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년 즉위식 때는 총리 파견…문 대통령 참석 여부는 미정 
나루히토 일왕 내외가 15일 도쿄도 지요다(千代田)구 '닛폰부도칸'(日本武道館)에서 열린 태평양전쟁 종전(패전) 74주년 '전국전몰자추도식'에 참석, 아베 신조 총리의 추모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 도쿄=교도 연합뉴스

문재인 대통령이 다음달로 예정된 나루히토(徳仁) 일왕의 공식 즉위식에 참석해야 한다는 주장이 한일 양국에서 잇따라 나오고 있다. 새 일왕은 지난 5월 즉위했으나, 이를 대내외에 알리는 의식은 10월 22일에 열린다. 갈수록 얼어붙는 한일관계 해빙을 위해서 문 대통령이 ‘잔칫날’ 일본을 찾아 대화의 단초를 조성해야 한다는 취지다.

일본 인터넷언론 JP뉴스의 유재순 대표는 20일 CBS 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 인터뷰에서 “일본인들은 나루히토 일왕 즉위식에 한국에서 누가 참석하느냐, 아베 정부와 어떤 대화를 나누느냐를 한일관계의 분수령으로 보고 있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만약 문 대통령이 직접 온다면 획기적인 일이다. 그러면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도 응하지 않을 수 없다’고 일본인들은 전망한다”고 했다. 박지원 대안정치연대 의원도 지난달 비슷한 주장을 내놓은 바 있다. 박 의원은 “문 대통령께서 일왕 즉위식에 참석한다고 발표를 하면 양국 관계가 하루아침에 눈 녹듯 녹지 않겠나"고 말했다.

나루히토 일왕의 즉위식에는 일본이 국교를 맺은 세계 195개국 국가원수와 대사 등이 초청됐다. 각국 정부는 즉위식 참석자를 확정하고 이를 일찌감치 일본 정부에 통보했다. 미국에서는 마이크 펜스 부통령이, 중국에서는 왕치산(王岐山) 국가 부주석이 일본을 찾을 예정으로 알려졌다. 찰스 영국 왕세자, 프랑크 발터 슈타인마이어 독일 대통령 등도 축하사절단에 이름을 올렸다. 그러나 일본과 외교적 마찰을 이어가고 있는 한국 정부는 고민스러운 처지다. 누가 사절단으로 가느냐에 따라 향후 한일관계의 전환점을 맞을 수도 또 아닐 수도 있기 때문이다.

정치컨설팅 업체 유라시아그룹의 스콧 시맨 아시아 디렉터 역시 “10월에 도쿄에서 있을 일왕 즉위식이 양국에 있어 중요한 계기가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90년 아키히토 즉위식엔 누가 갔나 
이낙연(오른쪽) 국무총리가 16일 정부서울청사에서 방한한 베이부트 아탐쿨로프 카자흐스탄 외교부 장관 일행에게 기념사진촬영을 제의하고 있다. 연합뉴스

전례를 보면 이낙연 국무총리가 즉위식에 참석 할 가능성이 높다. 나루히토 일왕의 부친인 아키히토 상왕의 1990년 11월 즉위식 때 당시 노태우 정부는 강영훈 총리를 사절단으로 보냈다. 미국에선 댄 퀘일 당시 부통령이, 중국에선 우쉐첸(吳學謙) 부총리가 대표로 참석했다. 이 총리는 기자 시절 도쿄특파원을 지낸 대표적인 지일파 정치인이다. 이 총리를 대일특사로 파견해 한일갈등을 풀어야 한다는 의견은 그 동안 정치권에서 꾸준히 나온 바 있다.

다만 노태우 전 대통령은 같은 해 5월 일본을 찾아 아키히토 상왕을 미리 만났다. 아키히토 상왕은 노 전 대통령을 환영하는 만찬사에서 한일 과거사를 두고 “일본에 의해 초래된 이 불행했던 시기에 귀국의 국민들이 겪으셨던 고통을 생각하며 ‘통석의 염’을 금할 수 없다”는 입장을 밝히기도 했다. 이어 김영삼(1994) 김대중(1998) 노무현(2003) 이명박(2008) 전 대통령도 모두 일본을 방문, 일왕과 회동을 가졌다. 역대 대통령이 취임하면 미국에 이어 두 번째 순방지로 일본을 방문한 것과 달리 중국을 먼저 찾은 박근혜 전 대통령은 결국 방일이 이뤄지지 않아 일왕과의 만남이 없었다.

2003년 6월 방일한 노무현 전 대통령의 공식 환영식에서 노 전 대통령과 아키히토 당시 일왕이 대화를 나누고 있다. 도쿄=오대근기자

문 대통령 역시 취임 후 회의 참석 차 일본을 찾은 적은 있지만, 국빈방문 등은 이뤄지지 않았다. 올해 6월 일본 오사카(大阪)에서 열린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에서 만난 문 대통령과 아베 총리는 8초간의 어색한 악수만 하고 헤어지기도 했다. 잠시 얘기를 나누는 약식회담조차 없었는데, 일본의 경제보복으로 인한 앙금 속에 이달로 예정된 유엔 총회에서도 한일 정상의 회담은 이뤄지지 않을 전망이다. 일본 교도통신은 19일 “미국 뉴욕에서 열리는 유엔 총회 기간 중 문 대통령과 아베 총리의 정상회담을 보류하기로 한일 양국 정부가 방침을 굳혔다”고 일본 정부 관계자를 인용해 보도했다.

 ◇대통령 방일 가능성 낮지만… “결단은 정상이 해야” 
문재인 대통령과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지난 6월 28일 오사카에서 열린 주요 20개국 정상회의 공식 환영식에서 악수를 나눈 뒤 지나치고 있다. 오사카=AP 연합뉴스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문 대통령의 방일을 긍정적으로 보는 목소리가 있다. 조진구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교수는 “총리보다 대통령께서 직접 참석을 하시는 것도 그만큼 한국 정부가 일본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걸 보여준다는 의미가 있다”고 했다. 조 교수는 또 “일본 내에는 (문재인 정부가) 반일 정권이라는, 반일 대통령이라는 잘못된 이미지도 있다”며 “그렇기 때문에 대통령께서 직접 가셔서 나는 그렇지 않다는 걸 일본 국민들한테 보여주는 것도 중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양국 정상이 마주앉는 것조차 쉽지 않은 데다가 문 대통령의 일왕 즉위식 참석은 그야말로 파격적인 일인만큼 현 시점엔 가능성이 낮아 보인다. 이 총리의 방일 역시 자칫하면 뚜렷한 외교적 성과를 거두지 못할 수 있다는 점이 걸림돌로 지적된 적이 있을 정도로 외교 해결책 마련은 요원한 상황이다. 고민정 청와대 대변인은 문 대통령이 일왕 즉위식에 방문할 가능성에 대해 19일 “정해진 게 없다”고 답했다.

양국이 가을을 넘겨서까지 외교 해법을 마련하지 못한다면 갈등은 장기화할 가능성이 크다. 특히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배상 문제를 둘러싸고 압류한 일본 기업 자산 매각 절차를 시작한 만큼, 그 결과가 나올 연말쯤이면 한일 갈등은 최고조에 달할 수밖에 없다.

전문가들은 결국 양국 정상이 만나서 논의를 벌이는 것만 남았다고 입을 모았다. 양기호 성공회대 일본학과 교수는 “결국 양 정상 레벨에서 해법을 도출하는 방법만 남은 것으로 보인다”고 지적했다. 양 교수는 이어 “일왕 즉위식에 이어 12월 24일, 25일 북경 한중일 정상회담까지 이 세 번의 기회를 활용, 한일 양국이 적극적인 대안을 제시하며 조금 더 문제 해결에 가까운 그런 어떤 지점을 발견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전혼잎 기자 hoihoi@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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