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런던의 아메리카인’ 휘슬러와 어머니의 교육열
※ 경제학자는 그림을 보면서 그림 값이나 화가의 수입을 가장 궁금해할 거라 짐작하는 분들이 많겠죠. 하지만 어떤 경제학자는 그림이 그려진 시대의 사회경제적 상황을 생각해보곤 한답니다. 그림 속에서 경제학 이론이나 원리를 발견하는 행운을 누리기도 하죠. 미술과 경제학이 교감할 때의 흥분과 감동을 함께 나누고픈 경제학자, 최병서 동덕여대 경제학과 명예교수가 <한국일보>에 격주 토요일 연재합니다.
제임스 맥닐 휘슬러(James McNeill Whistler, 1834~1903)는 미국에서 태어났지만 1855년 유럽으로 건너가 파리와 런던에서 활동한 화가다. 휘슬러의 그림 중 가장 유명한 작품은 바로 영화 ‘미스터 빈(Mr. Bean)’에서 주인공 로완 앳킨슨(Rowan Atkinson)이 덧칠하다가 오히려 망쳐놓은 그림 ‘어머니의 초상(Arrangements in Grey and Black: Portrait of Painter's Mother)’일 것이다. 이 작품은 작업이 이뤄진 영국이나 화가의 모국인 미국이 아닌, 프랑스 파리의 오르세 미술관(Musee d’Orsay)에 걸려 있다. 작품의 진가를 알아본 프랑스 정부에서 구입하여 오르세에 소장하게 된 것이다. 영화 ‘미스터 빈’이 나온 이후 이 작품은 오르세 미술관에서도 아주 인기 있는 그림이 되었다.
◇아들 조기교육에 열성 쏟은 어머니
휘슬러는 미국 매사추세츠 출신으로 기관차 엔지니어였던 아버지가 러시아 철도사업에 관여하게 되면서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이주하여 어린 시절을 보냈다. 자식 교육에 열정적이었던 어머니는 아들을 데리고 경제적, 문화적으로 앞섰던 영국, 프랑스 등을 자주 여행하며 선진 문물을 보여줬고 런던과 파리 같은 대도시에 체류하기도 했다. 일종의 조기 체험교육을 중시했던 어머니의 열성 때문이었다.
당시 인상파 화풍이 파리에 유행하면서 어린 휘슬러는 예술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근대산업과 교역이 부흥하던 런던 또한 휘슬러에게 큰 인상을 남겼고 나중에 그가 런던에 정착하는 데에도 영향을 끼쳤다. 어린 시절 어머니의 교육에 대한 열의로 휘슬러는 예술가의 꿈을 키웠으나 아버지가 갑작스럽게 사망하자 그의 가족은 미국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신앙심이 깊었던 그의 어머니는 아들이 목사가 되기를 원하며 휘슬러를 교회 부속학교에 보냈다가 적성에 맞지 않다는 것을 알고, 휘슬러의 부친이 졸업한 웨스트포인트 육군사관학교에 진학하기를 권하였다. 그는 어머니의 희망에 따라 웨스트포인트에 입학했지만 그곳에서도 졸업을 하지 못했다. 어린 시절의 꿈을 좆아 화가가 되리라 결심한 휘슬러는 어머니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1855년 그림 공부를 위해서 파리로 향했다. 이후 파리와 런던을 오가며 자유분방한 보헤미안과 같은 생활을 하였다.
파리에서는 드가와 교류하게 되었고, 마네로부터도 화법에 대해서 많이 배웠다. 살롱전에 작품을 출품했으나 낙선한 휘슬러는 1863년 야심적으로 그린 ‘흰옷 입은 소녀(Symphony in White No.1: The White Girl)’로 살롱전에 재도전했지만 또다시 낙선하고 만다. 그는 당시 인상파 화가들과는 달리 의도적으로 ‘심포니’ ‘녹턴’ 같은 음악적인 제목에 형태와 색채의 조화만을 보여주는 작품을 시도했다. 인상주의 화파에서 금기시하는 흰색을 주조로 한 무채색이나 단순한 색채로 필요 없는 세부묘사를 과감히 생략하면서 그림의 전체적인 조화를 중요시했다. 그의 이러한 미적 감각은 대표적인 초상화들에서 잘 드러난다.
결국 파리에서 작가로서의 명성을 쌓지 못한 휘슬러는 미련 없이 파리를 떠나 런던에 정착하게 된다. 아들이 예술의 수도인 파리에서 예술가로서 성공하기를 바랐던 어머니는 그녀의 바람이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자 런던으로 아들을 찾아간다. 어떻게 해서든 아들이 화가로 이름을 날리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그녀는 아들의 그림 모델을 자청했다. 아들을 향한 그녀의 교육과 입신양명에 대한 소원은 과거 우리나라의 한석봉 어머니나, 아들의 교육 때문에 세 번이나 이사했다는 ‘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 고사로 잘 알려진 맹자 어머니의 교육열에 못지않은 것이었다. 아들의 성공을 위한 어머니의 열망은 실제로 이루어졌다. 휘슬러의 많은 작품 중 우리에게 지금까지 잘 알려진 그림은 오직 자기 어머니를 그린 이 작품뿐이다!
◇사교육 매진의 경제학
자녀 교육은 왜 이렇게 어머니들이 목을 매달 정도로 중요하게 여겨질까. 그 이유를 경제적인 관점에서 접근해보자. 교육, 특히 의무교육 같은 공교육은 경제학적으로 말하면 일종의 공공재(public good)라고 할 수 있다. 공공교육에 대한 투자는 장기적인 국가 발전에 대단히 중요하다. 가령, 교육투자를 통해서 한 사람의 좋은 영어교사를 양성한다면 적어도 수십 명의 학생들에게 양질의 영어교육을 보장할 수 있다. 교육의 공공재적 특성이란 한 학생이 수업을 받으며 지식을 획득하는 과정에서 다른 학생들이 같은 수업을 통해 얻는 혜택을 제한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러한 속성을 자신의 소비를 위해서 서로 경쟁할 필요가 없다는 의미에서 공공재의 비경합성(non-rivalry)이라고 한다. 만약 이러한 혜택을 사교육으로 감당해야 한다면 수십 명의 학생들을 위해서 수십 명의 좋은 영어교사가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가계(household)의 입장에서 보면 교육이야말로 가정의 사회경제적 지위를 향상시킬 수 있는 가장 유용한 계층 이동의 ‘사다리’라고 할 수 있다. 최근의 입시 관련 편법과 비리를 보면서 많은 사람들이 공분을 느끼게 된 이유도 공정해야 할 계층 이동의 사다리를 두고 불공정이 난무하는 상황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자기 자식이 다른 학생들보다 더 우월해지기를 바라는 학부모 입장에서는 공교육과 달리 자신의 아이에게만 혜택이 돌아오는 사교육에 투자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입시제도가 존재하는 한 어떻게 제도가 바뀌든지 간에 사교육에 대한 유인(誘引)은 항상 있을 수밖에 없다. 많은 학부모들이 사교육에 치중하는 이유는 자기 자식이 교육의 혜택을 독점해 보다 높은 지위에 이르게 하려는 이기심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자애롭기보단 쓸쓸한
1872년에 완성된 이 초상화의 원제목은 ‘회색과 흑색의 배치 1번(Arrangement in Grey and Black No 1)’이다. 일반 사람들에게는 어려운 원제목보다는 ‘화가의 어머니’ 또는 ‘휘슬러의 어머니’로 더 익숙하다. 휘슬러는 왜 어머니를 그리고는 작품 제목에 ‘어머니’라는 말 대신 희한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제목을 붙여 놓았을까. 어쩌면 모델까지 해주었던 어머니의 지나친 관심에서 오히려 멀어지려는 심리가 작용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림 속 어머니는 인자하고 자애로운 모습이라기보다는 왠지 차갑고 근엄한 모습이다. 게다가 정면도 아니고 측면의 모습으로 그려진 어머니는 성경 위에 손을 단정하게 얹고 의자에 앉아있다. 실내는 무채색 계통의 단조로운 색감이 주조를 이루며, 방의 구도 역시 낡은 마루에 액자 하나만 벽에 걸려 있어 수도원의 방처럼 단출하다. 벽의 색감인 회색과 어머니 의복의 검은 색은 섬세한 조화를 이루며 그림의 전체적인 안정감과 균형을 유지시켜준다. 사람들은 어머니의 소박한 드레스와 늙고 야윈 모습에서 드러나는 쓸쓸함을 통해 온화하고 자애로운 어머니 상(像)보다 더 사실적인 어머니의 모습을 보았고, 이 그림은 휘슬러의 가장 유명한 작품이 되었다. 이 작품에서 사람들이 본 것은 색과 구도의 조화가 아니라 어머니였던 것이다.
휘슬러는 런던 사우스 켄싱턴의 첼시(Chelsea) 구역에서 살았다. 그런데 당시 이 지역에는 영국에서 가장 권위 있는 미술상인 터너상(Turner prize)을 수상한 화가 프랭크 마일스(Frank Miles)도 살고 있었다. 마침 오스카 와일드(Oscar Wilde)가 런던으로 왔을 때 마일스와 함께 살았고, 휘슬러는 마일스를 통해서 와일드를 소개받았다. 1877년 휘슬러의 전시회가 열렸을 때 이 전시회에 대한 평론을 기고한 것이 와일드의 첫 번째 비평이었다고 한다.
미국 정부는 1934년 어머니의 날을 맞아 기념우표를 발행하면서 이 작품을 디자인으로 사용했다. 휘슬러의 어머니가 미국의 어머니를 상징하게 된 셈이다. 그러나 휘슬러는 1903년 죽을 때까지 런던에서 주로 지내며 미국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아들의 교육에 열정과 정성을 쏟았던 휘슬러의 어머니는 자신을 모델로 한 그림으로 예술가로서 입지를 다지게 된 아들에게 만족하였을까? 우리나라는 물론 세계의 모든 어머니가 그러하듯이, 자식을 위해서는 불가능이란 없다. 어머니는 강하다!
최병서 동덕여대 경제학과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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