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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미의 다시 광릉 숲에서] 스러져 고사된 나무의 의미

입력
2019.09.10 18:00
2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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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풍에 스러져 새로운 생물의 서식처가 디고 있는 생태관찰로의 전나무
태풍에 스러져 새로운 생물의 서식처가 디고 있는 생태관찰로의 전나무

태풍 ‘링링’ 소식이 들려왔던 지난 며칠간은 손에 땀을 흘리는 긴장의 연속이었습니다. 제가 일하는 국립수목원의 광릉숲은 태풍 ‘곤파스’로 참 많은 나무들을 잃었던 경험을 가지고 있기에 경로와 강도가 유사하다는 예보에 더욱 긴장했지요. 특히 수백 년을 이어온 숲에는 오래된 나무들도 많고, 그 숲을 찾은 관람객도 있는 공간입니다. 미리 미리 취약한 나무들을 점검하고, 관람객들을 위한 안전조치, 쓰러져 길을 막는 나무들에 대한 긴급조처 등 직원들이 주말을 꼬박 비상상태로 보냈습니다. 여러 나무가 넘어졌지만 그래도 큰 피해는 없이 고비를 잘 넘겼습니다.

해야 할 일이 남았습니다. 이미 넘어지거나 부러진 나무들을 그리고 비와 바람에 땅이 흔들려 쓰러질지도 모르는 나무들을 어떻게 해야 하는 지가 숙제인데. 광릉숲에서 이런 나무들을 대하는 첫 번째 기준은 “그대로 둔다”, 두 번째 기준은 “안전이 최우선이다”입니다. 태풍도 지나갔는데 왜 광릉숲길을 못 가게 하냐고 나무라는 분들도 계시지만 바람에 뿌리가 흔들리는 하나하나를 철저하게 조처합니다. 길을 막고 있는 나무들도 비켜놓고, 특별한 목적으로 조성된 공간은 정비하지만 피해를 당한 나무들은 대부분 그 숲에 그대로 혹은 살던 숲 언저리에 둡니다. 위 가지가 다 부러진 나무도 줄기를 그대로 놓아두기도 합니다. 나무들은 그렇게 가지를 다 잘리고 고사되어가면서도 50년 이상 그렇게 서있기도 합니다.

죽은 나무에서 살고 있는 노랑느타리버섯
죽은 나무에서 살고 있는 노랑느타리버섯

이렇게 죽은 나무 혹은 죽어가는 나무들을 누운 채로 혹은 선채로 그 숲에 그대로 두는 이유는 이 나무들이 수많은 다른 숲 속의 생명들에겐 매우 중요하고 의미 있는 서식공간이 되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는 한 그루의 나무를 바라보며 그 나무의 삶만을 생각하지만 그 나무는 수많은 생명들과 연대를 가지고 있는 공동 생명체입니다. 조사 결과들을 보면 숲에 따라 많게는 80%의 야생동물이 나무에 터를 잡고 살고 있다고 하며, 일엽초와 같은 착생식물이나 겨우살이가 같은 기생식물들의 사이사이 동공과 틈새는 곤충들의 보육장소가 되기도 하지요.

죽은 나무는 곤충들의 교미장소가 되기도 한다.
죽은 나무는 곤충들의 교미장소가 되기도 한다.

나무가 죽어서는 또 다른 종류의 생명들이 깃듭니다. 동공이 커지고 수피가 벗겨져 나가며 생겨나는 다양한 틈새들은 곤충, 아주 작은 포유류, 버섯을 비롯한 미생물, 지의류 등등 그 많은 다양한 다른 생명들이 살아가는 공간이 됩니다. 서서히 분해되어 유기물이 가득한 좋은 성분의 흙의 일부가 될 때까지 말이죠. 그 양분이 식물에 흡수되고 다시 새로운 생명들을 키워내는 순환 사이클들이 작동하고 이어지는 것입니다.

수목원 생태관찰로에는 곤파스 때 쓰러진 전나무들이 뿌리를 그대로 드러낸 채 여러 해를 살고 있습니다. 그 옆에는 “고사목도 숲의 중요한 구성원입니다”라고 쓰여 있는데 이 두 줄의 글로 “수십 년 교직에 몸담고 인생을 바꾸었다”라는 고백을 오늘 들었습니다. 죽었으니 아무 쓸모 없다고 생각한 나무처럼, 말썽을 피우며 친구들과 학교에 피해를 준다 싶어 미워했던 학생들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고 학교로 돌아가 “우리 학생 모두가 다 행복해지는 그날을 위하여”라고 크게 써 붙여놓고 실천하고 계시답니다. 죽은 나무가 교직자의 인생관과 삶도 바꾸는 역할까지 해내었구나 싶었습니다.

내가 오늘, 깊은 생각 없이 함부로 말하고 대한 사람 혹은 자연 그 어느 것도 소중하지 않은 존재는 없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깊이 새기며 태풍이 지나간 자리들을 하나 하나 정리하렵니다.

이유미 국립수목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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