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박범신은 소설 ‘은교’에서 老시인과 패기 넘치는 젊은 제자, 나이 열일곱 소녀의 삼각관계가 빚는 내밀한 욕망과 갈등을 그렸다. 정지우 감독이 영화로 만들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매일 출퇴근하는 일터에서는 은퇴했으니 나도 나이가 좀 먹었다. 어느새다. 시위를 떠난 화살을 어찌 잡으랴. 그런데 나는 내 나이의 정체성에서 자주 혼란을 느낀다. 아직 지공거사(지하철을 공짜로 타는 나이)가 되기까지는 몇 해 남았지만, 노령연금(국민연금)이라는 걸 받는다. 만 61세부터 받고 있는데 그 명칭대로라면 난 ‘노령’이다.

하지만 아직 지하철에서 자리를 양보 받는 사태는 다행히 일어나지 않았다. 누구는 내 나이를 말하면 놀라거나 짐짓 놀라는 척한다. 눈치 없는 나도 그건 안다. 처세술이자 에티켓이라는 걸.

나는 여전히 “다녀오세요”라는 아내의 다정한 배웅을 받으며 윤이 나는 검은 가죽가방을 들고 룰루랄라 출근하고 싶다. 점심시간을 기다리며 ‘오늘은 무얼 먹지’ 행복한 고민도 하고, 저녁 6시면 칼퇴를 하는 곳에서 일하며 월급날을 기다려 보고 싶다.

하지만 누가 나를 특별히 생각해 주지 않는 이상, 날 불러주는 곳은 없다. 내가 찾아야 한다. 그런데 한자리 하겠다고 이리저리 이력서를 들이미는 건 내 생각과 경력과 관계없이 ‘사회질서상’ 좀 면구스러운 나이다. 그러니 이제 비정규직밖에 없다. 비록 이런 잡문일지언정 글도 써 신문에 나고, 가끔 자문도 받고, 밤이 이슥하도록 친구들과 어울려 통음도 하고, 예쁜 여자가 지나가면 안 보는 척 곁눈질도 하는데, 즉 아직 정신적으로 그리고 육체적으로도 생생하고 팔팔한데 말이다.

며칠 전 동창끼리 저녁을 먹는 자리에서 누가 뜬금없이 물었다. “도대체 우린 늙은 거야, 젊은 거야?” 아무도 자신 있게 손을 들지 못했다. 외국에 살다 온 한 친구가 영어로 한마디 얹었다. “How old is old?” 외국에서도 이 질문이 자주 토론 소재가 된다고 한다.

정말 얼마나 늙어야 늙은 걸까. 난 내 머리와 가슴과 다리가 아직 늙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사회는 날 보고 결코 젊다고 하지 않는다. 유엔이 ‘호모 헌드레드(Homo Hundred)’ 시대를 맞아 2015년에 제안한 새로운 인간 생애주기 연령지표에 따르면 난 청년(18~65세)에 속한다. 그 기준을 보면 중년은 66~79세이고, 80이 넘어야 노년이다. 내가 중년에도 못 끼고 청년에 해당된다니 고맙다고 해야 할지, 죄송하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난 마흔에 수없이 혹했고, 쉰에 하늘의 뜻은커녕 한집에 사는 사람의 속내도 몰랐다. 이제 좀 숨 돌리고 떠들고 생을 즐길 만한 예순에 어찌 귀가 순해지겠는가.

늙음에 대한 많은 격언과 명언이 있다. 내가 좋아하는 소설 속 두 문장이 있는데, 하나는 나를 위로하고 하나는 나를 슬프게 한다.

“네 젊음이 네 노력의 보상이 아니듯, 나의 늙음도 나의 과오에 의한 것이 아니다.” (박범신 ‘은교’)

“나이 든 사람의 비극은 그 사람이 나이가 들었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여전히 젊다는 데 있다.” (오스카 와일드,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나이는 과연 누구와의, 무엇과의 약속일까. 그 연대기적 숫자의 많고 적음에 따라 모든 제도와 법령이 결정되는 게 백퍼센트 온당할까. 법은 왜 현실보다 늘 발이 느린가. 매일 일어날 때마다 내 나이가 어느 날은 40이고 어느 날은 70인데, 나이가 ‘상태’나 ‘기분’이면 안 되는 것인가. “몇 살이세요(How old are you)”라고 묻지 말고 “몇 살로 느끼세요(How old do you feel)”라고 물으면 웃기는 걸까.

얼마나 늙어야 진짜로 늙은 걸까. 내 나이는 진정한 나를 반영하는 것일까. 나는 몇 살로 살아야 하는 걸까. 이름과 성별도 바꿀 수 있는 시대인데 스스로 나이를 결정할 권리는 없는 것일까. 사람들이 모이는 한가위를 앞두고 발칙한 생각을 해본다.

한기봉 한국신문윤리위원회 윤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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