학생 20명으로, 80명으로, 800명으로 확산했고 시민이 합세하면서 항쟁의 몸체는 5만 명(주최 측 추산)으로 커졌다.

1979년 10월16일 부산대 교육대 건물 앞에서 학생들이 경찰과 충돌하고 있다. 산지니 제공
1979년 10월16일 부산대 교육대 건물 앞에서 학생들이 경찰과 충돌하고 있다. 산지니 제공

이 역사적 사건을 가능케 한 동력은 무엇이었을까. 증언자들은 ‘동일방직 사건’(1978년 2월), ‘YH 무역 사건’(1979년 8월) 등 당시 노동자 핍박 이슈가 잦았던 점을 계기로 꼽았다. 당시 신민당 총재였던 김영삼 전 대통령은 노동자들 편에 서며 여론의 지지를 받았지만, 박정희 전 대통령이 그의 의원직을 박탈하며 국민의 반감은 커졌다. “대학생들도 거의 울분에 차 있던 시기였던 걸로 생각이 드는데 (…) 분노가 있어도 학생들이 용기가 없어서 시위를 못 하는 거예요. 인생 망친다는 것을 아니까, 유신시대니까.”(당시 동아대 학생이었던 이동관씨)

어렵게 시작된 항쟁은 많은 국민의 지지를 받았지만, 주역들에게 상처를 남긴 건 의외로 가까운 인물의 외면이었다. 항쟁 주도자로 지목된 정광민씨는 16일 학생들의 도움으로 경남 고성의 친구 집으로 도피했고, 18일 다시 부산으로 돌아왔다. 갈 곳을 찾지 못한 그가 문득 떠올린 건 부산 상대 경제학과의 모 교수. 평소 정부 비판적 언급을 많이 해온 인물이었다. “워낙 내 상태가 불안정하니까, 신뢰하는 교수한테 상담하는 차원에서 집으로 찾아갔거든요. 운동장 바로 앞에서 처음 보자마자 하는 말이 ‘이게 무슨 짓이고. 기분 같으면 뺨이라도 한 때 때리고 싶다.’ 나는 격려라도 들을까 했는데 상상을 초월하는 얘기를 들으니…. 바로 학생처로 연락을 하고 학생처 차인지 경찰서 차인지 모르지만 그 차로 동래경찰서까지 태워서 (저를) 넘겼지요.”(정광민씨)

1979년 10월16일 부산대 인근에서 대기 중인 경찰들. 산지니 제공
1979년 10월16일 부산대 인근에서 대기 중인 경찰들. 산지니 제공

항쟁 직후의 고문과 폭력, 전과자로서의 삶 역시 녹록지 않았다. 그저 시위를 구경하던 고등학생 옥상렬과 황창문, 황상윤은 방화범으로 조작됐고 물고문을 당했다. “상처도 안 나게 상당히 과학적으로 고문하더군요. 나는 (고문당한) 그 3일 동안 무진장 죽으려고 애썼어요.” 부산대 인근 서면서점에서 일하다 자신이 가진 등사기로 유인물 작업을 도운 후 간첩으로 몰렸던 황선용씨의 말이다.

부마항쟁 이후 구속된 사람들, 훈방이나 구류를 산 사람들은 1,500명 정도로 집계된다. 하지만 부마항쟁진상규명위원회으로부터 관련자로 인정된 이들은 178명뿐이다. 올해 9월 정부가 10월 16일을 국가기념일로 지정했지만 갈 길은 멀다. “공권력의 폭력에 대한 사과, 숨겨진 피해자를 밝히고 위로하는 일, 재발 방지, 보상책 마련이 절실”하다는 것이 증언자들의 공통된 목소리다. “아이고 말도 모하지예, 그때는 큰 소리도 몬 치고. 이제는 무서울 게 없다 아임니까!” 부마항쟁 당시 부산 괴정동에 살던 시민 김전출씨의 한 마디가 증언자들의 바람을 대변하는 듯 하다.


 다시 시월 1979 

 10ㆍ16부마항쟁연구소 엮음 

 산지니 발행ㆍ382쪽ㆍ2만원 

신지후 기자 hoo@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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