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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청년부 회장은 꼭 남자가, 식당 봉사는 왜 여성 몫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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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청년부 회장은 꼭 남자가, 식당 봉사는 왜 여성 몫인가요”

입력
2019.08.29 04:40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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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신교 성폭력 그린 ‘비혼주의자 마리아’ 안정혜 작가

‘비혼주의자 마리아’는 교회 내 만연한 성차별과 여성혐오에 대해 이야기한다. IVP 제공
‘비혼주의자 마리아’는 교회 내 만연한 성차별과 여성혐오에 대해 이야기한다. IVP 제공

경찰청 범죄 통계에 따르면 2010년~2016년 성폭력 범죄로 검거된 전문직 직업군 1위는 개신교 목회자다. 예장합동ㆍ예장고신 등 개신교단들은 여전히 여성목사 안수를 허용하지 않는다. 성경은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고린도전서 14장34절)고 말한다.

한국 개신교는 페미니즘에 가장 무감한 곳 중 하나다. 최근 출간된 ‘비혼주의자 마리아’는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고 배우며 자라온 크리스천 여성들의 이야기를 다룬 만화다. 기독교 만화 플랫폼에 연재된 일종의 종교 웹툰이지만, 신자를 넘어 비신자들에게도 큰 호응을 이끌어내며 100만 조회수를 달성했다.

그런데 이 페미니즘 웹툰을 쓴 안정혜 작가는 “이 만화를 쓰기 전까지 페미니스트라고 생각해 본 적도 페미니즘에 크게 관심을 갖지도 않았다”고 털어놨다. 이 작품이 자신을 각성시킨 계기가 됐다는 것이다. 무슨 일이 있었기에 그런 걸까. 지난 20일 안 작가가 사는 경기 군포시에서 그를 만났다.

“출판사에서 교회 내 여성 차별을 다뤄보자고 제안해서 단행본 출간을 전제로 웹툰을 연재하게 됐어요. 1년 간 자료조사를 하고 만화를 그려나가면서, 이전까지는 한번도 깊게 생각을 해보지 않은 관행들이 눈에 들어왔어요. 왜 의문조차 품지 않았는지 이상할 정도로 부당한 일 투성이였죠.”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식당 봉사는 왜 여성들만 하는지, 왜 여성 전도사들은 유치부나 유아부에만 배치되는지, 왜 청년부 회장은 남자, 부회장은 여자인지. 교회 내 차별과 억압이 교회 바깥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비신자들에게도 공감을 얻은 이유 역시 그것일 테다.

‘비혼주의자 마리아’를 그리기 전까지만 해도, 안정혜 작가는 페미니즘은 자신과 무관한 얘기라고 생각했다. 취재를 하고 만화를 그려나갈수록, 지금껏 외면해왔던 기억과 감정들이 쏟아져 나왔다. 만화를 그리는 시간은 작가 자신에게도 트라우마와 싸우는 시간이었다. 고영권 기자
‘비혼주의자 마리아’를 그리기 전까지만 해도, 안정혜 작가는 페미니즘은 자신과 무관한 얘기라고 생각했다. 취재를 하고 만화를 그려나갈수록, 지금껏 외면해왔던 기억과 감정들이 쏟아져 나왔다. 만화를 그리는 시간은 작가 자신에게도 트라우마와 싸우는 시간이었다. 고영권 기자

나아가 취재를 하면 할수록, 외면할 수 없는 성폭력 문제와 맞닥뜨리게 됐다. 안 작가는 결국 애초 바울 서신(신약 성경에서 바울이 쓴 열세 편의 편지)을 중심으로 성경 속 여성혐오와 교회에 만연한 성차별을 중심으로 쓰려던 구상을 바꿨다. 누구보다 신실했던 마리아를 주인공으로 교회의 가장 추악한 치부인 성폭력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기로 한 것이다. 극은 마리아가 약혼자였던 목사의 ‘그루밍 성폭력’ 사실을 알고 비혼주의자가 되기로 결심하면서 절정으로 치닫는다.

“사실 교회는 성폭력이 발생하기 너무 쉬운 환경이에요. ‘그루밍 성폭력’은 성욕의 문제가 아닌 위력과 착취의 문제거든요. 그런데 한국 교회에서 목사는 하나님의 대리자에요. 목사의 말에 순종하지 않는 교인은 심하게 배척당하죠.”

설사 목사가 성범죄를 저질러 법적인 처벌을 받는다 하더라도, 언제든 다시 교회로 복귀할 수 있다. 우리나라 개신교 교단 중 성범죄 목사를 징계하고 면직하는 교단은 거의 없다. “조폭도 회개하고 목사가 되는 마당에, 왜 성범죄는 안 되냐는 반박까지 하죠. 교단에서 안 받아 줘도 개척교회를 세우면 되기 때문에 신분을 숨기고 목회를 이어가는 사람도 많아요. 게다가 교회에서는 성도의 말보다는 목사의 말을 우선적으로 신뢰해요. 설사 범죄 사실을 인정한다 한들, ‘우리 목사님이 잠깐 넘어지신 거다’ 하는 식이죠.”

그러니 목회자에게 성폭력을 당한 피해자가 교회 공동체에 그 사실을 드러내기도 쉽지 않다. 어렵게 피해 사실을 밝혀도 ‘음모’라며 다른 신자들에게 되레 핍박을 당하기도 한다.

전문직 성범죄 1위가 목사일 정도로, 개신교 내 성폭력은 만연하지만 교단 내에는 제대로 처벌하는 법조차 없다. IVP 제공
전문직 성범죄 1위가 목사일 정도로, 개신교 내 성폭력은 만연하지만 교단 내에는 제대로 처벌하는 법조차 없다. IVP 제공

처음 만화를 시작했을 때 주변에서는 “왜 기독교 안의 페미니즘이라는 주제가 필요하냐”고 물었다. 완벽한 성경 속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면 되지, 굳이 인권을 얘기할 필요 없다는 거였다. 안 작가는 “하나님은 그 누구보다 인간을 위하며, 그렇기에 아들인 예수를 보낸 것”이라고 반박했다. “예수는 창녀, 병든 자, 세리(稅吏)와 함께 했어요.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외면당한 이야기, 묻혀 있는 소리에 귀 기울여야죠. 저에게는 그게 교회 내 여성들의 목소리였어요. 차기작은 그래서 아마 교회 안의 퀴어(성 소수자) 얘기가 되지 않을까 싶어요. 교회에서 가장 외면하기 쉽고, 손가락질 하기 쉬운 ‘죄’가 동성애니까요.”

만화에서 성범죄를 저지른 목사는 스스로 존칭을 붙이며 “목사님은 교회의 영적 아버지다. 아버지가 무너지면 가정이 무너지듯, 내가 무너지면 사탄이 역사해서 교회가 파괴될 것”이라며 피해자의 입을 막는다.

현실에서도 마찬가지다. 이런 상황에서 피해자들은 ‘목사님이 그랬을 리 없다’며 스스로 피해 사실을 부인하거나 합리화하면서 속앓이를 하다가 수년이 지나서야 밝히는 경우도 있다. 심지어 자신이 죄를 지은 것이라고까지 생각하기도 한다. 애써 외면한 피해를 건드리고 끄집어내는 만화를 보며 ‘트리거’(트라우마 경험을 재경험하도록 만드는 자극) 버튼이 눌렸다는 독자들도 많았다.

“교회 안에서 자유롭게 말할 수 있는 장이 활성화돼야 해요. 교회들도 서서히 바뀌고 있지만, 성도들 역시 자기 안의 벽이 부서지는 경험을 해야 해요. 이 책이 그 경험을 돕는 데 쓰였으면 좋겠어요. 저 역시 오랫동안 제 목소리를 듣지 않았어요. 만화를 그리면서 묵살 당한 제 안의 목소리를 들었죠. 자매님들, 더 이상 침묵하지 마세요. 우리는 죄인이 아닙니다.”


한소범 기자 beom@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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