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엔은 2012년부터 매년 ‘세계 행복보고서(World happiness Report)’를 발표하고 있다. 이 보고서는 경제적 소득, 사회적 지원, 기대 수명, 자유, 관용, 부정부패 정도 등의 항목을 토대로 각 나라의 국민들이 느끼는 행복지수를 나름대로 측정해서 수치화하고 있다.
올해 3월에 발표된 ‘2019 세계 행복보고서’에 의하면 우리나라는 행복지수 10점 만점에 5.895점을 받아 54위에 올랐다. 57위를 기록한 작년보다는 세 단계 상승했다. 핀란드가 2년 연속 1위를 차지했고, 덴마크, 노르웨이, 아이슬란드 등 북유럽 국가들이 그 뒤를 이어 상위권에 올랐다. 아시아에서는 대만이 25위에 올라 가장 순위가 높았고 싱가포르(34위), 한국(54위), 태국(52위), 일본(58위), 중국(93위) 등이 뒤를 이었다.
행복감을 수치로 계량화하는 이러한 접근 방식에 대한 비판도 없지는 않다. 행복은 어디까지나 개인이 주관적으로 느끼는 감정이고, 사람들이 살면서 중요하게 여기는 사항들은 개인차가 있을 수밖에 없는데 어떻게 이것을 일률적으로 계량화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맞는 말이다. 법정스님의 무소유 사상에도 깊은 영향을 끼친 미국의 사상가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월든 호숫가에 살면서 “자발적 가난(voluntary poverty)이라는 이름의 유리한 고지에 오르지 않고서는 인간 생활의 공정하고 현명한 관찰자가 될 수 없다”고 주창했다. 소로 같은 사람들에게는 결코 경제적 성공이나 재산은 행복의 의미 있는 요소가 아닐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행복의 수준을 계량화하려는 시도가 결코 무의미하거나 잘못되었다고 할 수는 없다. 아무리 행복이 주관적 느낌이라 해도, 그러한 주관적 느낌을 형성하는 사회적, 객관적 여건과 환경은 분명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저 개인의 노력만으로는 결코 해결될 수 없는 것들이 있는 것이다. 어느 부모 밑에서 태어났느냐가 그 사람의 미래를 결정해 버리는 사회와 그렇지 않은 사회에서 느끼는 행복감은 다를 수밖에 없다. 깨끗한 물을 먹지 못해 전염병에 노출된 사회와 그렇지 않은 사회의 행복감은 다를 수밖에 없다. 행복 방정식에서 정치가 중요한 이유다.
이 보고서를 보면서 행복과 ‘돈’과의 상관관계가 궁금했다. 인터넷을 뒤지다 보니 한 블로거가 이 문제를 이미 고민해 본 자료를 찾을 수 있었다. 국제통화기금에서 발표한 1인당 국민소득의 국가순위 옆에 행복지수 순위를 정렬, 비교해 보니 흥미로운 결과가 나온 것이다. 1인당 국민소득 30위권 국가 중에서 행복지수와의 격차가 크게 나타나는 국가에 특이하게도 일본(격차 35), 한국(격차 27), 싱가포르(격차 26) 등 아시아권 국가가 많다는 점이다. 그 원인에 대해서는 심층 연구가 필요하겠지만, 적어도 행복은 소득에 정비례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일응 보여주는 것 아닐까.
애덤 스미스는 그의 저서 ‘도덕 감정론’에서 행복의 조건으로 건강, 빚이 없음, 깨끗한 양심이라는 세 가지 요소를 들면서 여기에 더 보탤 것이 없다고 했다. 돈의 문제를 다루는 경제학의 아버지인 애덤 스미스 아닌가. 그런 그가 행복의 조건으로 “많은 돈”이 아니라 “빚이 없음”을 꼽았다는 것은 의외다.
예전보다 더 잘 먹고 잘살게 되었음에도 덜 행복한 것 같다는 사람들을 주변에서 많이 볼 수 있다. 솔직히 말하면 필자도 그 중 한 사람이다. 왜 이런 현상이 나타날까. 성공과 풍요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더 소중한 가치들을 잃어버렸기 때문이 아닐까. 나 자신에 만족하고 지금 가지고 있는 것들에 감사하기보다는, 다른 사람과 자꾸 비교하려 들고 더 많은 것을 가지려 하기 때문 아닌가. 행복 방정식에서 삶을 대하는 개인의 시선과 태도가 중요한 이유다.
김희관 변호사ㆍ전 법무연수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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