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쩐지 펼쳐 보기 두려운 고전을 다시 조근조근 얘기해 봅니다. 작가들이 인정하는 산문가, 박연준 시인이 격주 금요일 <한국일보>에 글을 씁니다
 <17>프랑수아즈 사강 ‘슬픔이여 안녕’ 
프랑수아즈 사강. 한국일보 자료사진

모든 작가의 첫 걸음에는 그의 마지막 걸음도 묻어있는 걸까. 프랑수아즈 사강(1935~2004)의 첫 소설 ‘슬픔이여 안녕’에 이런 문장이 나온다.

“그 생활에는 생각할 자유, 잘못 생각할 자유, 생각을 거의 하지 않을 자유, 스스로 내 삶을 선택하고 나를 나 자신으로 선택할 자유가 있었다. 나는 점토에 지나지 않았으므로 ‘나 자신으로 존재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 점토는 틀에 들어가기를 거부한다.”(80쪽)

사강의 말년을 아는 사람이라면, 이 문장에 주목할 것이다. 훗날 마약 소지 혐의로 법정에 섰을 때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고 증언한 노년의 사강의 모습이 보이기 때문이다.

1954년 사강이 열아홉의 나이로 첫 소설 ‘슬픔이여 안녕’을 발간했을 때 각지에서 찬사가 쏟아졌다. ‘문학계의 샤넬. 유럽 문단의 매혹적인 작은 악마. 지나칠 정도로 재능을 타고난 천재소녀…’

“나를 줄곧 떠나지 않는 갑갑함과 아릿함. 이 낯선 감정에 나는 망설이다가 슬픔이라는 아름답고도 묵직한 이름을 붙인다.”(11쪽)

소설은 ‘슬픔’을 호명하며 시작한다. 열일곱의 화자 세실이 마흔 살의 바람둥이 아버지와 아버지의 두 애인, 자신의 애인과 여름휴가를 보내며 겪는 일들이 소설의 주를 이루고 있다. 인간의 심리―사랑, 욕망, 질투, 인생을 바라보는 태도―를 세밀하게 관찰하는 이 소설은 슬픔을 느낄 수밖에 없는 ‘근원적인 이유’를 탐구한다. 훗날 사강은 자신의 첫 소설을 두고 “시대를 막론하고 지루하지 않게 읽을 수 있는 작품”이라고 했다. 또한 많은 비평가들이 자신의 작품을 ‘보고서’처럼 비평할 뿐, 정작 ‘느낌’을 얘기하는 글은 보지 못했다고 토로했다.

그래서 내 느낌을 말해보자면, 삶의 본질을 꿰뚫어 본 작가의 시선과 집필 나이, 핍진성, 인물의 생생한 움직임을 보며 소름이 끼쳤다. 처음 읽은 나이로부터 이십 년이 지나 다시 읽으니, 이 소설이 얼마나 ‘완벽한’ 소설인지, 왜 고전 반열에 올랐는지 새삼 알게 됐다. 좋은 소설은 내용을 몇 줄로 축약해 말하기 힘든데, 이 소설이 바로 그런 류의 소설이다.

사강은 글쓰기로 이른 나이에 성공해, 삶이 주는 좋은 점과 나쁜 점을 고루 다 누렸다. 도박과 스피드, 약물, 쾌락과 정념, 자기 파괴에 열중했다. 알면서도 끝을 향해 가는 사람들 특유의 ‘초연한 용기’ 때문에, 사강은 범상치 않은 자의 목록에 들어갔다. 사강은 호랑이, 고양이, 새끼 쥐, 사슴, 악어, 코끼리, 독수리 알, 썩은 생선이다. 남자와 여자, 부자와 가난뱅이, 성공한 사람과 실패한 사람, 사강은 이 모든 것의 너머에 있다.

어느 산문에서 사강은 책이 잘 팔려 ‘미친 듯이 돈이 들어오던 시절’을 회상하며, “수표가 벚꽃처럼 흩날리던 시절”이라고 썼다. 나는 이 문장에 홀딱 반해, 헤어나지 못한 적이 있다. 돈을 떨어지는 꽃잎 보듯 바라보는 인간도 있구나, 감탄했다! 돈을 떨어지는 꽃잎으로 보는 사강이었기에, 그녀는 평생 돈 때문에 고생했다(그렇게 많이 벌고도!). 전 재산을 건 하룻밤의 도박, 전국 카지노 출입 금지령, 끊임없이 매달린 소설, 풍요와 빈곤, 사랑과 외로움… 사강은 이 모든 것에 중독되었고, 쉽게 해독되지 못했다. 이런 면모를 가진 사강에게 자꾸 마음이 가는 이유는 뭘까? “고쳐주려는 의무감을 갖지 않으면 타인의 결점에 적응할 수 있”(127쪽)기 때문일까? 어쩌면 다음과 같은 사강의 말에서 답을 찾을 수도 있겠다.

“그런데 나에게는 소위 수준 높은 사람들보다는 보잘것없는 사람들을 더 좋아하는 일이 더 자주 일어났어요. 그들을 전등갓 네 귀퉁이에 몸을 부딪치는 개똥벌레나 나방처럼 만드는 숙명 때문에. 그것이 바로 인생이죠.”(‘사강 탐구하기’에서 인용.)

 박연준 시인 
 슬픔이여 안녕 
 프랑수아즈 사강 지음ㆍ김남주 옮김 
 아르테 발행ㆍ272쪽ㆍ1만5,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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