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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디스토리] 여성 의사 외과계열서 약진… “이제 겨우 ‘유리천장’ 깨기 시작”

입력
2019.09.02 04:40
1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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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증가하는 여성 의사

※‘메디 스토리’는 의사, 간호사 등 의료계 종사자들이 겪는 애환과 사연, 의료계 이면의 이야기를 전달합니다. <한국일보> 의 김치중 의학전문기자가 격주 월요일 의료계 종사자들의 이야기를 연재합니다.

홍성진 여의도성모병원 마취통증의학과 교수가 수술실에서 환자를 마취하고 있다. 홍 교수는 “일을 할 수 있음에 감사하고 즐기는 사람을 당할 순 없다”며 “여성 의사들도 이젠 프로의식을 갖고 의사로서 할 수 있는 모든 역량을 발휘해야 한다”고 말했다. 여의도성모병원 제공
홍성진 여의도성모병원 마취통증의학과 교수가 수술실에서 환자를 마취하고 있다. 홍 교수는 “일을 할 수 있음에 감사하고 즐기는 사람을 당할 순 없다”며 “여성 의사들도 이젠 프로의식을 갖고 의사로서 할 수 있는 모든 역량을 발휘해야 한다”고 말했다. 여의도성모병원 제공

“정형외과 레지던트가 되면 결혼 자체가 힘드니 부모님께 허락 받고 와라. 그리고 정형외과에서 일하면 검사하다 방사선에 노출이 많이 되니 방사선과 과장님에게 레지던트를 해도 괜찮은지 허락 받고 와라. 그럼 시켜줄게.”

배서영(49) 인제대 상계백병원 정형외과 교수가 22년(1997년) 전 이화의료원 정형외과 레지던트를 지원했을 때 일화다. 정형외과는 병원에서 ‘노가다’과로 불린다. 뼈를 자르고 맞추는 수술을 해서 노동 강도가 다른 과에 비해 세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나 지금이나 여성 의사 중 정형외과를 지원하는 사람은 드물다.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2018년 기준으로 정형외과 전문의(6,869명) 중 여성 전문의는 45명(0.7%)에 불과하다. 세월이 흘러 배 교수는 국내를 대표하는 족부ㆍ족관절 분야 명의가 됐지만 당시 여성 의사가 정형외과를 지원한 일은 화제가 됐다. 배 교수는 “외견상 톱으로 썰고 망치로 두드리는 등 거칠지만 바느질처럼 섬세하기도 한 것이 정형외과 족부ㆍ족관절 수술”이라며 “다시 여자로 태어나 의사가 되면 또 정형외과 의사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빅 5병원’ 전문의 10명 중 3명 이상 여성 의사

우리사회에서 남성이 절대적 우위를 점하고 있는 직업 중 하나가 의사다. 남성 의사끼리의 카르텔이 강고한 의사 사회에서 여성 의사들은 승진에서 누락되거나 수련 과정에서 차별을 받기도 했다. 그런 의사 사회가 변화하고 있다. 변화의 동력은 여성 의사 수가 급증한 데서 나왔다. 한국여자의사회와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2014년 1만6,678명이었던 여성 전문의 수가 2018년 2만3,514명으로 41%가 증가했다.

의대 입학생 중 여성 비중도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교육부 자료에 따르면 입학정원 차이가 있지만 2015년 31.6%(762명)였던 여학생 비율이 2018년 36.7%(991명)로 증가했다. 의대 입학생 10명 중 3명은 여학생인 셈이다. 의대를 졸업하고 전문의 자격을 취득하는 여성 의사들이 증가하자 병원 내 여성 의사 수도 증가하고 있다. 국내 5대 대형병원(삼성서울ㆍ서울대ㆍ서울성모ㆍ서울아산ㆍ세브란스 병원)에서 펠로우(전임의) 이상 여성 의사 비율은 34.6%에 달한다.

여성 의사 수만 증가한 것이 아니다. 과거에는 여성이 접근하기 힘들었던 일반외과, 정형외과, 신경외과, 흉부외과, 이비인후과 등 외과계열에서 여성 의사들이 약진하고 있다. 소아외과학 분야에서 국내 최고 권위자로 인정받고 있는 박귀원(70) 중앙대학교병원 소아외과 임상석좌교수는 “여자라고 외과를 못할 이유는 없다”고 말했다. 이명ㆍ난청ㆍ인공와우 분야에서 세계적 권위자인 박시내(50) 서울성모병원 이비인후과 교수는 “24시간, 36시간이 걸리는 수술도 거뜬히 소화했다”며 “여자라고 해서 남자와 다를 바 없고, 당당하게 자신이 맡은 바 업무를 수행하면 존경을 받을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2010년 서울성모병원에서 여성 교수로는 처음으로 기획실장을 맡는 등 병원 행정가로서도 발군의 실력을 보였다.

[저작권 한국일보]빅 5병원 남녀 의사 비율 그래픽=강준구 기자
[저작권 한국일보]빅 5병원 남녀 의사 비율 그래픽=강준구 기자

◇아직도 남자 의사 선호… 여자끼리 경쟁 ‘이중고’

이렇게 과거와 달리 여성 의사들의 위상이 높아졌지만 여성 의사들은 그래도 여전히 ‘여성’이라는 이유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토로한다. 특히 의대를 졸업할 때까지는 잘 나가다가 전공의(인턴, 레지던트) 과정부터는 상황이 급변해 충격을 받는다. 의대 재학 시에서는 성적이 좋아 교수들에게 칭찬을 받고, 병원에 실습을 나가면 전공의와 교수들이 “여학생이 왔다”며 친절하게 대해주기도 하지만, 정작 채용 문턱에 서면 상황이 역전된다는 것이다.

서울의 한 대학병원 내과에서 레지던트로 근무하고 있는 A(34)씨는 “과거보다 많이 좋아졌지만 정형외과, 성형외과, 피부과 등 인기가 많은 과에서는 같은 성적이면 남성 의사를 채용하려 한다”며 “여성 의사는 출산, 육아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이 결정적인 원인인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의대생과 달리 전공의는 ‘내 사람’ ‘일꾼’ 같은 개념이라 똑똑한 사람보다 말 잘 듣고 힘 잘 쓰는 남자들을 선택하는 것 같다”고 덧붙였다. 홍성진 여의도성모병원 마취통증의학과 교수는 “여성 의사들은 가정을 핑계로 병원 일을 소홀히 한다는 말을 듣기 싫어 오히려 남자들보다 집안 문제를 얘기하지 않는다”라며 “‘여자는 어쩔 수 없어’라는 소리를 듣기 싫어 남자보다 더 남자처럼 행동하며 살았다”고 회고했다. 홍관 대한전공의협의회 여성이사는 “전공의협의회 차원에서 수련병원 교수 및 전공의들에게 전공의법에 명시된 ‘임산부의 보호’ 규정을 홍보하고 있지만 한계가 있다”고 밝혔다. 그는 “현장에서는 여성 의사가 임신을 했을 경우 출산휴가를 얼마나 줘야 하는지조차 모르는 교수들도 있는 것이 현실”이라고 개탄했다.

전공의 채용 과정에서도 차별은 지속된다. 익명을 요구한 서울의 한 대학병원 B교수(여)는 “성적이 좋은 여성 의사들이 훨씬 더 많아도 남녀비율을 맞춰 전공의들을 채용하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라고 말했다. 결과적으로 여성 의사들은 성적이 좋으면서도 불공정한 경쟁에 놓이게 된다. 서울의 모 대학병원 외과 교수 C씨는 “여자 의사가 여러 명 지원할 경우 남자보다 성적이 좋아도 일부 탈락하는 일이 발생한다”며 “특히 정형외과, 피부과, 성형외과 등 남자를 선호하는 진료과에 가려면 지원한 여자 의사 중 성적이 제일 좋아야 합격할 수 있다”고 말했다.

병원 내부의 편견과 경쟁을 극복해도 환자와 보호자의 편협한 시각 때문에 상처를 받는다. 서울의 한 대학병원 정신건강의학과 D교수(41)는 “인턴, 레지던트 시절은 물론이고 전임의 때까지 환자들에게 가장 많이 들은 호칭이 ‘아가씨’였다”며 “아직도 환자나 보호자들은 권위가 있어 보이는 남자 의사들을 선호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치료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대뜸 ‘여의사 말고 남자 의사로 주치의를 교체해 달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마음의 상처를 입었다”고 토로했다. 실제로 지난해 11월 한국여성의사회가 의사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여성 응답자의 대부분인 93.6%(692명)가 간호사나 아가씨로 불린 적이 있다고 답했다.

[저작권 한국일보]국내 전문의 여성 비율 그래픽=강준구 기자
[저작권 한국일보]국내 전문의 여성 비율 그래픽=강준구 기자

◇남자 의사 ‘펜스룰’ 역차별… “그래도 ’유리천장‘ 깨질 것”

한국사회를 흔든 ‘미투(#Me Too)’운동의 여파도 존재했다. 익명을 요구한 경기도의 모 대학병원 E교수(여)는 “미투 운동으로 병원에서 남자 의사들이 성적 농담이나 신체적 접촉을 조심하는 분위기가 형성된 것은 긍정적이지만 여자 교수들을 회식이나 모임에서 제외하는 일이 많아졌다”며 “전공의 때는 몰라도 교수가 되면 과 전반에 대한 문제 등 다양한 의견을 나눠야 하는데 남자들이 ‘펜스룰’로 자기들끼리만 의사소통을 해 여자 의사들이 피해를 보고 있다”고 말했다.

여성 의사들은 이제 겨우 유리천장 깨뜨리기가 시작됐다고 말한다. 취재과정에서 만난 여성 의사들은 “이제 병원들도 외적 성장보다 내부 소통과 조율을 통해 발전을 이뤄야 하기 때문에 여성 의사들이 병원운영의 전면에 나설 때가 됐다”며 “여성 의사들이 사회적으로 자질과 능력을 인정받기 위해서는 ‘빅 5병원’ 등에서 의료원장이 배출돼야 한다”고 말했다. 박귀원 교수는 “지금까지는 여성 의사들이 자기 앞가림 하기에 급급했지만 향후 10년 정도가 지나면 원장 자리까지 올라갈 여성 의사들이 생길 것”이라고 전망했다. 권성택 서울대병원 성형외과 교수는 “우리병원 교육인재개발실장과 대외협력실장을 맡고 있는 교수가 여성”라며 “실력과 자질이 뛰어난 여성 의사들이 속속 배출되고 있어 병원에서 여성 의사들의 영향력이 커질 것”이라고 말했다.

김치중 기자 cjkim@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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